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 [106화] 궁지에 몰린 로마
기원전 217년 5월 중순.
로마의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네포스는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패잔병 1천 명과 함께 다리를 절뚝거리며 로마의 일곱 언덕을 둘러싼 세르비우스 성벽 안으로 들어섰다.
로마 시민들은 검에 베이고 화살에 맞은 상처에 제대로 붕대도 감지 못한 채 거리를 지나는 군단병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 말없이 길을 비켰다.
플라미니우스는 절망과 슬픔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마 시민들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떨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6년 전만 해도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개선식을 치렀는데, 지금은 행인에게 그릇을 내밀며 구걸하던 거지도 나를 동정하는구나!”
그는 부상과 피로 때문에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자신의 패배를 직접 원로원에 전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플라미니우스는 그를 알아보고 달려온 로마 수비대의 대대장에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짐수레를 한 대 가져와라. 원로원에 보고하러 가려는데 다리를 삐어서 걷기가 힘들군.”
“수레라니요? 집정관님을 일개 부상병처럼 수레에 타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가마를 대령하겠습니다.”
“내 실책으로 로마 시민 만 명이 스틱스 강을 건넜다. 패장에게는 가마보다 수레가 더 어울린다.”
대대장은 더는 플라미니우스를 말리지 못하고 명령대로 짐수레와 그것을 몰 병사 한 명을 그의 눈앞에 대령했다.
초췌한 몰골의 집정관은 당나귀 한 마리가 끄는 수레 뒤에 탄 채로 원로원의 의사당 건물인 쿠리아 호스틸리아가 있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올랐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는 수레를 몬 병사의 부축을 받으며 쿠리아 호스틸리아의 묵직한 청동문을 열고 들어섰다.
여느 때와 같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던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언제나 위풍당당하던 플라미니우스가 초라한 몰골로 다리를 절며 그들 앞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의사당 건물 한가운데 서자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열어 동료 의원들에게 말했다.
“제가 지휘하는 군단이 큰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자존심 강한 그답게 구차한 변명을 뺀 간결한 보고였다.
다른 원로원 의원들이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을 때 귀족파의 중진 의원인 파비우스가 그에게 물었다.
“존경하는 플라미니우스 집정관님. 전투의 경과와 피해 상황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에트루리아 지역을 벗어나려는 카르타고군을 추격하다 트라시메노 호숫길에서 매복공격을 당했습니다. 아군 이만 사천 명이 전사하거나 적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적장은 에트루리아 지역을 약탈한 뒤 뒤 트라시메노 호숫길을 따라 남하했습니다.”
로마 원로원은 플라미니우스의 보고를 듣고 큰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58세가 될 때까지 자신이 지휘하는 전투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뛰어난 장수였기 때문이다.
한 원로원 의원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그에게 소리쳤다.
“존경하는 플라미니우스 집정관님! 집정관님께서는 매복과 기습이 장기인 갈리아인과 수십 년 동안 싸워오시면서 늘 승리를 거둬오시지 않았습니까?”
“적장 한니발의 간악함이 갈리아인을 훨씬 웃돈다는 사실을 제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면목없습니다.”
작년에 독재관 티베리우스가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다 4개 군단을 날려 먹었을 때 로마인이 느낀 감정은 분노와 슬픔이었다.
그러나 그 절반인 2개 군단을 잃은 트라시메노 호수에서의 패전 소식을 들은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탄식을 자아내는 대신 공포에 몸을 떨며 전시에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작년 겨울 독재관 티베리우스가 패배한 전장은 로마인들이 갈리아 키살피나라고 부르는 북부 이탈리아 지역으로 로마연합의 영토에 편입된 후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나지는 않은 곳이었다.
북부 이탈리아는 아직 개발이 덜 되었고 로마의 동맹도시나 부족도 얼마 없어 그 지역을 잃어도 로마가 입을 타격은 영토의 크기에 비해 보기보다 미미했다.
하지만 에트루리아 지역은 사정이 달랐다.
스키피오의 예비 장인인 아이밀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트루리아는 벌써 이백 년이나 우리 로마를 맹주로 인정하고 따르는 가장 충성스러운 동맹입니다. 그런 에트루리아가 약탈당했다면 로마연합의 뿌리가 흔들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에 마르켈루스도 그답지 않게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동의했다.
“존경하는 아이밀리우스 의원님 말씀대로입니다. 게다가 이제 이탈리아 반도 안에는 로마 수비대와 이탈리아 최남단인 타렌툼의 수비대를 포함해 다섯 군단이 있을 뿐입니다. 앞으로 새로 군단병을 징집하는 두어 달 동안은 저 잔악한 카르타고인들이 우리의 영토를 약탈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자 파비우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마르켈루스에게 대답했다.
“적장에게 약탈당하기 전에 모두 태워버립시다. 시민의 재산을 훼손해야만 하는 상황이 안타깝지만, 지금은 청야전술 펼쳐야 할 때입니다. 이탈리아 중북부의 방어선을 단단히 굳혀 카르타고군의 보급망을 끊고 적장 한니발의 진로에 있는 식량과 마을을 불태워 적군이 굶주리게 한다면 카르타고군은 가뭄을 만난 밀밭처럼 서서히 말라 죽어갈 겁니다.”
파비우스가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순간 평민파 원로원 의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삿대질까지 해가며 소리쳤다.
전략적인 효율성을 떠나 평민파의 지지기반인 중산층 시민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에 찬성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뭐? 마을과 농장을 불태워? 파비우스 의원님! 그럼 평민은 다 굶어 죽으란 말씀입니까?!”
“귀족들은 지방에 있는 별장 몇 개쯤 잃어도 사는 데 별 지장 없겠지요! 하지만 평민에게는 작은 농장 하나가 전 재산입니다! 중산층 자영농의 몰락은 공화정 로마의 몰락임을 잊지 마십시오!”
평민파의 중진 의원인 플라미니우스도 파비우스의 말에 분개했다.
“존경하는 파비우스 의원님! 그게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할 소리입니까? 로마 시민과 동맹도시의 재산을 지켜야 할 군단병에게 오히려 시민의 재산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리라고 명령하라는 말씀인가요? 회의가 끝나면 당장 목욕탕에 가야겠군요! 더러운 말을 들었으니 당장 귀를 씻어야겠습니다!”
“존경하는 플라미니우스 집정관님! 저도 동료 의원님들께 이런 제안을 드릴 수밖에 없어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중하게 강력한 적을 옭아맬 전략을 짜야 할 때입니다!”
파비우스와 플라미니우스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자 다른 원로원 의원들도 귀족파와 평민파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큰 패배를 세 번이나 당하고도 적장 한니발의 능력을 그리도 과소평가하십니까!”
“그동안은 간악한 카르타고인의 계략에 넘어갔기 때문에 전투에서 패배한 겁니다! 적이 잔꾀를 부릴 수 없는 곳에서 정정당당하게 회전을 벌이면 우리 로마군이 질 이유가 없습니다!”
원 역사의 로마 원로원은 최강의 적 한니발에게 맞서 하나로 뭉쳐 일사불란하게 이탈리아 반도 방위에 나섰다.
특히 귀족파인 파비우스와 평민파인 마르켈루스는 뛰어난 팀워크를 발휘해 마르켈루스가 난전을 벌여 한니발이 이끄는 군대의 발목을 잡는 사이 파비우스가 총사령관의 지휘를 받을 수 없는 다른 카르타고군을 공격하며 한니발을 괴롭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대립해온 두 파벌이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는 로마군이 칸나에에서 카르타고군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명장 한니발의 두려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난 후의 일이었다.
현재의 평민파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여전히 비겁한 매복에 당하지 않았으면 무적의 로마 군단병이 서로 말도 안 통하는 여러 민족이 모인 오합지졸 카르타고군에게 패배할 이유가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원 역사와 달리 평민파의 정신적 지주 플라미니우스가 트리시메노 호수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덕분에 로마 원로원에서 평민파의 입지가 좁아지지 않은 것도 논쟁이 더욱 격렬해진 이유였다.
그때 한창 시끌벅적한 쿠리아 호스틸리아의 문을 열고 아리미눔에서 온 전령이 도착했다.
전령은 쉬지 않고 말을 달리느라 전신에서 배어 나온 땀을 닦을 새도 없이 난장판을 벌이고 있는 원로원 의원들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세르빌리우스 집정관님께서 지휘하시던 두 군단이 아리미눔으로 퇴각하던 도중 적장 하밀카르와 하스드루발의 협공을 받고 전멸했습니다.”
다시 한번 로마 원로원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파비우스가 주장하는 청야전술은 세르빌리우스가 이끄는 군대가 한니발에게 가는 바르카 가문의 수송대를 차단한다는 가정하에 성립하는 전략이었다.
북이탈리아에 완전히 자리 잡은 하밀카르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두 아들에게 보급품을 보낸다면 한니발의 진로에 있는 마을을 불태우는 작전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로마 원로원은 다시 한번 한니발과 일전을 벌이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플라미니우스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이제는 정말로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습니다. 카르타고군은 지금 이 순간에도 로마 시민과 동맹도시의 마을과 농장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로마는 전통적으로 나라에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집정관 중 한 명을 독재관으로 삼아 국력을 하나로 모아 위기를 극복해 왔습니다. 부디 저를 독재관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기필코 트라시메노 호수에서 쓰러져간 부하들의 복수를 하고 로마를 구해내겠습니다.”
플라미니우스의 요구는 로마의 법과 전통에 비추어 합당한 것이었다.
결국 로마 원로원은 원 역사에서 로마의 방패 파비우스가 독재관에 임명될 시기에 플라미니우스를 독재관에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 * *
로마군이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군대에 연전연패하며 여덟 개 군단을 잃었다는 소식이 잔에 담긴 맑은 물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처럼 빠른 속도로 전 지중해에 퍼져 나갔다.
이탈리아 반도 내의 로마의 동맹도시들은 언젠가 자신들의 도시에도 한니발의 군대가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반면 북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에 있는 모든 카르타고인은 지중해를 건너온 승전보를 듣고 식탁에 둘러앉아 술잔을 부딪치며 기쁨을 나누었다.
그러나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승전보를 접하고 기쁨과 초조함을 동시에 느끼는 사람도 있었느니 그는 바로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왕이었다.
“카르타고의 야만인들이 로마군을 상대로 잘해야 피로스의 승리를 거둘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전쟁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북이탈리아를 점령하다니 정말 대단하군!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알렉산드로스 3세 대왕의 정통후계자로서 위신이 서질 않겠구나.”
훗날 필리포스 5세라고 불리는 21세의 젊은 왕은 늘 로마의 일리리아 속주를 탐내왔던 데다 수년 전 하스드루발의 활약으로 바르카 가문과 비밀리에 동맹을 맺은 이후 로마에 강한 경계심을 품어왔다.
그는 로마가 한니발과 전쟁을 벌이다 8만이나 되는 대군을 잃은 지금이야말로 불편한 이웃 로마를 약화시키면서 자신의 정복욕을 충족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는 곧바로 시중을 드는 내시를 불러 명령했다.
“이제 위대한 정복 전쟁을 시작할 때가 됐다! 당장 왕국의 모든 장군에게 짐의 칙서를 보내라! 건방지게 그리스를 탐내는 로마의 촌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때가 됐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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