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 [109화] 베네벤툼 전투 (1)
기원전 217년 7월 초.
한니발은 모든 부관을 숙영지의 지휘관 막사로 불러모아 행군 준비를 명령했다.
“내일 아침까지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 보급품을 모두 수레에 실어라. 다음 목표는 이탈리아반도 남서쪽에 있는 캄파니아다.”
사령관의 말을 듣고 바르카 가문의 부관들은 들뜬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캄파니아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비옥하고 부유한 지역이기 때문에 그곳을 공략하면 많은 전리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휴가를 한 달이나 주시더니 이번에는 산더미 같은 전리품을 베푸실 생각이시군요. 병사들이 아주 기뻐할 겁니다.”
“물론 전리품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번 캄파니아 원정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로마군과 다시 한번 회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어 로마연합의 결속을 깨는 것임을 잊지 마라.”
“알겠습니다. 한니발 장군님.”
다음 날 아침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동부 해안가를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다.
한니발의 군대가 휴식을 취한 이탈리아 중동부에 있는 움브리아 지역에서 이탈리아 남서부에 있는 캄파니아까지 가려면 다시 한번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가장 산맥을 넘기 쉬운 고갯길이 그들이 있는 곳에서 남동쪽으로 약 1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휴식으로 원정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낸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새로운 전장을 향해 힘차게 진군했다.
하밀카르가 데려온 코끼리 19마리가 원정대에 합류하는 바람에 자주 보급품을 보충해야 하긴 했지만, 행군 경로가 대부분 평야 지대였기 때문에 조금 무리하면 로마 원정대는 2주 정도면 캄파니아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행군을 서두르지 않고 끊임없이 정찰병을 보내 주변 지역의 지형을 조사하고 행군 도중 마주친 적대적인 마을과 도시를 약탈했다.
로마 원정대가 행군을 시작한 지 6일째 되던 날 저녁, 한니발은 이탈리아 동남부의 도시 라리눔 근처에 숙영지를 지었다.
다른 병사와 장교들이 저녁을 먹고 잠을 청할 때, 하스드루발은 자신의 막사에서 저번 전투에서 전리품으로 얻은 지도를 보면서 다음 전투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원 역사에서 파비우스는 지금쯤 독재관이 돼서 한니발 형이 캄파니아 지역을 마음껏 약탈하게 내버려 두고 대신 카르타고군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했지. 하지만 플라미니우스는 우리가 캄파니아를 휘젓고 다니지 못하게 하려고 할 거야. 그렇다면 다음 전장은 우리가 아펜니노 산맥을 넘자마자 마주치는 베네벤툼 근처가 되겠군.’
그가 등불을 밝혀 놓고 책상 앞에 앉아 고심하고 있을 때, 한니발이 막사의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말했다.
“하스드루발. 역시 아직 깨어 있었구나.”
“형?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좋은 소식이 있어서 알려 주려고 왔어. 조금 전에 정찰을 보냈던 기병대가 돌아왔는데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올해 겨울을 나기 딱 좋은 마을을 발견했다더군. 게루니움이라는 작은 도시인데 강을 끼고 있고 산지에 둘러싸여 있어서 로마군이 기습해도 방어하기 쉬운 곳이라더라.”
하스드루발은 그 말을 듣고 다시 한번 한니발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난 다음 전투 생각에만 매몰돼 있었는데 한니발 형은 벌써 겨울을 날 준비까지 하고 있네. 이렇게 주도면밀하니 원 역사의 로마군이 이탈리아에서 한니발 형이 지휘하는 군대를 한 번도 이기지 못한 것도 당연했겠구나.’
그는 한니발의 말에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형은 대단해. 아직 초여름인데 벌써 겨울을 날 계획도 세워 두다니 말이야. 그럼 독재관이 된 플라미니우스의 군대를 다시 한번 물리칠 계획도 이미 다 세워 놨겠네.”
“전장이 베네벤툼 부근이 될 거라는 것 말고는 생각해 둔 게 없어. 구체적인 작전은 아펜니노 산맥을 넘고 캄파니아에 들어서선 다음 세울 생각이다.”
“뭐? 이번 달 안에 큰 전투를 치르게 될 텐데 아직 생각해 둔 작전이 없다고? 의외인데.”
“알프스를 넘을 때도 한번 얘기한 것 같은데? 지휘관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관찰력이라고 말이야.”
그제야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형은 캄파니아 지역의 지형과 로마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다음 구체적인 작전을 짤 생각이구나. 내가 생각이 짧았다. 내 머릿속에 있는 건 현대의 캄파니아다. 기원전 3세기의 지형과 21세기의 지형은 차이가 커. 어떻게 적군을 물리칠 작전을 세우기 전에 적이 어떤 곳에 자리 잡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 둬야겠다.’
그는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형 말대로 하는 게 좋겠어. 일단 아펜니노 산맥을 넘고 주변부터 샅샅이 살펴본 다음 작전을 짜자.”
* * *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두 형제는 남동쪽으로 약 50km 정도 더 행군한 다음 아펜니노 산맥을 넘기 시작해 7월 중순 즈음에 캄파니아에 발을 디뎠다.
한편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캄파니아로 진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독재관 플라미니우스는 로마 원로원이 새로 징집한 6개 군단 중 4개 군단을 이끌고 이미 캄파니아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갯길을 지나는 카르타고군을 공격하는 대신 카르타고군이 산맥을 넘으면 바로 맞닥뜨리게 되는 도시 베네벤툼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계속 정찰병을 보내 한니발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과감한 전술을 좋아하는 플라미니우스도 트라시메노 호수에서 한니발에게 큰 패배를 당한 후로는 기습이나 매복에 당하기 쉬운 지형에서 카르타고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플라미니우스는 고갯길을 내려오는 한니발의 군대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간악한 카르타고 놈들! 기어코 캄파니아까지 약탈하려고 산맥을 넘어왔구나! 하지만 이번에는 네놈들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그는 한니발의 군대가 산맥을 완전히 내려오기 전에 자신이 지휘하는 병사 4만 4천 명을 전부 데리고 베네벤툼의 성문을 나온 후 군단장들에게 지시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이 캄파니아는 20만 명이 넘는 보조병을 우리 로마에 제공할 수 있는 귀중한 동맹이다. 로마연합의 해체를 막기 위해선 카르타고군이 아펜니노 산맥에서 캄파니아의 광대하고 비옥한 평야 지대인 ‘아게르 팔라르누스’를 약탈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독재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네 명의 군단장은 휘하의 병사들에게 카르타고군의 예상 행군 경로에 숙영지를 짓고 부지런히 한니발의 진영에 정찰병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은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로마군을 보며 한니발에게 말했다.
“적장이 골치 아픈 곳에 진을 치고 있네. 병사 수는 우리가 조금 더 많기는 하지만, 저기서 싸웠다가는 이기든 지든 아군 피해가 만만치 않겠어.”
“잘 봤다. 적장의 의도대로 저곳에서 회전을 벌이면 잘해야 피로스의 승리를 거둘 거다. 아니··· 이곳은 그 피로스마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로마군에게 패배한 곳이니 우리도 적장 플라미니우스에게 질지도 모르지.”
베네벤툼을 지나 아게르 팔라르누스로 가는 길은 평탄하지만, 남쪽과 북쪽이 계곡과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리 넓지 않은 평야 지대였다.
그곳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거의 1만 기에 가까운 바르카 가문의 기병대와 코끼리는 행동반경이(에) 제약을 받아 동선이 단순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거기다 만약 로마군이 전장에 마름쇠 같은 함정을 미리 설치하거나 미리 스콜피온 같은 인마 살상용 공성 무기를 준비해 놓고 한니발의 군대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바르카 가문이 자랑하는 정예기병대와 코끼리는 제대로 활약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원 역사의 한니발 형이 스스로 자신보다 한 수 위라고 평가했던 그리스의 명장 피로스조차 전투 코끼리 20마리에 로마보다 많은 기병을 데리고 있었는데도 여기서 전투를 벌였다가 로마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로마 원정대도 아무런 책략 없이 로마군과 무턱대고 힘 싸움을 벌였다가는 피로스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런 사태를 피하고자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에게 이번에도 매복을 시도해 보자고 제안했다.
“이 주변에는 숲이 많잖아? 그곳에 병사를 매복시켜 놓고 누미디아 궁기병이나 재빠른 경보병으로 로마군을 유인해 보면 어떨까?”
“별로 효과적인 작전은 아닌 것 같다. 로마인은 갈리아인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 오면서 숲에서의 매복공격에는 이골이 났거든.”
“그럼 어쩌지? 이대로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갈 수도 없잖아. 우리 군대가 좁은 고갯길을 지나가려고 등을 보이는 순간 플라미니우스가 후방을 공격할 테니까 말이야.”
“지금은 우리 군대와 로마군의 숫자가 비슷하지만, 적의 일부를 다른 곳으로 유인할 수 있으면 손쉽게 남은 적을 압도할 수 있을 거야.”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일단 이탈리아 동부 해안 지대를 지나면서 전리품으로 얻은 소 떼를 숙영지 한가운데에 모아 줘. 그다음에 이번 작전을 설명해 줄게.”
* * *
플라미니우스는 카르타고군이 아펜니노 산맥을 넘은 후 계속 그 자리를 지키며 한니발의 숙영지 근처로 정찰병을 보냈다.
그러나 한니발은 캄파니아에 발을 들인 후 벌써 사흘이 지났는데도 숙영지에 틀어박혀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망루 위에 올라 카르타고군의 숙영지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다. 적장이 기껏 여기까지 원정 와서 쓸데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을 만큼 어리석은 자는 아닐 텐데. 한니발이 또 뭔가 흉계를 꾸미고 있을 게 분명하다.”
플라미니우스는 그날 밤 모든 군단장과 대대장을 자신의 막사로 호출해 군사회의를 열어 부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대부분의 대대장들은 독재관의 질문에 낙관적인 말을 해 댔다.
“독재관님께서 미리 적이 기병을 활용하기 어려운 지형을 선점하신 덕에 북아프리카의 야만인들이 적잖이 당황한 모양입니다만, 며칠 후면 적장은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회전을 걸어 올 겁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카르타고군은 다시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아풀리아 지방으로 도망치려고 할 겁니다. 그때 적의 등 뒤를 공격하면 어렵지 않게 그동안 죽어 간 로마 시민들의 복수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대대장 중 가장 어린 스키피오의 생각은 달랐다.
“적장 한니발은 도저히 속을 읽을 수 없는 자입니다. 저로서는 또 어떤 계략으로 우리의 방어선을 뚫으려 할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적군의 행동을 철저히 감시하기 위해서라도 서쪽에 있는 언덕으로 숙영지를 옮겨야 합니다. 그곳이라면 정찰병을 보내지 않고도 적군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플라미니우스는 두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며 역정을 냈다.
“닥쳐라! 누가 귀족 출신이 아니랄까 봐 겁쟁이 파비우스와 똑같은 소리를 해 대는구나! 여기서 숙영지를 서쪽으로 옮기면 카르타고인들은 목줄 풀린 맹견처럼 캄파니아 전역을 약탈해 댈 걸 모르느냐?”
“캄파니아는 풍요롭지만 로마와 가깝고 대부분 평지라 수비에 불리해서 카르타고군이 겨울을 나기 적당한 곳은 아닙니다. 적장을 평야 지대로 유인하시고 아펜니노 산맥의 고갯길을 모두 틀어막으신다면 가증스러운 원수들을 앞으로 로마에서 보내올 지원군과 함께 앞뒤로 포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잘하면 적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고 적을 놓치더라도 적이 캄파니아에서 얻은 전리품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들었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전략이었다.
그러나 평민을 지지 기반으로 둔 플라미니우스는 도저히 그의 전략을 수용할 수 없었다.
“적군이 전리품을 못 챙기더라도 로마 시민과 동맹 도시의 농장은 다시 한번 잿더미가 될 것이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카르타고인의 만행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스키피오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다른 대대장들도 격노한 독재관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헛기침만 해 댈 뿐이었다.
그때 정찰을 나갔던 기병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지휘관 막사로 들어와 플라미니우스에게 보고했다.
“플라미니우스 독재관님께 보고드립니다! 카르타고군의 숙영지에서 횃불을 든 병사들이 몰려나와 두 방향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야간이라 정확한 적군의 수를 알 수는 없었지만, 횃불의 수로 미뤄 볼 때 적군 약 1만 명이 베네벤툼으로 몰려가고 있고 나머지 4만 명은 우리 군의 숙영지를 지나쳐 아게르 팔라르누스로 향하려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한니발이 움직이는구나! 아에티우스 군단장!”
“네. 독재관님.”
“적장은 우리가 전군을 이끌고 베네벤툼을 지원하러 가면 아게르 팔라르누스를 약탈할 생각일 거다. 나는 1, 3, 4군단을 직접 지휘해 평야 지대로 진격하는 한니발의 발목을 붙잡겠다. 자네는 그동안 2군단을 이끌고 베네벤툼을 공격하는 적의 별동대를 섬멸한 다음 적장의 배후를 공격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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