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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19화 (119/201)

[ 119 ] [118화] 파비우스를 실각시켜라! (2)

기원전 217년 9월 중순.

하스드루발이 삼니움족과 함께 베누시아를 점령한 후 5만 명의 로마 원정대는 여전히 비옥한 캄파니아 지역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며 약탈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여! 증오스러운 로마인의 마을이 눈앞에 있다! 마음껏 날뛰어라!”

한니발이 애마 부케팔로스의 등 위에서 우레같은 목소리로 소리치자 그의 등 뒤에 있던 2만 5천 명의 병사가 함성을 지르며 맹렬하게 진격했다.

“와아아아아아아!”

성벽도 수비병도 없는 마을의 주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집 밖으로 뛰쳐나와 마을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니발이다! 한니발이 쳐들어왔다!”

“끼아아아악!”

한니발은 군량을 축내는 포로를 숙영지에 잡아둘 생각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마을을 공격하기 전에 병사들에게 저항하는 자는 모두 죽이고 도망치는 자는 굳이 열심히 쫓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두었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장군의 명령대로 도망치는 주민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굶주린 메뚜기떼처럼 마지막 밀 한 톨까지 마을의 재물을 약탈했다.

직접 약탈의 지휘를 맡은 한니발은 더는 가져갈 재물이나 식량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곁에 있던 기병대장 마하르발에게 명령했다.

“이제 됐다. 마을에 불을 지르고 숙영지로 돌아가자.”

“알겠습니다. 한니발 장군님.”

기병대장 마하르발은 병사들을 마을 밖으로 빠져나온 것을 확인하고 이베리아족 기병 1천 기와 함께 손에 횃불을 들고 돌아다니며 마을 곳곳에 불을 질렀다.

곧 로마인들이 살던 작은 마을은 거대한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캄파니아 지역의 마을과 농장이 이와 같은 운명을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원 역사와는 달리 로마 시민권자가 많이 사는 라틴 식민지만을 집중적으로 약탈하고 그리스계 도시의 영토는 내버려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 역사의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은 후 본국이나 히스파니아로부터의 보급을 기대하기 어려워 오직 전리품으로만 군량과 보급품을 마련해야 했다.

그 때문에 카르타고군은 동맹으로 삼길 원하는 그리스인의 영토까지도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밀카르에게 몇 번이나 보급을 받은 덕에 로마 원정대의 곡식 창고에는 다가올 겨울을 날 군량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보급품을 얻기 위해 미래의 동맹이 될지도 모르는 그리스인의 원한을 살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카푸아를 비롯한 캄파니아 지역의 그리스인의 도시는 카르타고군이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대부분 캄파니아에 있는 로마인들의 영토는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지나갈 때마다 성난 메뚜기 떼의 습격을 받은 밀밭처럼 초토화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잿더미가 되어버린 캄파니아의 라틴 식민지에는 파비우스의 영지만이 멀쩡한 모습으로 덩그러니 남아있게 되었다.

* * *

한니발의 공격에서 간신히 도망친 캄파니아의 라틴 식민지 주민들은 아피아 가도가 보일 때까지 무작정 북쪽으로 도망쳤다.

하루아침에 입고 있는 옷 이외의 전 재산을 모두 잃은 로마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로마 원로원에 항의하기 위해 가도를 따라 쉬지 않고 로마로 걸어갔다.

약 일주일 뒤 마침내 수천 명의 난민이 로마에 도착해 친척의 집에 찾아가 자신과 가족이 당한 수난을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자 난민이 도착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로마의 골목과 싸구려 포도주를 파는 주점에서 독재관 파비우스를 욕하는 평민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내 동생이 경영하던 올리브 농장이 완전히 재가 되어버렸어! 그런데 그 옆에 있던 파비우스의 대농장은 풀 한 포기 뽑히지 않고 멀쩡했다더라고! 파비우스가 자기 영지를 지킬 때만 병사를 움직이고 있는 거 아냐?”

“내 말이! 독재관은 캄파니아에 있는 영지를 다 잃어도 평생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을 텐데! 꼭 있는 놈들이 더 탐욕스럽다니까!”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파비우스에 대한 불만이 점점 고조되어 가자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미리 로마에 심어둔 첩자들도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르카 가문의 첩자들은 보안이 철저하고 명문 출신이 아니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원로원에는 잠입할 수 없었지만, 마르스 광장이나 저잣거리에서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내 사촌이 며칠 전에 주점에서 술 마시다 새벽에 집에 돌아가는데 파비우스에 집에서 두건을 눌러쓰고 수염을 기른 사람들이 몰래 나오는 걸 봤대! 피부가 구릿빛인 게 꼭 페니키아인 같아 보였다고 하더라!”

“뭐? 혹시 파비우스 이 인간이 자기 재산 지키려고 한니발하고 내통하고 있는 거 아니야?”

바르카 가문의 첩자들이 퍼뜨린 헛소문은 건조한 날의 산불처럼 순식간에 번져나가 로마 시민 50만 명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허무맹랑한 소문을 듣자마자 하나같이 코웃음을 쳤지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평생 막일을 하거나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순박한 평민 중에는 소문을 진실로 믿어버리는 자들도 많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로마의 평민들은 로마 원로원의 의회 건물 쿠리아 호스틸리아와 파비우스 가문의 저택으로 몰려가 썩은 달걀과 순무를 던지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반역자 파비우스를 십자가에 매달아라!”

“자기 영지 지키는 데만 혈안이 된 탐욕스러운 독재관을 죽여라!”

저택 안에 있던 독재관 파비우스의 장남 막시무스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깨닫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성난 시위대가 몰려온 저택의 정문을 피해 허름한 옷을 입은 후 몰래 후문으로 빠져나와 동료 원로원 의원들이 모여있는 쿠리아 호스틸리아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막시무스는 쿠리아 호스틸리아의 앞에 모여있는 시위대를 간신히 뚫고 웅장한 의회 건물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시위대가 의회 건물에 난입하려는 줄 알고 검을 들이밀며 위협했다.

“이 천한 것이 어딜 감히! 당장 물러나라! 원로원의 허락을 받지 않은 자는 쿠리아 호스틸리아에 발을 들일 수 없다!”

막시무스는 아침부터 시위대에 시달리느라 말할 기운도 없었기 때문에 대답 대신 자신의 오른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묵직한 금반지를 병사 중 한 명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로마인의 반지는 도장의 역할도 했기 때문에 착용자의 이름과 가문명이 새겨져 있었다.

초병은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가 독재관 파비우스의 장남이자 원로원 의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즉시 검을 거두고 길을 비켜섰다.

“귀한 분을 알아뵙지 못하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됐다. 다른 의원님들은 이미 안에 계신가?”

“네. 지금 안에서 시민들의 소요사태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계십니다.”

막시무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병사들이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무거운 청동문을 밀치며 쿠리아 호스틸리아의 안으로 들어섰다.

성난 시민들을 달랠 방법을 찾고 있던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은 원로원 의원의 상징인 의복 토가 대신 막일꾼이나 입을 법한 튜닉을 입은 채 다가오는 막시무스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 같으면 격식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젊은 원로원 의원에게 불호령을 내리는 의원들이 많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시위대가 이미 파비우스 가문의 저택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사실이 이미 로마 시내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대충 사정을 눈치챈 원로원 의원들은 그를 책망하지 않았다.

스키피오의 장인 아이밀리우스는 사위의 친구가 허름한 몰골로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보고 위로의 말을 건냈다.

“존경하는 막시무스 의원님. 성난 시위대를 뚫고 이곳까지 오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버님이신 파비우스 독재관님께 씌워진 누명은 곧 벗겨질 테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따듯한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존경하는 아이밀리우스 의원님. 하지만 우리 파비우스 가문이 확실하게 해명하지 않으면 시민들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캄파니아에 전령을 보내 파비우스 독재관님께 로마로 돌아와 시민들에게 직접 해명해주시길 부탁드린다고 요청했습니다. 앞으로 늦어도 일주일 뒤면 독재관님께서 돌아오셔서 사태를 진정시키시겠지요.”

“아버지께서는 원로원의 요청이 있다고 해도 전장을 비우고 로마로 돌아오시진 않을 겁니다. 이번 사태는 파비우스 가문의 수장 대리로서 제가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막시무스 의원님. 파비우스 독재관님께서 직접 해명하시지 않은 이상 성난 군중은 지금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들어도 믿지 않으려 할 겁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우리 가문의 결백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캄파니아에 있는 모든 우리 가문의 영지를 국가에 기부하겠습니다. 그러면 로마 시민들도 아버지께서 우리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적과 내통했다는 의심을 떨쳐버리겠지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놀란 눈으로 막시무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파비우스 가문은 모든 로마 시민 중 캄파니아에 가장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서 나오는 한 해 수입은 평범한 임금노동자 연봉의 천 배를 훌쩍 넘었다.

물론 명문 귀족인 파비우스 가문이 캄파니아의 영지를 잃는 정도로 파산하지는 않겠지만, 가문의 살림을 꾸려나가는데 뼈아픈 손실일 것임은 분명했다.

아이밀리우스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하며 막시무스에게 대답했다.

“존경하는 막시무스 의원님. 아무리 지금 가문 수장 역할을 하고 계신다지만, 독재관님의 허락 없이 그런 결정을 내리셔도 되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이 자리에 계셨어도 저와 같은 결정을 내리셨을 겁니다. 원로원에서 이 사실을 공문으로 작성해 마르스 광장에서 공표해 주십시오.”

그의 단호한 대답에 아이밀리우스도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곧 로마 원로원은 막시무스의 말대로 파비우스 가문이 소유한 캄파니아의 영지는 전부 국유지가 된다는 내용을 마르스 광장에서 공표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더는 시위를 할 명분을 잃고 흩어져 버렸다.

* * *

기원전 217년 9월 말.

막시무스가 캄파니아에 있는 파비우스 영지를 국가에 기부하여 아버지의 이적죄 혐의를 풀었다는 소식은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귀에도 들어갔다.

한니발은 하스드루발과 단둘이 지휘관 막사에서 대화를 나누며 동생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독재관의 영지를 약탈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병사들을 말려가면서 꾸민 작전이었는데 보기 좋게 실패해버렸군. 아무리 파비우스 가문이 재산이 많아도 캄파니아의 영지 정도면 전 재산의 절반이 넘었을 텐데... 적장도 그렇지만 그 아들도 만만치 않은 상대다.”

“어쩔 수 없지 뭐. 파비우스 가문이 그렇게까지 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이제 다른 방법을 써보는 수밖에 없지.”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거냐?”

“집정관 티베리우스를 잡았을 때처럼 작은 전투에서 일부러 져주면서 로마군을 우리가 원하는 전장으로 유인해 보는 수밖에 없겠어.”

“저 신중한 파비우스가 그런 수법에 넘어가진 않을 것 같은데?”

“파비우스는 넘어가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그 휘하에 있는 장교들은 또 얘기가 다르지. 그놈들 중 한 명이 파비우스의 명을 어기고 단독으로 우리 군대를 공격할 때 일부러 져줘서 로마의 전쟁영웅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그러면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파비우스의 입지가 줄어들겠지.”

파비우스는 원 역사에서 로마군이 한니발을 물리치는데 스키피오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한 뛰어난 전략가였지만, 지략만큼의 카리스마와 통솔력은 가지지 못했다.

하스드루발은 원 역사에서 파비우스 휘하의 대대장급 장교조차도 로마인과 동맹도시의 마을을 불태우는 한니발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독재관의 전술에 반발해 독재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돌발 행동을 한 적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한니발은 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독재관의 명령을 어기는 로마군 장교가 나올 거라는 말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름 아닌 하스드루발의 조언이었기에 다시 한번 동생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네 말대로 되지 않더라도 밑져야 본전이겠지. 앞으로 숙영지로 전리품을 나르는 수송대 중 몇 명에게 일부러 빈틈을 보이라고 지시할게. 정말 로마군 장교 중에 독재관의 명령을 어기는 자가 나타난다면 미끼를 물 수밖에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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