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 [114화] 로마의 발버둥 (2)
여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스키피오와 막시무스는 다시 타렌툼을 향해 말을 달렸다.
로마에서 타렌툼까지의 거리는 대략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와 비슷할 정도로 멀었다.
그러나 잘 포장된 플라미니아 가도 위를 달린 덕분에 두 사람은 로마를 떠난 지 나흘 만에 타렌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며칠을 말 위에서 보내느라 피로가 쌓여 눈 밑이 새까매진 막시무스는 타렌툼의 성문에 도착하자마자 문지기에게 독재관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보여 주면서 말했다.
“파비우스 독재관님께서 보내신 서신을 가지고 온 원로원 의원 막시무스다. 당장 나를 타렌툼 수비대의 군단장께 안내하도록.”
“죄송합니다! 사전 연락이 없어 로마 원로원 의원님을 모실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곧 가마를 대령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니다. 한시가 급하니 그냥 걸어가겠다.”
“알겠습니다. 타고 오신 말은 저희가 마구간에 데려다 놓도록 하겠습니다.”
스키피오와 막시무스는 말에서 내린 뒤 타렌툼 수비대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시가지로 들어섰다.
곧 그들의 눈앞에 고대 이탈리아반도에서 가장 번화한 항구도시의 저잣거리가 모습을 드러냈지만, 독재관이 직접 작성한 서신을 들고 있는 전령에게 관광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처음 타렌툼에 와 보는 막시무스는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그리스에서 수입해 온 화려한 공예품으로 가득한 노점에 잠시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자 스키피오가 병사들의 눈을 의식해 존댓말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친구를 말렸다.
“막시무스 의원님. 주변 경계에 좀 더 신경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타렌툼 시민들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스키피오의 말을 듣고 나서야 막시무스는 자신의 주변을 지나치는 시민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갈색 눈동자에 로마군의 군복을 입은 자신을 몰래 노려보는 타렌툼 시민들의 모습이 비쳤다.
심지어 막시무스의 일행이 곁을 지나가자 뒤에서 바닥에 침을 뱉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막시무스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춤에 찬 검집에 슬며시 손을 가져다 대면서 스키피오에게 말했다.
“타렌툼인 중에는 로마를 증오하는 자들이 많다더니 사실인 모양이군.”
로마연합에 소속된 그리스계 도시에서는 귀족은 친로마파이고 평민들은 로마를 증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유독 타렌툼에는 귀족 중에도 로마를 싫어하는 자들이 많았다.
로마 원로원이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국가 중 유일하게 타렌툼만 자체적으로 군대를 조직할 권리를 박탈한 데다 수비대라는 명목으로 시민을 감시하기 위해 늘 로마군 1개 군단을 도시 안에 주둔시켰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로마가 특별히 타렌툼인을 다른 그리스인보다 멸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천혜의 항구인 타렌툼의 항구를 군항으로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한낱 촌구석 농부들의 마을이던 시절부터 이탈리아반도에서 가장 번화한 무역도시였던 타렌툼의 시민들로서는 로마의 차별 대우를 조국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스키피오는 만약에 대비해 주변을 철저히 경계하면서 막시무스를 호위해 타렌툼 수비대의 병영으로 향했다.
막시무스 일행이 도시 외곽에 있는 병영에 도착하자 미리 연락을 받은 타렌툼 수비대의 군단장이 마중 나와 로마에서 온 원로원 의원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막시무스 의원님. 카르타고군이 출몰하는 삼니움 지역을 무사히 지나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드루수스 군단장님. 파비우스 독재관님께 명을 받고 군단장님을 뵙기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를 만나시러 이 먼 곳까지 오셨단 말씀입니까? 타렌툼 시민들은 늘 불만이 많긴 하지만, 제가 이곳에 부임한 이후로 눈에 띄게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 적은 없습니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밀 유지가 중요한 일이니 안에서 얘기하시지요.”
막시무스는 스키피오와 호위병들을 잠시 밖에서 대기하게 한 후 드루수스와 함께 군단장 집무실로 들어가 파비우스가 맡긴 서신을 건넸다.
드루수스는 막시무스가 건넨 서신을 읽자마자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막시무스에게 말했다.
“꼭···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군단장의 질문에 막시무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국 로마의 안녕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 * *
파비우스의 지시 사항을 완수한 막시무스는 병영을 나와 스키피오와 함께 곧바로 귀향길에 올랐다.
막시무스는 로마로 돌아올 때까지도 기밀이라며 자신을 호위하는 그 누구에게도 서신의 내용을 알려 주지 않았다.
스키피오가 마침내 서신의 내용을 알게 된 것은 로마에 돌아오고 나서 일주일 뒤였다.
기원전 217년 8월 중순.
군단장 드루수스는 독재관 파비우스가 작성한 살생부에 이름이 오른 타렌툼 시민 102명을 로마로 압송해 왔다.
그는 로마를 감싼 세르빌리우스 성벽 안으로 들어온 후 사전에 파비우스에게 명령받은 대로 흐느끼는 타렌툼 시민들을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인 카피톨리노 언덕 위에서 가장 높은 절벽으로 끌고 올라갔다.
드루수스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로마 원로원 의원들과 시민들, 그리고 로마연합에 소속된 동맹도시의 유력자 수천 명이 모여 있었다.
파비우스는 드루수스가 타렌툼 시민들을 끌고 온 것을 보고 미리 준비해 둔 연단에 올라 연설을 시작했다.
“존경하는 로마 시민 여러분! 그리고 친애하는 로마의 친구 여러분! 오늘 우리는 반역자를 처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저자들은 적장 한니발과 은밀히 내통하고 우리 로마가 북아프리카에서 온 야만인들에게 결국 패하고 말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온 비열한 자들입니다!”
그때 흥분한 로마인 몇 명이 독재관이 연설하는 도중 잡혀 온 타렌툼 시민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죽여라! 절벽에 떨어뜨려 버려라!”
“반역자들의 피로 전사한 용사들의 넋을 달래자!”
파비우스는 연설을 이어 나가기 위해 수행원들을 시켜 성난 군중을 진정시켰다.
그는 로마 시민들이 질서를 되찾는 모습을 확인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 말씀대로 우리는 오늘 로마를 배신한 자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전 지중해에 똑똑히 알릴 겁니다! 반역자에게 죽음을!”
짧은 연설을 마친 파비우스가 손짓해 군단장 드루수스에게 사형 집행 명령을 내렸다.
그제야 자신들의 운명을 알아챈 타렌툼 시민들은 구슬프게 울부짖었다.
“으아악! 살려 줘!”
“이거 풀어 주시오! 난 그저 주점에서 술 마시다 잠깐 한니발에 관한 얘기를 한 것 말고는 죄가 없소!”
그러나 로마 군단병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 타렌툼 시민들을 모두 끌어다 울퉁불퉁한 바위가 잔뜩 놓여 있는 절벽 밑으로 던져 버렸다.
“으아아아아악!”
그 자리에서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스키피오는 절벽으로 던져진 타렌툼 시민의 처절한 비명을 견디지 못하고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한니발에게 타렌툼의 성문을 열어 줬을 자들이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꼭 필요한 일이야······.”
* * *
백 명이 넘는 타렌툼 시민이 로마로 끌려가 반역자로 몰려 절벽 밑으로 던져졌다는 소식은 공포에 질린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전 이탈리아에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한니발의 연이은 승리에 은근히 기뻐하던 전 이탈리아의 평민들은 이제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말레벤툼을 탈환하기 위해 숙영지의 지휘관 막사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정찰병의 보고를 통해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스드루발은 삼니움족의 지휘관들이 보고 있는 와중에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두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로마 원로원 이 개자식들! 우리도 마을을 약탈할 때는 도망치는 주민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데 자기들 동맹도시의 시민을 맘대로 죽여? 우린 아직 타렌툼인하고는 한 번도 접촉한 적 없는데 반역죄는 얼어 죽을!”
그 순간 11년 전 아버지 하밀카르를 구하기 위해 히스파니아에서 카르페타니족과 사투를 벌이던 기억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도 그가 역사를 바꾸면서 궁지에 몰린 카르페타니족 장군이 인근 마을의 주민을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바람에 민간인 사상자가 수천 명이나 발생했었다.
하스드루발은 잊고 싶었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원 역사에서 로마 원로원이 친카르타고파 타렌툼 시민을 절벽에 떨어트려 죽이는 건 앞으로 5년은 더 지난 뒤에 벌어지는 일인데··· 또 역사가 히스테리를 부리는구나.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이 벌어지겠지.’
한니발도 로마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동생과는 그 이유가 달랐다.
“네 말대로 새로 독재관이 된 파비우스라는 자는 보통이 넘는 것 같다. 어쩐지 새로 동맹을 맺자고 찾아오는 사절단이 없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로마 원로원이 그런 강수를 뒀을 줄이야.”
형의 말을 듣고 나서야 하스드루발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파비우스는 지금도 우리의 보급망을 차단할 전략을 짜면서 밤잠을 설치고 있을 거야. 내가 감상에 빠져서 작전 수행에 지장이 생기면 로마 원로원만 좋아할 뿐이다.’
그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한니발에게 말했다.
“파비우스가 저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도 말레벤툼 공격 일정을 앞당겨야겠어. 삼니움족이 빼앗긴 성지를 되찾아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다른 도시의 평민들에게도 로마에 맞설 용기를 낼지도 몰라.”
“네 말처럼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면 적어도 삼니움족이 다시 로마 편에 붙을 가능성은 줄어들겠지. 내일 날이 밝으면 당장 말레벤툼을 공격하자.”
다음 날 아침 바르카 가문의 로마 원정대 5만 명과 삼니움족 병사 2만 5천 명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말레벤툼을 향해 힘차게 진군했다.
한니발은 말레벤툼을 지키는 로마군이 기껏해야 3천 명을 밑도는 수준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대군을 동원한 이유는 전술적인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아직 대부분 로마의 편에 붙어 있는 캄파니아 지역 도시에 압도적인 전력으로 로마군을 물리치는 모습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말레벤툼의 성벽이 맨눈으로도 또렷이 보이기 시작하자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놀란 눈으로 도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멀쩡했던 도시의 성벽 안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재관 파비우스가 평지에 세워진 말레벤툼을 한니발의 대군으로부터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지난밤 시내의 모든 재물과 로마 시민을 로마로 옮긴 뒤 도시에 불을 질러 버린 것이다.
삼니움족 병사들은 곧 애처로운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말레벤툼이! 우리의 성지가 불타고 있어!”
“빌어먹을 로마놈들! 어서 불을 꺼야 돼!”
한니발은 동맹의 성지를 집어삼키고 있는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급히 군대를 이끌고 말레벤툼으로 행군했지만, 이미 성벽 안의 건물 대부분이 불에 타 버린 뒤였다.
삼니움족의 다섯 대부족장은 약속이라도 한 듯 허망한 표정으로 도시 한가운데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장엄한 신전이 세워져 있던 자리에 타다 남은 대리석 기둥 네 개만 비죽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한때 삼니움족의 열일곱 신을 모신 성지였던 잿더미 한복판에서 슬픔과 증오로 가득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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