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 [112화] 이탈리아의 해방자 한니발
하스드루발이 말레벤툼 탈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카우디니족의 부족장 겔리우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러나 한니발은 삼니움족과 동맹을 맺을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도 말레벤툼을 공격하는 건에 대해서는 아직 회의적이었다.
그는 부족의 성지를 되찾을 생각에 흥분한 겔리우스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말레벤툼은 규모가 작고 평야 지대에 있어 공략하기 까다로운 도시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 군은 행군 도중 늪지대를 지나오느라 공성 무기를 별로 가져오지 않아 공성전을 벌이는 것은 좀 망설여지는군요.”
“그 점은 걱정 마십시오! 장군님의 병사들이 쓸 공성무기는 우리 카우디니족이 제공하겠습니다. 우리 부족의 기술자들은 로마군처럼 거대한 공성탑을 만들 수는 없어도 튼튼한 사다리나 투석기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습니다.”
“그게 대체 뭡니까?”
“말레벤툼을 되찾은 다음 도시를 지킬 방안을 미리 생각해 둬야 한다는 점입니다. 아피아 가도를 타면 로마에서 출발한 적군이 말레벤툼에 도착하기 까지는 열흘도 채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그건 그렇군요. 확실히 우리 부족의 병력만으로는 로마군의 공격으로부터 말레벤툼을 지켜내기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일단 성지를 탈환하고 나면 분명히 다른 부족들도 조상 대대로 내려온 삼니움족의 영토에서 로마인을 몰아내기 위해 허리춤에서 검을 뽑을 겁니다.”
“그럼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말레벤툼을 공격하가 전에 겔리우스 부족장님께서 삼니움족의 다른 부족장님들을 로마와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설득하시고 그동안 저는 제 동생과 함께 도시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주일 뒤에 우리와 뜻을 함께할 부족장님들을 모시고 다시 두 분을 찾아뵙겠습니다.”
겔리우스는 한니발과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형제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는 겔리우스를 숙영지 밖까지 배웅했다.
한니발은 카우디니족의 사절단과 작별인사를 나눈 후 숙영지로 돌아가면서 동생에게 말했다.
“잠깐 다시 내 막사로 돌아가자. 할 말이 있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의 목소리에 노기(怒氣)가 조금 묻어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형은 내가 삼니움족 부족장 앞에서 말레벤툼 탈환 얘기를 꺼낸 게 별로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네.’
그의 예상대로 한니발은 자신의 막사에 발을 들이자마자 냉랭한 목소리로 하스드루발을 꾸짖었다.
“왜 겔리우스 부족장 앞에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거냐? 너 때문에 예정에 없던 공성전을 치르게 생겼어. 삼니움족은 갈리아인처럼 부족 간의 결속력이 약한 민족이야. 겔리우스 부족장 말대로 말레벤툼을 삼니움족에게 되찾아준다고 해서 전 삼니움족의 부족이 우리 가문과 동맹을 맺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고.”
“삼니움족은 여태까지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반란을 일으켜왔다고 들었어. 형도 알다시피 삼니움족은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가 로마를 공격했을 때 피로스와 동맹을 맺은 이탈리아의 도시와 부족 중에서 제일 열심히 로마군과 싸웠잖아.”
“그건 벌써 60년 전 이야기다. 지금은 로마의 통치를 인정해버린 삼니움족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지금도 삼니움족의 다섯 대부족 중 우리를 찾아온 건 카우디니족 뿐이잖아! 일주일 뒤에 열릴 회담에서는 말레벤툼을 공격하는 건 내년쯤으로 미루자고 얘기해보는 게 좋겠다.”
한니발이 내린 판단은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생각하면 대단히 합리적이었다.
그의 말대로 삼니움족의 부족 간 결속력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내전을 벌이는 갈리아인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원 역사에서 카르타고군이 칸나에에서 로마의 8개 군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후에도 삼니움족은 부족 간의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일부 부족은 한니발과 동맹을 맺고 나머지는 계속 로마의 동맹으로 남아 로마군에 보조병을 제공했다.
그러나 원 역사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하스드루발은 약간의 계기만 마련해주면 모든 삼니움인이 로마의 압제에 저항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형 말대로 삼니움인의 결속력은 그리 끈끈하지 않아. 그렇지만 그들의 로마인에 대한 원한은 갈리아인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깊어. 지금은 로마 원로원의 탄압에 무기력해진 삼니움인들도 자신들의 성지인 말레벤툼을 되찾고 나면 잊고 있던 저항정신을 불태울 거야.”
“무슨 근거로 삼니움인의 원한이 갈리아인보다 깊다는 거야? 북부 이탈리아의 갈리아인은 자존심이 강한 데다 겨우 몇 년 전에 로마에게 고향을 빼앗겼어. 트라시메노 호수에서 고향을 빼앗은 적장 플라미니우스를 죽이려고 눈에 핏대를 세우고 로마군에게 덤벼들던 인수브레스족 전사들의 모습을 벌써 잊은거야?”
“갈리아인들은 원래 로마하고는 계속 적대관계였잖아. 하지만 삼니움족은 원래는 로마하고 동맹관계였어. 그런데 로마인들은 공공의 적이었던 갈리아인의 위협에서 벗어나자마자 동맹을 깨고 삼니움족과 전쟁을 벌였지. 그 뒤로 삼니움인은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네 번이나 로마와 큰 전쟁을 벌여왔지만 결국 로마군에게 정복당하고 말았지.”
“그건 몰랐구나... 그래서 네가 겔리우스 부족장이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말레벤툼 탈환 얘기를 꺼낸 거구나. 그렇다면 전 삼니움 부족과 동맹을 맺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군. 동맹국에게 배신 당하는 원한은 우리 카르타고인도 잘 알고 있으니 우리와 삼니움족 사이에는 통하는 부분이 많겠어.”
기원전 343년까지 로마와 삼니움족이 동맹이었듯이 지금은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카르타고와 로마도 불과 47년 전에는 서로를 동맹국으로 여기고 있었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가 로마의 영토인 이탈리아 반도와 카르타고의 영토인 시칠리아를 모두 공격하자 동맹을 맺고 바다와 육지에서 그리스인 침략자를 몰아내기 위해 함께 싸워왔다.
그러나 로마는 피로스의 위협이 사라지고 나서 불과 11년 뒤에 카르타고의 영토인 시칠리아를 탐내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양국 간의 우호관계를 깨고 1차 포에니전쟁을 일으켰다.
반면 카르타고인들은 한때 카르타고를 보호해준 도시국가 우티카보다 카르타고의 국력이 훨씬 강해진 지 수백 년이 지난 후에도 은인의 나라에 대한 예우를 지킬 정도로 외교적 의리를 중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은 로마의 배신에 더욱 치를 떨며 복수를 다짐해온 것이다.
한니발은 동생의 의견을 받아들여 삼니움인의 영토에 로마인이 세운 식민지를 몰아내 카르타고와 삼니움족 간의 우호관계를 확실하게 다지기로 마음먹었다.
“기왕 삼니움인을 로마에게서 해방시킬 거면 삼니움 지역의 다른 로마의 식민지도 되찾는 게 좋겠다. 말레벤툼에 베누시아까지 되찾게 되면 네 말대로 모든 삼니움 부족이 완전히 우리 가문에 충성하게 될 거야. 두 도시는 아피아 가도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니까 그곳을 동맹부족이 차지하고 있으면 전략적으로도 큰 도움이 될 거다.”
“베누시아를 공격한다고? 거긴 말레벤툼 보다 훨씬 점령하기 어려운 곳이야. 로마가 삼니움인을 감시하려고 인근 지역에서 제일 높은 산 위에 지은 요새라고.”
“그러니까 더 공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거다. 로마가 삼니움인을 탄압하기 위해 세운 두 도시가 모두 함락되고 삼니움인이 완전히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면 전 이탈리아의 민중들이 우리를 주목할 테니까 말이야. 로마 원로원은 이번 전투에서 잃은 군단병을 새로 징집해서 훈련 시키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적어도 올해는 우리를 방해할 여력이 없을 거다.”
하스드루발은 형의 말을 듣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구나! 확실히 우리가 이탈리아 동남부를 점령했을 때 말레벤툼과 베누시아를 마음껏 지날 수 있으면 보급을 받는 데 도움이 많이 될 거야! 로마군이 점령지를 되찾으러 공격해 올 때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거고! 형 말대로 하면 명분과 실리를 한 번에 챙길 수 있겠네!”
“그렇겠지. 자! 새로운 목표가 생겼으니 빨리 움직이자. 너는 주변의 숲에서 나무를 베어다 아르키메데스에게 공학을 배운 병사들을 지휘해서 공성탑을 만들도록 해. 우리 병사들이 삼니움인이 가져온 조잡한 사다리로 성벽을 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알았어! 이제 올해가 가기 전에 ‘이탈리아의 해방자 한니발’의 이름이 전 지중해에 널리 퍼지겠네!”
한니발은 동생의 말에 대답 대신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 * *
한니발과 카우디니족의 부족장 겔리우스가 첫 회담을 마치고 어느덧 일주일이나 기원전 217년의 달이 8월로 바뀌었다.
부족장 겔리우스는 한니발과의 약속을 지켜 다른 부족에서 보낸 삼니움족의 사절단과 함께 캄파니아 지역 한가운데에 있는 바르카 가문의 숙영지로 찾아갔다.
삼니움족 사절단의 수행원들은 바르카 가문의 숙영지 근처에 다다랐을 때 하스드루발이 지휘하는 병사들이 만들고 있는 공성탑의 부품을 바라보면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걸 다 조립하면 우리 도시의 망루보다도 훨씬 높겠구먼! 로마군이 만든 공성탑보다 더 클 것 같은데?”
“겔리우스 부족장님께서 공성무기는 우리 부족에서 제공하기로 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카르타고인들이 말레벤툼을 공격하기 전에 캄파니아의 다른 도시를 공격하려는 걸까?”
겔리우스와 그에게 설득당해 함께 온 히르피니족의 부족장 폰티우스는 부하들 앞에서 체통을 지키기 위해 내색하고 있지 않았지만, 거대한 공성탑을 보고 속으로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겔리우스와 함께 사절단 대열의 선두에서 말을 타고 가고 있던 폰티우스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에게 따졌다.
“겔리우스 부족장님! 이거 듣던 것 하고는 얘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저 정도 크기의 공성탑이면 말레벤툼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제일 큰 도시인 카푸아도 점령할 수 있겠습니다! 카르타고인은 말레벤툼을 공격하는 시늉만 하고 사실 우리의 병사들을 이용해 다른 도시를 함락시키려는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제가 보기에 한니발 장군이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 쓸데없이 거대한 공성탑이 왜 필요한 건지 궁금하기는 하군요. 한 번 카르타고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고 판단해보도록 합시다.”
두 부족장은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하면서도 바르카 가문 군대의 숙영지의 정문으로 말을 몰아갔다.
삼니움족의 사절단이 도착하자 미리 숙영지 밖으로 마중 나와 있던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그들을 한니발의 막사로 안내했다.
미리 잔칫상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던 한니발은 삼니움족의 사절단이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귀빈을 맞이했다.
한니발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겔리우스에게 먼저 인사를 건냈다.
“겔리우스 부족장님!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혹시 그동안 생각이 바뀌셨을까 봐 내심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인사에 겔리우스가 대답하기 전에 히르피니족의 부족장 폰티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삼니움인은 로마인처럼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자들을 가장 경멸합니다. 부디 한니발 장군님께서도 겔리우스 부족장님과 약조하신 사항을 잘 지키셨으면 좋겠군요.”
“제 동생이 숙영지 밖에서 만들고 있는 공성탑의 부품을 보고 그러시는 모양이군요. 저희 카르타고인들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상인입니다. 신의를 지키지 않는 상인은 그저 사기꾼이지요. 저는 한순간의 이득을 위해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지금 만들고 있는 공성탑은 말레벤툼을 함락시킨 후 다음 도시를 공격할 때 사용할 물건입니다.”
그러자 겔리우스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한니발에게 물었다.
“말레벤툼을 점령하기도 전에 다음 도시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까? 거기가 대체 어디입니까? 우리 삼니움족을 진정한 동맹으로 여기신다면 말씀해 주실 수 있겠지요?”
“다음 목표는 베누시아입니다. 우리 바르카 가문은 삼니움족에게 우리의 신의를 증명하기 위해 아펜니노 산맥 남부에서 로마인을 모두 몰아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삼니움족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영토와 자유를 되찾게 될 겁니다.”
한니발의 말을 듣자 두 부족장은 감동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겔리우스가 볼을 붉히며 한니발에게 말했다.
“한니발 장군님의 깊은 뜻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희가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데 힘을 보태주신다면 다른 세 부족의 부족장님들을 설득해 바르카 가문을 새로운 반로마 연합의 맹주로 추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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