[ 105 ] [104화] 알보병 vs 땡기병 (2)
로마의 집정관 세르빌리우스는 초조한 눈빛으로 흙먼지를 흩뿌리며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카르타고군의 기병대를 바라보았다.
“그래... 북아프리카의 야만인 녀석들아. 조금만 더 가까이 와라. 곧 저승의 뱃사공 카론에게 노잣돈을 주게 될 거다.”
그는 하스드루발의 기병대 4천 기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직접 병사들의 작업을 지휘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
세르빌리우스는 먼저 휘하의 병사들에게 무방비하게 강에서 물을 긷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누미디아 궁기병의 기습을 유도하고자 했다.
그의 생각대로 유인작전이 먹히면 하스드루발의 기병대는 무턱대고 돌진하다 마름쇠를 뿌려둔 함정지대에 들어서게 될 것이었다.
로마 군단병들은 적군이 탄 말이 마름쇠를 밟고 오도 가도 못 할 때 함정지대 바로 뒤편에 파놓은 참호에 숨어있는 경보병 벨리테스들이 일제히 재블린을 던진다는 집정관의 계획을 머릿속에 그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누미디아 궁기병들이 약 500m 밖까지 다가오자 물 긷는 척 연기하고 있던 로마 군단병들은 세르빌리우스에게 지시받은 대로 일부러 수선을 피우며 당황한 듯 소리쳤다.
“적의 기습이다! 물통을 버리고 방패와 무기를 들어라!”
“내 필룸! 내 필룸 어디 뒀더라?”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적장 세르빌리우스의 속셈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그는 적진과의 거리가 180m 정도 되는 지점에서 말을 멈추고 누미디아 궁기병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말에서 내려 활을 쏠 준비를 해라!”
궁기병 4천 명이 일제히 말에서 내려 재빨리 각궁과 화살 한 대를 집어 들었다.
집정과 세르빌리우스와 로마 군단병들은 하스드루발과 4천 명의 궁기병이 말에서 내려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을 보고도 방패를 들어 올리지 않고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명궁으로 유명한 크레타의 용병 궁수들이라도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표적을 맞히기는 어려울 텐데? 게다가 저들이 든 활은 리라(고대의 현악기) 만큼이나 작지 않나?”
세르빌리우스와 그가 지휘하는 로마 군단병들은 그동안 공성 무기가 아닌 활로 쏜 화살이 50m 이상 날아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한니발이 트레비아 전투에서는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는 병사 중 발레아레스 투석병과 궁기병만 활용했었던 데다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에서도 바르카 가문의 궁수들이 짙은 안갯속에서 활을 쏘아댔기 때문이다.
적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로마 군단병들은 그동안 알 수 없었던 각궁의 위력을 온몸으로 체험해야만 했다.
“발사!”
하스드루발이 외치자마자 누미디아 궁기병 4천 명이 일제히 팽팽히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 쐐애애애애액!
수많은 화살이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적군을 향해 날아갔다.
“끄아아아악!”
“이게 뭐야! 으아악!”
천 명이 넘는 로마 군단병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누미디아 궁기병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화살 비를 정통으로 맞고 죽거나 다쳤다.
그나마 로마군 중장보병들은 화살에 맞아 짚단처럼 쓰러지는 동료들을 보고 얼른 커다란 방패를 들어 올려 화살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참호 속에 숨어있던 벨리테스들은 작은 원형 방패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나뭇가지와 마른 풀로 위장한 참호에서 뛰쳐나와 자신들의 숙영지로 도망쳤다.
“크아악!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
“도망쳐! 우리 방패로는 얼굴밖에 못 가린다고!”
누미디아 궁기병들은 늑대 가죽을 뒤집어쓰고도 겁먹은 토끼 떼처럼 도망가는 벨리테스들을 보고 사기가 올라 큰소리로 외쳤다.
“적군이 도망친다!”
“얼른 저놈들의 등짝에 화살을 먹여주자고!”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활시위에 화살을 거는 부하들을 제지했다.
“사격 중지! 모두 동작을 멈춰라!”
“하스드루발 장군님! 적이 진형도 갖추지 못하고 도망치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적군이 또 숙영지의 목책 뒤로 숨기 전에 한 놈이라도 더 처치해야 합니다!”
“모두 진정해라! 적은 우리보다 다섯 배나 많다. 우리의 임무는 보노니아에 계신 아버지께서 지원군을 보내실 때까지 적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임을 잊지 마라!”
장군의 호통에 누미디아 궁기병들은 젊은 혈기를 억누르고 시위에 걸었던 화살을 다시 화살통에 집어넣었다.
누미디아 궁기병의 장교 한 명이 그에게 잘못을 빌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흥분해서 임무를 잊고 있었습니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다. 지금부터 등껍질 속으로 머리를 숨긴 거북이처럼 숙영지 안으로 숨어버린 적에게 마구잡이로 화살을 날리는 걸 금지한다. 최대한 화살을 아껴 써야 한다. 이제부터 너희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그게 뭡니까?”
“뭐긴 뭐야. 로마군 숙영지 근처를 맴돌면서 적장 세르빌리우스가 아리미눔으로 퇴각할 기미가 보이면 집요하게 괴롭혀 줘야지. 활을 쏠 때는 꼭 말에서 내려서 신중하게 한발 한발 조준사격을 하도록 해라. 그 정도로는 적을 궤멸시킬 순 없겠지만, 로마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행군을 방해할 수는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장군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지시사항이 있다. 적의 투창 사정거리 밖에서 라틴어로 욕을 퍼부으면서 약을 올려줘라. 화살은 충분히 먹여줄 수 없어도 욕은 무한정 먹여줄 수 있으니까.”
“푸하하! 로마놈들이 열 좀 받겠군요! 저번에 가르쳐 주신 라틴어 욕은 아직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 거기에 이번에는 새로운 라틴어 욕을 가르쳐 주겠다. 모두 내 발음을 듣고 한번 따라 해 봐라. 이-그-나-베(Ignave).”
“이-그-나-베.”
* * *
숙영지에 틀어박힌 세르빌리우스는 다시 자신의 막사로 풀라리를 불러 새점을 쳤다.
그러나 벌써 닷새 이상 굶은 닭은 여전히 눈앞에 쌓여있는 모이를 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세르비우스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대체 얼마나 불길한 일이 벌어지려고 비쩍 마른 닭이 먹이를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말이냐! 오오! 전쟁의 여신 미네르바 시여! 부디 저희를 지켜주소서!”
그때 그의 귀에 숙영지를 둘러싼 목책 바깥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함정지대를 교묘하게 피해 숙영지 근처까지 다가온 누미디아 궁기병들이 어설픈 발음으로 라틴어로 욕을 해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그나베! 이~~~그나베!”
젊은 로마의 대대장들이 적군의 조롱을 듣고 분통을 터뜨리며 집정관에게 말했다.
“세르빌리우스 집정관님! 저 야만인들이 우리를 겁쟁이라고 조롱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적 기병대가 잽싸기는 하지만, 수송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니 화살이 충분하지 않을 겁니다! 화살을 낭비하게 해서 쫓아버리시지요!”
그러나 세르빌리우스는 하스드루발의 속내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에 바람처럼 빠른 그의 기병대를 상대하며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너희의 말대로 적은 화살도 군량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도 주변의 마을을 약탈하는 대신 우리 숙영지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건 이곳으로 또 다른 적군이 보급품을 가지고 오고 있다고 봐야 할 거다. 서둘러 퇴각할 준비를 해라. 이런 개활지에서 더 많은 적 기병대라도 마주친다면 올림포스의 신들께서 직접 현현하셔서 우리를 도우시지 않는 한 메타우루스 강에 우리의 피가 흐르게 될 거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로마군 대대장들은 급히 지휘관 막사 밖으로 뛰어나가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도시 아리미눔으로 퇴각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챙길 수 있는 보급품만 몸에 지니고 아리미눔으로 퇴각한다! 수레와 천막은 그냥 내버려두어라!”
로마 군단병들은 대대장들의 명령에 따라 황급히 며칠 분의 식량만 가죽 주머니에 욱여넣고 철로 만든 수통에 물을 채웠다.
로마군 숙영지를 맴돌던 누미디아 궁기병들이 그런 로마군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즉시 본대로 돌아가 하스드루발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로마군이 저희의 도발에 걸려들지 않고 오히려 서둘러 퇴각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적장도 바보는 아니로군. 지금까지처럼 계속 로마군 주변을 맴돌면서 빈틈을 보일 때마다 화살을 날려라.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적군이 아리미눔의 성문을 통과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얼마 지나지 않아 최소한의 보급품만 챙긴 로마군이 숙영지 밖으로 몰려나왔다.
세르빌리우스는 자신의 말에 타는 대신 두 발로 땅을 딛고 병사들 앞에 섰다.
“화살을 방패로 막아내면서 최대한 빨리 퇴각한다! 적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서둘러 아리미눔의 성벽 안으로 돌아가자!”
로마군은 집정관의 인솔 아래 방패로 벽을 만들며 플라미니우스 가도를 따라 북서쪽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은 그 모습을 보고 휘하의 기병들에게 명령했다.
“적을 추격한다! 투창의 사정거리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라!”
곧 누미디아 궁기병 4천 기는 마치 거대한 고래를 사냥하는 범고래 떼처럼 한 덩어리로 뭉쳐 달아나는 로마군 1만 9천 명의 주변을 집요하게 맴돌기 시작했다.
로마군은 사방을 방패로 막아가며 행군했지만, 누미디아 궁기병들은 적군이 팔에 힘이 빠져 무거운 방패를 잠시 내려놓을 때마다 어김없이 화살을 날렸다.
하스드루발과 그의 기병대는 이틀 동안이나 그런 식으로 밤낮없이 로마군을 괴롭혀댔다.
그러나 세르빌리우스도 역사에 침착한 지휘관이라는 평가를 남긴 자답게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아리미눔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갔다.
로마군의 필사적인 퇴각이 시작된 지 사흘째 되던 날에도 피 말리는 추격전은 계속 되었다.
- 피유유유웅!
화살 한 대가 번개처럼 날아와 세르빌리우스의 바로 옆에있던 병사의 얼굴에 박혔다.
“어억!”
보통 사람이면 놀랄 만도 했지만, 세르빌리우스는 침착하게 병사가 놓친 방패를 잽싸게 집어들면서 외쳤다.
“모두 기운 내라! 이제 아리미눔까지 십 스타디온(약 1.8km)도 안 남았다! 저 지긋지긋한 카르타고놈들도 성벽 안까지 따라 들어올 수는 없을 거다!”
누미디아 궁기병대는 지난 사흘 동안 한니발이 수송대를 통해 보내온 화살로 로마군을 약 2천 명 정도 사살했지만, 적군을 궤멸시키기에는 역시 화력이 부족했다.
하스드루발은 집요한 견제를 견뎌내며 도망가는 적장 세르빌리우스의 군대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오른손의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역시 궁기병대는 적을 교란하고 피해를 누적시키는 대는 탁월하지만, 적 본대를 궤멸시킬 만한 한방이 부족하구나. 이대로 다잡은 적장을 놓칠 수밖에 없나?’
그때 서쪽 평원에서 우렁찬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뿌우우우우우우웅
그는 뿔피리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하스드루발의 눈에 하밀카르가 이끄는 갈리아 중기병 1만기가 산을 뽑을 기세로 로마군을 향해 들이닥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드디어! 드디어 아버지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정말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모두 시위에 화살을 걸어라! 당장 아군을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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