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 [113화] 로마의 발버둥 (1)
한니발과 삼니움족의 사절단이 회담을 마친 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카르타고군이 말레벤툼과 베누시아를 공격할 예정이라는 정보가 로마의 새로운 독재관으로 선출된 파비우스의 귀에 흘러들어 갔다.
카우디니족의 부족장 겔리우스와 히르피니족의 부족장 폰티우스가 다른 삼니움족 부족에게 바르카 가문과 동맹을 맺자고 권하던 도중 펜트리족의 친로마파 장로 한 명이 파비우스에게 그 사실을 알렸기 때문이다.
파비우스는 자신의 서재 책상에 앉아 펜트리족의 장로가 보낸 밀서를 읽은 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펜트리족 마저 한니발의 편을 들기로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더 알아볼 것도 없이 삼니움족 전체가 우리 로마를 배신했다고 봐야겠구나.”
펜트리족은 원 역사에서 칸나에 전투가 끝난 이후에도 로마와의 동맹관계를 유지한 유일한 삼니움족의 대부족이었다.
그런 펜트리족의 친로마파 지도층도 부족민 대부분이 삼니움족의 성지 말레벤툼 인근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영웅적인 승리를 거둔 명장 한니발에게 열광하자 결국 바르카 가문과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밀서를 책상에 내려놓고 잉크를 묻힌 깃털을 들어 빈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뭔가를 적으면서 와 시중을 들고 있던 노예에게 말했다.
“어서 집사장을 서재로 불러와라.”
곧 노예에게 연락을 받은 집사장이 서재 문을 열고 들어와 파비우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찾으셨습니까. 파비우스 독재관님.”
“급한 일이 있어서 불렀네. 당장 여기 두루마리에 적혀있는 분들을 저택 응접실로 모셔오게.”
이미 해가 졌지만, 집사장은 주인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는 군말 없이 두 손으로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다.
약 두 시간 후 파비우스가 가장 신뢰하는 원로원 중진 의원 스무 명이 그의 저택에 방문했다.
손님들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자 미리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파비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 의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존경하는 동료의원 여러분. 늦은 밤에 여러분을 제집으로 모셔서 정말 죄송합니다. 부디 조국 로마에 위기가 닥쳐 원로원 회의를 소집할 틈이 없었음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모인 사람 중 유일하게 평민 출신인 마르켈루스가 파비우스에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원칙주의자이신 독재관님께서 이 시간에 저희를 부르실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이미 지난 전투의 패배로 온 도시가 초상집 같은데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며칠 전 삼니움족이 로마연합에서 탈퇴하고 적장 한니발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삼니움족 중 어느 부족이 감히 우리를 배신했답니까!”
“다섯 대부족 전부 다입니다.”
그 말을 듣고 로마 원로원 의원들의 낯빛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삼니움족은 불과 80년 전만 해도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두고 로마와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막강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로마의 꾸준한 탄압으로 세력이 많이 약해지긴 했지만, 삼니움족은 아직도 보병 약 7만 명에 기병 약 5천 기를 동원할 수 있어 지중해 세계의 어지간한 작은 왕국보다도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지난 1년 6개월 동안 카르타고군에게 연전연패하며 10만 명이 넘는 병력을 잃은 로마로서는 삼니움족이 한니발의 편에 붙어버린 것은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스키피오의 장인 아이밀리우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동료 의원들에게 말했다.
“아아... 올림포스의 신들께서 어찌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신단 말입니까... 이제 한니발의 군대를 막을 야전군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새로 징집한 군단병이 제 몫을 할 정도로 훈련을 받으려면 아직 한 달은 더 지나야 할 텐데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독재관의 말에 마르켈루스가 대답했다.
“군단병의 훈련이 끝나도 문제입니다. 지금 훈련하고 있는 네 개 군단으로는 한니발과 삼니움족의 연합군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존경하는 동료의원 여러분.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가난한 시민들을 국가 예산을 써서 무장시켜 군단병으로 훈련 시킵시다. 법에 어긋나는 일이긴 하지만, 지금은 조국 로마를 지키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마르켈루스의 제안은 바르카 가문과 삼니움족의 연합군이 이탈리아 반도 중남부에 있는 로마 식민지를 공격하기 전에 적군을 수적으로 압도할 대군을 징집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평민 출신인 마르켈루스와 달리 그 자리에 모인 명문 귀족 출신 원로원 의원들은 도저히 그의 의견에 찬성할 수 없었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재산이 거의 없는 로마 시민들도 전장에 나서게 되면 그들의 정치적 입지가 커져 전쟁이 끝나고 나면 평민파의 세력이 커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국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상황에서 아무런 대안없이 그의 의견에 반대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귀족파 원로원 의원들은 그저 입을 다물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파비우스가 나서서 귀족파의 입장을 대변했다.
“마르켈루스의 의원님의 말씀대로 하면 당장 적장 한니발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삼백 년 동안 지켜온 공화국의 국법과 전통을 함부로 깬다면 조국의 질서가 무너져 버릴 겁니다.”
“그럼 베네벤툼과 베누시아를 공격해올 카르타고군과 삼니움족을 어떻게 막으실 생각이십니까?”
“막지 않을 겁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독재관의 대답에 원로원 의원들 하나같이 놀란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동료 의원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존경하는 동료의원 여러분. 적장 한니발은 뱀처럼 교활하면서도 사자처럼 용맹한 자입니다. 분하지만 우리 로마의 장군 중 비슷한 수의 군대를 이끌고 한니발과 회전을 벌여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봐야 합니다. 적장은 몇 년 전 개선식을 치르신 플라미니우스 전직 독재관님조차도 쉽게 이기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마르켈루스가 황당한 표정으로 파비우스에게 물었다.
“설마 적장에게 로마의 성문을 열고 강화조약을 맺자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물론 아닙니다. 그저 아직은 강력한 적에게 무모하게 덤빌 때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지금은 어떻게든 카르타고군의 보급선을 끊고 한니발의 군대를 따라다니면서 청야전술을 펼쳐 광폭한 사자를 굶겨 죽이는 게 최선입니다.”
파비우스의 말에 마르켈루스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로마 최고의 야전 사령관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고 그에 걸맞은 실력과 실적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자존심 강한 무장이 자신이 아직 서른 살밖에 안 된 새파랗게 어린 적장을 이기지 못할 거라는 말을 면전에서 들었으니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는 자신의 전술 지휘능력과 무력이 뛰어난 만큼 파비우스도 전략가로서 뛰어난 인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말에 반발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아이밀리우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파비우스 독재관님. 그렇지만 청야전술을 시행하려면 회전을 벌일 때 못지않게 많은 병사가 필요합니다. 빈민을 병사로 훈련 시키지 않고서야 어떻게 올해 안에 그 많은 병사를 징집할 수 있겠습니까?”
“국채를 발행해 예산을 마련해서 건장한 남자 노예를 사들여서 병사로 훈련 시킬 생각입니다. 그래도 모자라는 인원은 감옥에 갇혀있는 범죄자를 카르타고군과 싸운다는 조건으로 석방하는 것도 좋겠지요. 그 천한 것들에게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하면 훈련 기간이 짧아도 어지간한 군단병보다 더 강한 병사가 될 겁니다.”
노예와 범죄자를 병사로 훈련 시키려면 노예를 사들일 예산을 마련하고 신체 건강하면서도 명령에 잘 따를 자를 선별해야 할 필요가 있어 빈민을 징집할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노예나 범죄자가 자유민이 되어도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진 않았기 때문에 귀족파의 세력을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로마의 귀족파 원로원 의원들은 입을 모아 그의 의견에 찬성했다.
“자유를 대가로 싸우는 용병을 고용하는 셈이군요! 로마인으로서 용병을 고용하는 것은 그리 명예로운 일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국법을 어기지는 않을 수 있겠습니다!”
“내일 해가 뜨자마자 국채 발행을 명령하시지요! 저도 제 노예 중 건장하고 믿을만한 자를 몇 명 데려오겠습니다.”
마르켈루스는 파비우스가 제시한 모병 방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다른 동료의원들이 찬성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그의 의견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독재관님의 말씀을 따를 수밖에 없겠군요.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런 저항 없이 카르타고군에게 삼니움 지역의 식민지를 내주면 로마연합에 소속된 도시의 평민들이 광장으로 뛰어나와 한니발의 편에 서자며 소란을 피울 거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손을 써두었습니다.”
“벌써 손을 써두셨다고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폭동을 어떻게 진압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진압이 아니라 예방입니다. 적당한 본보기를 보여주면 한동안은 늘 반항적인 동맹도시의 평민들이 좀 잠잠해질 겁니다.”
* * *
아버지가 최측근 중진 원로원 의원들과 회의하고 있을 때 독재관 파비우스의 아들 막시무스는 오랜 친구인 스키피오가 지휘하는 기병 수십 기의 호위를 받으며 타렌툼을 향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파비우스가 그에게 전령으로서 타렌툼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에 자신이 직접 작성한 서신을 전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출발한 막시무스의 사절단은 해가 뜨고 나서야 가도 근처에 있는 마을 여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스키피오는 쪽잠을 자기 전에 막시무스와 함께 여관의 식당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막시무스. 파비우스 독재관님께서 무슨 명령을 내리셨길래 내가 자다 말고 끌려 나와서 널 호위해야 하는 거야?”
“기밀 사항이라 말해줄 수 없다.”
“지금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나한테만 살짝 말해줘. 궁금하잖아.”
“안돼.”
“여전히 융통성이라고는 발톱의 때만큼도 없네! 그럼 왜 하필 내가 네 호위대장을 맡게 된 건지는 말해 줄 수 있으시겠지요? 존경하는 원로원 의원님?”
“요즘 플라미니아 가도를 타고 타렌툼으로 가려면 도중에 카르타고군과 마주칠 수도 있잖아. 적이 출몰하는 위험한 곳을 지날 때 ‘스키피오 펠릭스’보다 든든한 동료가 어디 있겠어?”
스키피오는 로마군이 궤멸적인 손실을 본 네 번의 전투에서 살아 돌아오면서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행운아라는 뜻의 ‘펠릭스’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그 별명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펠릭스는 얼어 죽을. 아버지가 내 등 뒤에서 화살에 맞아 돌아가셨는데 행운아라니? 다들 너무한 거 아니야?”
“그만큼 로마 시민들이 절망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옥 같은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전쟁영웅이 되는 시대가 되어버린 거지. 난 조국의 굴욕을 끝낼 수만 있다면 악귀라도 될 생각이다.”
말을 마친 막시무스의 눈빛이 결연한 각오로 조용히 이글거렸다.
스키피오는 냉정한 친구가 보기 드물게 감정을 드러내 보이자 이번 임무에 막시무스가 자신에게 아직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음을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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