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 [117화] 파비우스를 실각시켜라! (1)
바르카 가문과 삼니움족 병사 5만 명이 한꺼번에 성문 안으로 들이닥치자 베누시아를 지키던 로마군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반로마연합군에게 항복했다.
하스드루발은 삼니움족에게 약탈을 허용했기 때문에 도시 곳곳이 불길에 휩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삼니움족 병사들은 그토록 증오하는 로마인들이 사는 건물에도 불을 지르지 않았다.
약 75년 전까지만 해도 삼니움족의 영토였던 베누시아에는 아직 그들이 섬기는 신을 모신 신전이 도시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동맹도시 출신 보조병들은 아무 조건 없이 풀어 줬지만, 로마 시민권자 포로들의 처분은 예외적으로 삼니움족의 부족장들에게 맡겼다.
로마군 포로에 대한 처분과 전리품 분배가 끝난 후 바르카 가문과 삼니움족의 병사들은 도시의 광장 한복판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로마군의 식량창고에서 꺼내 온 포도주와 음식을 먹고 마시며 승리를 자축했다.
삼니움족의 부족장과 장로 수십 명이 술잔을 비우고 있는 하스드루발에게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정말 감사합니다! 장군님과 바르카 가문의 도움이 덕에 조상님께서 로마에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았습니다!”
“우리 군의 수가 더 많았다고는 하지만, 요새를 공격하고도 사상자가 백 명도 안 나오다니!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입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의 지혜는 트로이를 정복한 오디세우스에 비할 만하군요!”
하스드루발은 삼니움족 부족장과 장로들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며 대답했다.
“용맹한 삼니움족 전사들과 함께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베누시아를 함락시킬 수 없었을 겁니다. 앞으로도 우리 바르카 가문과 삼니움족이 서로의 등 뒤를 지켜 주는 전우로서 좋은 관계를 맺어 나가길 바랍니다.”
그의 대답을 듣고 삼니움족의 부족장과 장로들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하스드루발과 잔을 부딪쳤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축제가 계속되면서 취기가 오른 삼니움족 병사 몇 명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민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은 삼니움족 병사들이 부르는 노래에 귀 기울여 보았지만, 이제 한국어를 빼도 5개국어를 할 줄 아는 그조차 단 한 구절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노래의 가사가 현대에는 완전히 사어(死語)가 된 오스크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병사들의 볼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고 가사의 의미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고토회복의 기쁨을 주체할 수 없나 보네. 삼니움족은 그저 호전적인 산악부족인 줄로만 알았는데, 함께 몇 주 지내 보니 의외로 순박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하스드루발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같은 광경을 바라보며 잠시 미소 지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의 머릿속에 원 역사에서 삼니움족이 로마에게 당하게 되는 비극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원 역사의 삼니움족은 함께 로마군과 싸워 온 카르타고가 멸망하고 나서도 기회가 생길 때마다 로마의 탄압에 대항했다.
그러나 삼니움족의 저항정신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잔인한 독재자 술라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그 후 로마군은 삼니움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독재자 술라의 명령에 따라 노인과 어린아이까지 해치며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끔찍한 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소수의 삼니움족은 불타는 고향을 뒤로하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친 마을이나 도시의 주민들에게 동화되어 버렸다.
그렇게 한때 로마와 이탈리아반도의 패권을 다투던 강대한 삼니움족은 그들이 수백 년 동안 발전시켜 온 언어와 문화를 후대에 남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하스드루발은 울고 웃으며 축제를 즐기는 삼니움족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번 역사의 지중해 세계에선 카르타고가 건재한 동안에는 그런 끔찍한 전쟁범죄가 벌어지지 않게 할 거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 * *
하스드루발은 베누시아 공방전이 끝나고 이틀이 지난 후 한니발이 기다리고 있는 말레벤툼으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삼니움족의 부족장들과 병사 수만 명이 베누시아 성문 밖까지 배웅나와 하스드루발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하스드루발 장군님. 장군님과 같은 전장에 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한니발 장군님께서 새로운 공격 목표를 정하시면 즉시 지원군을 보내겠습니다. 신들께서 바르카 가문의 앞길을 밝게 비춰 주시길 바랍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작전이 정해지는 대로 즉시 전령을 보내 소식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내년부터 로마가 베누시아를 되찾으려 들 테니 방비를 단단히 하시길 바랍니다.”
그는 삼니움의 부족장 전원과 차례대로 악수한 후 휘하의 병사들과 함께 아피아 가도를 따라 남서쪽으로 향했다.
하스드루발은 약 5일 정도 행군한 끝에 한니발이 기다리고 있는 말레벤툼에 도착했다.
한니발은 미리 말을 타고 승전보를 전한 전령으로부터 동생이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 수백 명과 함께 말레벤툼의 성벽 밖으로 나와 동생을 기다렸다.
마침내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군대가 말레벤툼에 도착하자 두 형제는 두 팔을 벌려 얼싸안으며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다.
“하스드루발! 무사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정말 잘해 주었다! 이탈리아반도에 들어선 후로 처음 치르는 공성전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내 예상보다도 훨씬 잘 해냈어!”
“뭘. 다 형이 아피아 가도를 지나는 로마군을 잘 차단해 준 덕분이야. 내가 없는 동안 별일 없었어?”
“며칠 전 로마에 심어 둔 첩자의 보고를 받았는데 얼마 전에 독재관이 된 파비우스가 무려 여덟 개 군단을 더 징집했다고 한다. 파비우스는 그중 네 군단을 이끌고 말레벤툼 주변을 맴돌면서 내 움직임을 견제하고 있어. 몇 번이나 회전을 유도해 봤는데 전혀 반응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집요하게 따라오더군.”
“그거 정말 귀찮게 됐네. 파비우스가 나머지 네 군단은 어디로 보냈는지 확인됐어?”
“두 군단은 북쪽으로 진군하는 걸 확인했고 나머지 두 군단은 배를 타고 남쪽으로 항해하고 있다더라. 아마 보노니아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에게 보내는 수송대를 완전히 차단하고 시칠리아의 해군을 강화해 해상보급도 막아 버리려는 속셈이겠지.”
하스드루발은 형의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원 역사에서 만약 스키피오가 없었어도 로마는 카르타고를 이길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파비우스가 없었으면 한니발 형은 분명히 로마를 정복할 수 있었을 거야.’
이제부터 파비우스가 보일 움직임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건 바로 스토커처럼 한니발의 군대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한니발에게 향하는 보급 약탈하려는 마을을 먼저 가서 불태우며 청야 전술을 펼치는 것이다.
거기에 신임 독재관의 공포정치 때문에 로마에 불만을 품고 있는 이탈리아반도의 동맹도시들도 선뜻 한니발의 편으로 돌아서지 못하고 있었다.
파비우스는 분명 현재 바르카 가문이 로마 정복의 대업을 이루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높은 장벽이었다.
한니발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는데 내가 너무 힘 빠지는 소리만 했구나. 나도 나름대로 파비우스를 물리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것참 다행이네. 그게 뭔데?”
“일단 숙영지로 돌아가자. 정보를 수집하러 나간 마하르발이 돌아오면 알게 될 거다.”
하스드루발은 그 말을 듣고 숙영지로 돌아가 한니발과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전투와 행군을 하느라 쌓인 피로를 풀었다.
막 식사가 끝났을 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지휘관 막사 안으로 들어와 한니발에게 보고했다.
“한니발 장군님께 보고드립니다. 말씀하신 대로 캄파니아 지역에 있는 독재관 파비우스의 영지가 있는 곳을 전부 알아냈습니다. 여기 실레노스 님이 그린 지도에 위치를 표시해 두었습니다.”
마하르발은 보고를 마치며 두 손으로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한니발에게 건넸다.
하스드루발은 형이 펼친 지도를 옆에서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누가 명문 귀족 아니랄까 봐··· 이 정도 영지면 작은 나라의 왕족 정도는 우스워 보이겠어.”
그 말에 마하르발이 두 형제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파비우스 가문의 영지만 약탈해도 우리 군대 전체를 먹일 군량 두 달 치는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니발 장군님, 제게 기병 만 기만 맡겨 주시면 가증스러운 독재관의 영지를 밀 한 톨 남기지 않고 약탈한 다음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겠습니다.”
그러나 한니발은 마하르발의 요청에 고개를 저었다.
“마하르발, 자네는 전술 지휘 능력은 뛰어난데 여전히 전략적인 안목이 아쉽군. 난 파비우스에게 분풀이하려고 그자의 영지를 알아 오라고 한 게 아니네.”
“네? 그럼 어째서 그 정보가 필요한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곧 캄파니아 지역을 습격할 생각인데, 그때 파비우스의 영지만큼은 건들지 않을 생각이기 때문이지.”
기병대장 마하르발은 도무지 한니발의 말에 당황한 나머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러자 형의 의도를 눈치챈 하스드루발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하르발에게 말했다.
“로마는 우리 카르타고처럼 공화국이지 않나?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아무리 명문 귀족 출신 정치인이라도 권력을 오래 유지할 수 없지.”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로마의 정치체제가 이번 캄파니아 약탈작전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아직 감이 오질 않는군요.”
“자네도 잘 알다시피 파비우스가 독재관이 된 지 얼마 안 돼서 로마는 라틴 식민지를 두 곳이나 잃었지. 그런데 그 와중에 우리가 독재관의 영지만 쏙 빼고 다른 농장과 마을을 약탈하면 로마 시민들이 파비우스를 어떻게 생각할까?”
기병대장 마하르발은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하스드루발에게 대답했다.
“로마의 평민들은 독재관 파비우스가 우리와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겠군요! 잘하면 우리 손을 더럽히지 않고 까다로운 적장을 로마 시민들이 처치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니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하스드루발은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아는구나. 내 생각을 정확히 읽었다. 하지만 파비우스의 영지만 빼고 약탈한다고 해도 로마 시민들이 파비우스가 우리 가문과 내통하고 있다고 여기지는 않을 거다. 뭐··· 로마인 중 제일 멍청한 자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독재관이 자기 재산을 지키는 데 혈안이 돼서 다른 지역이 약탈당하는 걸 방관하고 있다는 정도로 생각하겠지.”
“그 정도만 해도 파비우스의 정적이 독재관을 실각시킬 명분을 줄 수 있을 겁니다! 한니발 장군님을 모신 지 벌 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앞으로 십 년을 더 모신다고 해도 두 분의 깊은 속을 헤아릴 자신이 없습니다!”
두 형제는 마하르발의 감탄을 듣고 말없이 미소지었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전군을 둘로 나누어 캄파니아 지역을 습격할 준비를 했다.
하스드루발은 하급장교 기스코와 함께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말레벤툼에서 서쪽으로 30km 정도 떨어져 있는 라틴 식민지를 공격하기로 했다.
대열의 선두에서 거대한 흑마의 등에 탄 하스드루발이 우렁찬 목소리로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일주일 안에 서쪽에 있는 로마인의 농장과 마을을 전부 약탈한다. 그렇지만 파비우스의 영지만은 건들지 않도록 주의해라.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생각이니 모두 각오 단단히 해라!”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2만 명의 병사들이 힘차게 서쪽을 향해 진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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