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 [111화] 삼니움족과의 협상
독재관 플라미니우스는 단신으로 적진으로 돌진한 후 갈리아 보병 대여섯 명을 베어 넘기며 분투했지만, 결국 이름 모를 병사가 내지른 창에 옆구리를 찔려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러나 목숨 대신 명예를 선택한 플라미니우스와는 달리 로마군 병사 대부분은 이미 패배가 확실한 전장에서 도망치는 일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로마인 중에는 패색이 짙은 전장에 불필요하게 목숨을 내던지는 것보다 강력한 적과 싸워 본 경험을 가지고 훗날 복수를 도모하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로마의 군법도 이런 시민들의 생각을 반영해 이미 전투에서 패배한 경우 퇴각 명령이 떨어지지 않은 경우에도 전장에서 도망치는 것을 금지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독재관이 전사하는 모습을 본 로마군 병사들은 대대장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로마군의 배후를 공격하고 있는 하스드루발의 기병 1천 기는 완전한 포위망을 짜기에는 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아피아 가도가 있는 북서쪽으로 달아나는 패잔병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하스드루발은 오른손에 든 횃불을 높이 들고 이베리아족 중기병들에게 명령했다.
“도망치는 적을 한 놈이라도 더 처치해라! 오늘 놓친 패잔병들이 내일 다시 우리 앞을 가로막고 검을 휘두를 거다!”
한니발도 동생이 분투하는 모습을 보고 기병대장 마하르발과 아즈루바알에게 명령했다.
“하스드루발의 기병대와 함께 적을 섬멸해라!”
달빛도 비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든 바르카 가문의 기병대가 계곡의 급류처럼 굽이칠 때마다 로마군 병사의 처절한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 * *
‘로마군이 캄파니아에서 패배하고 독재관이 전사했다.’
이 스무 자가 조금 넘는 짧은 문장이 가진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베네벤툼 전투에서 승리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전 지중해의 국제 정세가 격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은 로마의 일리리아 속주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더욱 서두르기 시작했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왕도 원 역사처럼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는 대신 마케도니아의 배후를 위협하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정복해 버리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서지중해의 거의 모든 상품과 정보가 모이는 무역항 카르타고 노바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 중 가장 빨리 격변하고 있는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탈리아에서 싸우고 있는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전령을 보내 그 사실을 알렸다.
기원전 217년 7월 말.
여전히 캄파니아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한니발은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보낸 서신을 받자마자 원정대의 모든 장교를 자신의 막사로 부른 다음 그 사실을 알렸다.
바르카 가문의 장교들은 지중해 세계의 최강대국을 자처하는 디아도코이 왕국 중 두 나라가 로마와 그 동맹국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필리포스 왕이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는군요! 그 유명한 마케도니아의 정예 장창병 부대가 이탈리아 동부 해안에 상륙한다면 양쪽에서 로마를 두들겨 댈 수 있을 겁니다!”
“그뿐입니까! 시칠리아 쪽의 제해권만 완전히 확보되면 본국에서도 바다를 건너온 지원군이 이탈리아 서부 해안에 상륙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다른 장교들이 하나같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뻐하는 데도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그런 두 형제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니발에게 물었다.
“두 장군님께서는 어째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계십니까? 위대하신 바알 함몬의 도움으로 지중해의 두 강대국이 적극적으로 우리와 함께 로마와 싸우기로 한 사실이 기쁘지 않으십니까?”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움직임은 분명 환영할 만한 것이지. 그렇지만 캄파니아에서 대승을 거뒀는데도 이탈리아반도 안의 도시나 부족 중에서는 아직도 우리 편으로 돌아선 곳이 하나도 없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군.”
카르타고군이 플라미니우스가 이끄는 로마군 4만 4천 명 중 약 3만 5천 명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삼는 큰 승리를 거둔 지 3주가 다 되어 가는데도 캄파니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은 아직도 성문을 굳게 닫고 한니발의 동맹 요청을 거부하고 있었다.
냉철한 한니발도 다른 지역의 그리스계 도시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캄파니아 지역 도시들의 고집스러운 저항에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 원정대에서는 오직 하스드루발만이 그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은 로마연합 동맹 도시의 평민들이 자기 도시의 귀족과 로마 원로원에게 저항할 엄두를 못 내고 있구나.’
원 역사의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이 칸나에 전투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을 거둔 후에도 로마와의 동맹을 파기한 동맹도시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후세의 역사가들은 로마가 그동안 연합의 맹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로마연합이 붕괴되지 않았다고 평가해 왔다.
그러나 한니발이 칸나에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에는 로마연합에 계속 남기로 결정한 동맹도시 내부에는 한니발의 편에 서고 싶어 하는 시민이 친로마파 시민보다 더 많은 경우가 생각보다 훨씬 흔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로마 원로원이 동맹 도시의 기득권층인 귀족계급에 모든 권력과 특혜를 몰아주고 동맹시의 평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원천봉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로마연합 소속 도시의 귀족들은 세금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도시를 지켜 주고 알아서 골치 아픈 평민세력을 탄압해 주는 로마가 계속 연합의 맹주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동맹도시의 평민들은 길을 가다가도 로마인과 마주치면 바닥에 침을 뱉는 경우가 많았다.
예전에는 고향으로 쳐들어오는 외적과 싸울 때만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섰지만, 이제는 로마 원로원이 정복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할 때마다 보조병으로 징집되어 로마가 일으키는 전쟁에 끌려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동맹도시의 평민들이 로마군과 함께 피와 땀을 흘리며 전투에서 승리해도 전쟁을 통해 얻은 영토와 전리품은 대부분 로마 시민들이 차지해 버렸다.
동맹도시의 평민들이 로마와의 동맹을 깨고 한니발 편을 들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원 역사의 로마 원로원은 한니발의 군대와 싸우는 와중에도 여러 동맹도시에 군단병을 보내 친카르타고파 시민들을 탄압하여 로마연합의 붕괴를 막았다.
하스드루발은 동맹도시의 평민들이 로마 원로원과 귀족의 탄압을 이겨 내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 분명 원 역사보다 많은 로마연합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원 역사의 한니발 형도 나중에 이 점을 깨닫고 이탈리아의 해방자를 자처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지. 많은 동맹시의 평민들이 문자 그대로 목에 칼을 들이대는 로마군의 위협에 겁을 먹고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나마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이 한니발 형의 편으로 많이 돌아섰던 건 아마도 고대 아테네식 민주주의를 경험해 본 시민들이 로마의 탄압을 더 괴로워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거야.’
그러나 그는 원 역사의 많은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로마연합을 탈퇴하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있어도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쉽게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 숙영지의 정문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병사 한 명이 지휘관 막사 안으로 들어오더니 한니발에게 경례한 후 입을 열었다.
“한니발 장군님께 보고드립니다. 스스로 삼니움족의 부족장이라고 밝힌 자가 숙영지 앞으로 찾아와 장군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삼니움족의 부족장이라고? 위대하신 바알 함몬께서 귀한 손님을 우리에게 이끌어 주셨구나! 마하르발. 자네가 직접 가서 귀빈을 정중히 모셔오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밖으로 나가자 한니발은 병사들을 시켜 손님에게 대접할 질 좋은 포도주와 가벼운 안주상을 들여오게 했다.
하스드루발은 삼니움족에서 직접 부족장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벌써 삼니움족의 부족장이 찾아오다니! 저번 전투에서 승리한 덕에 드디어 로마연합의 뿌리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긴 하구나! 그런데 다른 도시나 부족은 아직 요지부동인데 유독 삼니움족만 우리를 찾아온 게 좀 이상하긴 하네.’
삼니움족은 이탈리아 중남부의 아펜니노 산맥에 사는 호전적인 산악 부족으로 약 80여 년 전 로마에게 정복당해 강제로 로마연합에 편입된 부족이다.
원 역사의 삼니움족의 일부 부족은 한니발이 칸나에에서 대승을 거둔 후에야 카르타고군의 편에 서서 로마군을 상대로 싸우기로 결심한다.
한니발의 지시를 받은 병사들이 막 주안상을 차렸을 때,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붉은색 염료로 물들인 튜닉을 입은 건장한 중년 남자를 막사 안으로 안내했다.
삼니움인은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한니발이 사령관임을 알아보고 예를 갖추어 그리스어로 인사했다.
“전 지중해에 명장으로 명성이 자자하신 한니발 장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삼니움족의 부족 중 하나인 카우디니족의 부족장 겔리우스입니다.”
겔리우스가 정중하게 인사하자 한니발도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려 삼니움족의 부족장을 환대했다.
“아펜니노 산맥의 주인 삼니움족의 부족장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바로 로마 원정대의 사령관 한니발입니다. 어서 자리에 앉아 말씀을 나누시죠.”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을 제외한 모든 장교를 막사 밖으로 내보낸 후 겔리우스와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스드루발은 곧 조금 취기가 오른 겔리우스의 말을 듣고 삼니움족의 부족장이 원 역사보다 1년 이상 이른 시기에 한니발을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니발 장군님께서 사만 명이 넘는 로마군을 ‘말레벤툼’ 근처에서 박살 내 버리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릅니다! 살아서 도망친 자는 팔천 명도 안 됐다지요? 말레벤툼은 수백 년 전부터 우리 삼니움족이 신성하게 여겨 온 곳입니다!”
겔리우스는 물도 섞지 않는 포도주 한잔을 단숨에 들이켜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로마인들은 우리에게 굴욕을 주기 위해 수십 년 전 우리에게서 말레벤툼을 빼앗아 흉물스러운 요새를 짓고는 우리의 성지를 ‘베네벤툼’이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더는 이런 치욕을 참고 살아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저희 카우디니 부족은 로마의 일곱 언덕을 모두 불태우고 삼니움족이 자유를 되찾을 때까지 한니발 장군님과 함께 목숨을 바쳐 로마군과 싸우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하스드루발은 절로 고개 끄덕여졌다.
‘그러니까 삼니움족에게 있어서 베네벤툼의 성벽은 일제가 경복궁 앞에 지은 조선총독부 건물 같은 거구나. 하긴 20세기 초반 조선인들도 조선총독부 건물 앞에서 조선을 해방시키겠다는 외국 군대가 일본군을 무찔렀으면 열광했겠지.’
한니발은 겔리우스의 잔에 포도주를 채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용맹한 삼니움족과 바르카 가문이 동맹을 맺는다면 전 이탈리아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것도 꿈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겔리우스 부족장님. 카우디니 부족을 제외한 다른 삼니움족 부족도 로마군과 싸우고 싶어 하는지 궁금하군요.”
“아직 다른 부족들은 로마연합을 탈퇴할 결심을 하지 못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부족의 부족장들도 기회만 되면 로마로부터 자유를 되찾고 싶어 하지만, 아직은 강력한 로마 군단을 겁내서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자 하스드루발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며 겔리우스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바르카 가문의 군대와 카우디니족이 힘을 합쳐 ‘말레벤툼’을 탈환하여 삼니움족에게 돌려주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모든 삼니움인이 로마에게서 자유를 되찾기 위해 검을 들까요?”
그 말을 듣자마자 겔리우스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검을 들다 뿐입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삼니움인은 바르카 가문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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