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 [110화] 베네벤툼 전투 (2)
독재관 플라미니우스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로마군은 두 무리로 갈라져 베네벤툼과 아게르 팔라르누스로 진격하는 카르타고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출동했다.
스키피오는 베네벤툼 방위 임무를 맡은 로마 2군단에서 로마 기병 500기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2군단의 군단장 아에티우스는 숙영지를 나서며 대대장들에게 명령했다.
“구름이 달을 가리는 바람에 맨눈으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구나. 병사들에게 횃불을 들게 하고 행군을 서둘러라. 최대한 빨리 베네벤툼으로 진격하는 적을 물리친 다음 적 본대의 배후를 공격해야 한다.”
스키피오는 군단장의 명령대로 동쪽으로 말을 몰면서도 한니발의 정확한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는 대열의 중간에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는 군단장 아에티우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에티우스 군단장님. 베네벤툼이 작은 도시이긴 하지만, 제법 튼튼한 성벽으로 보호받고 있어서 적이 전군을 동원해 공성전을 벌여도 하룻밤 만에 그곳을 점령하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그런데 카르타고군은 고작 1만 명 정도의 병사로 베네벤툼을 공격하려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합니다.”
“스키피오 대대장. 자네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어떤 도시든 성벽이 보호하는 건 신전이나 원로원 의회 건물 같은 주요시설이 모여있는 도심지뿐이다. 농장이나 목장은 군대가 나서지 않으면 적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지. 카르타고군은 베네벤툼 인근의 농장을 약탈해 캄파니아의 동맹도시들이 우리 로마가 연합 맹주의 자격이 없다고 여기게 하고 싶을 거다.”
군단장의 말에는 근거가 없었지만, 개연성은 있었다.
스키피오는 군단장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러나 카르타고군이 그리 많지 않은 병력을 성벽으로 보호받고 있는 도시 쪽으로 몰아가는 다른 이유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군단장님의 말씀이 맞기를 바랍니다. 전쟁의 여신 미네르바께서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주시길.”
그는 군단장의 말에 대답하고 자신이 이끄는 기병들에게 돌아가 서쪽에서 몰려오는 수천 개의 횃불을 향해 진군했다.
적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군단장 아에티우스가 대대장들에게 명령했다.
“이제 오 스타디온(약 700m) 정도만 더 전진하면 적군과 맞닥뜨리게 된다. 벨리테스들에게 적 기병대의 진로에 마름쇠를 뿌리고 필룸을 던질 준비를 시켜라.”
플라미니우스는 트라시메노 전투에서 패배한 후 바르카 가문의 강력한 기병대를 상대하기 위해 나름대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왔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털어 로마군의 가난한 경보병 벨리테스에게 관통력이 좋은 고급 투창 필룸과 마름쇠를 지급했다.
또한 플라미니우스는 원래 로마 군단병 중 가장 고참인 트리아리만 가지고 다니는 긴 창을 다른 로마군의 중장보병들도 장비하도록 지시해 기병돌격에 대응하고자 했다.
말을 대량으로 기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이탈리아 반도의 특성상 로마 원로원이 한꺼번에 많은 기병을 징집할 수 없는 점을 고려해 보병으로 기병을 상대할 방법을 찾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횃불들이 좀 더 가까이 다가오자 로마군 2군단의 모든 장교와 병사들은 자신들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소...? 여기까지 병사 대신 소 떼를 몰고 왔다고...?”
이베리아족 중기병 1천 기와 함께 소 떼를 몰던 하스드루발은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로마군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니발 형의 말대로 로마군이 제대로 걸려들었다! 이걸로 이번 전투도 절반은 이긴 셈이다!”
한니발은 며칠 전 하스드루발에게 에트루리아와 동부 이탈리아의 평야 지대를 지나면서 약탈한 소 4천 마리의 뿔에 횃불을 달고 야간에 베네벤툼 방향으로 몰고 가도록 지시했다.
원 역사의 기원전 217년.
한니발이 트라시메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캄파니아 지역을 약탈하자 독재관 파비우스는 아펜니노 산맥의 모든 고갯길을 차단해 그의 퇴로를 차단했다.
그러자 한니발은 소 수천 마리의 뿔에 횃불을 단 후 그리 많지 않은 병사에게 맡겨 야간에 적진 깊숙한 곳으로 몰고 가게 해 고갯길을 지키던 로마군이 이미 카르타고군이 자신들의 포위망을 벗어났다고 착각하게 했다.
결국 로마군은 한니발의 군대 대신 소 떼를 쫓아가다 포위를 풀게 되었고 한니발은 캄파니아에서 얻은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아펜니노 산맥의 고갯길을 지나 겨울을 나기 좋은 이탈리아 동남부 지역으로 도망쳤다.
한니발은 이번에도 비슷한 전략을 생각해냈고 원 역사의 소 떼를 활용한 기만 전략을 잘 알고 있던 하스드루발은 형이 생각해낸 작전을 주도면밀하게 실행해 로마군을 감쪽같이 속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아에티우스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주변에 있는 장교들에게 소리쳤다.
“교활한 카르타고인에게 또 속고 말았구나! 그럼 지금 플라미니우스 독재관님은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평야에서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적과 사투를 벌이고 계신다는 말이지 않나! 모두 진군을 멈춰라! 최대한 빨리 독재관님을 도우러 가야 한다!”
군단장의 명령에 로마 2군단은 황급히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기 위해 하스드루발에게 등을 보이고 말았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적군이 한니발의 배후를 치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어딜 그냥 가려고! 적이 퇴각하려 한다! 당장 소꼬리에 불을 붙여라!”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누미디아 궁기병들이 미리 소꼬리에 묶어둔 밀짚에 손에 들고 있던 횃불로 불을 붙였다.
그러자 엉덩이에 불이 붙은 소 4천 마리가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며 일제히 전방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 음머어어어!
로마 2군단의 병사들은 행군 방향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바꾸는 도중 갑자기 뿔에 횃불을 단 소 떼가 미친 듯이 달려오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저게 뭐야! 소 떼가 몰려 온다!”
“으아악!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로마 군단병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지휘관의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소 떼를 향해 산발적으로 투창을 던져댔다.
그러나 사정거리를 재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던진 투창은 대부분 힘없이 땅에 떨어져 버렸다.
결국 로마 2군단의 병사들은 저돌적으로 밀려오는 불꽃의 물결에 휩쓸리고 말았다.
- 콰과광!
로마 군단병 수천 명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소의 뿔과 어깨에 부딪혀 땅에 내동댕이쳐졌다가 묵직한 발굽에 짓밟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네벤툼 주변의 초원이 소 울음소리와 혼비백산하며 도망치는 로마군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끄아아아악!”
“다리가 부러졌어! 살려줘!”
군단장 아에티우스는 혼란에 빠진 병사들 사이를 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놈들아! 손에 든 창은 장식품이냐? 소 따위에 겁먹지 마라!”
그때 성난 소 한 마리가 달려와 군단장이 탄 말의 옆구리를 뿔로 들이받았고 그는 타고 있던 말과 함께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으어어억!”
그렇게 군단장 아에티우스는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의 몸통에 깔려 즉사했다.
군단장이 허망하게 전사하고 성난 소들이 계속 군단병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뿔로 들이받는 바람에 결국 로마 2군단의 보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 군단병이 패주하자 보조병 기병대 500기 중 캄파니아가 고향이 아닌 자들은 꼬리에 불이 붙어 미쳐 날뛰는 소 떼를 피해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제 2군단에서 패주하지 않은 것은 스키피오의 뛰어난 지휘 덕에 소 떼의 돌진을 피한 로마 기병 500기와 그의 주변에 모여든 일부 캄파니아 출신 보조병 기병 수십 기뿐이었다.
500명이 조금 넘는 기병들은 하나같이 그의 얼굴만 쳐다보며 지시를 기다렸다.
그 중 한 명이 스키피오의 곁으로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
“스키피오 대대장님! 이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패잔병을 수습하실 겁니까? 아니면 저희만이라도 플라미니우스 독재관님을 도우러 갑니까?”
그 말에 스키피오는 공포와 흥분을 가라앉히며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뿔과 꼬리에 불이 붙어있는 소 떼는 광폭하게 날뛰고 있었고 로마군의 패잔병 중 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카르타고군의 중기병 1천 기가 그런 패잔병들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리기 위해 한 손에 외날검 팔카타를 들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는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휘하의 기병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플라미니우스 독재관님을 지원하러 가면 저기 몰려오는 카르타고의 기병대가 우리의 뒤를 쫓을 것이다. 우리보다 두 배는 많은 적 기병대의 추격을 받으며 독재관님을 도우러 가봐야 전황을 바꿀 수는 없다. 분하지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쓸모있는 일은 최대한 빨리 로마 원로원에 이 참담한 소식을 알리는 것뿐이다.”
로마 기병들은 침통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지만, 대대장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스키피오는 이베리아족 중기병 1천 기가 덤벼들기 전에 500기가 조금 넘는 휘하의 기병대를 이끌고 로마를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이베리아족 중기병 중 한 명이 도망치는 로마 기병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저기 로마군 기병대가 도망치고 있습니다! 저놈들을 추격하시겠습니까?”
하스드루발은 병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흘끗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저쪽은 로마로 통하는 아피아 가도로 가는 길이다. 저놈들은 아군 본대의 후방을 공격하는 대신 로마로 도망칠 생각인 모양이군. 그냥 내버려 둬라. 기병 오백 기 정도를 쫓아가서 잡는 시간에 이곳의 패잔병을 정리하고 독재관 플라미니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편이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거다.”
하스드루발은 성난 소 떼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망치는 로마 군단병들을 집요하게 추격해 섬멸했다.
그때 베네벤툼에서 서쪽으로 10km쯤 떨어진 곳에서는 한니발의 군대와 로마의 3개 군단이 회전을 벌이고 있었다.
플라미니우스의 군대는 보병 3만 명에 기병 3천 기뿐이었기 때문에 한니발이 직접 지휘하는 5만 대군을 상대로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플라미니우스는 한니발의 뛰어난 전술과 수적 우세를 앞세워 로마군을 밀어붙이는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을 보며 울부짖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분명 적과 아군의 수는 별 차이 없었거늘! 저 많은 적군이 갑자기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2군단이 제때 오지 않으면 이곳이 내 무덤이 되겠구나!”
그는 오직 군단장 아에티우스가 이끄는 2군단이 한니발의 배후를 공격하기만을 기다리며 당장에라도 패주할 것 같은 군단병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이미 한니발의 군대가 압도하고 있는 전장에 도착한 것은 아에티우스가 이끄는 군단이 아닌 하스두르발의 기병대였다.
전투가 벌어진 평야 지대가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한니발이 일찌감치 로마 기병대를 전멸시킨 덕분에 이베리아족 중기병 1천 기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로마군 본대의 배후로 돌아가 적을 포위했다.
플라미니우스는 본대 후방의 트리아리들이 갑작스럽게 등 뒤에서 돌진해온 적 기병대의 공격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2군단이 전멸했구나... 승리의 여신 니케께서는 이번에도 한니발의 손을 들어주실 생각이신가... 내 비록 역사에 어리석은 장수로 기록되겠지만, 겁쟁이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플라미니우스는 허리춤에서 글라디우스를 뽑아들고 함성을 지르며 전방에서 몰려오는 카르타고군을 향해 말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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