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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20화 (120/201)

[ 120 ] [119화] 로마의 자충수

독재관 파비우스는 장남 막시무스의 발 빠른 대처 덕분에 성난 민중에 의해 탄핵당할 뻔한 정치적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그러나 그후에도 카르타고군의 약탈을 피해 캄파니아에서 도망친 라틴 식민지의 난민들이 속속 로마에 도착하면서 파비우스의 소극적인 방어 전술에 대한 여론은 점점 나빠져만 갔다.

로마의 평민파 정치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평민파의 중진 플라미니우스가 말레벤툼 근처에서 전사한 이후 좁아진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해 카르타고군에 대한 적극 공격론을 펼쳤다.

게다가 로마의 귀족파 원로원 의원 중에서도 캄파니아 지역에서 로마 시민들이 입은 막대한 피해에 분개하며 적극 공격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처럼 파비우스가 로마를 떠나 있는 동안 그의 정치적 입지는 나날이 줄어만 가고 있었다.

이런 로마 시내의 분위기는 파비우스가 지휘하는 군대에도 고스란히 전해져서 장교들이 독재관에게 적장 한니발을 공격하자며 압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특히 평민 출신인 젊은 부사령관 미누키우스 루푸스는 자신을 따르는 장교들과 함께 거의 매일 같이 지휘관 막사로 몰려가 카르타고군을 공격하자고 아우성쳤다.

“파비우스 독재관님! 제발 저희를 적에게 이끌어 주십시오! 가증스러운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이 언덕 아래에 있는 마을을 불태우는 모습이 안 보이십니까!”

“독재관님, 부디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이대로는 카르타고군이 캄파니아에서 약탈한 보급품으로 편안하게 겨울을 나고 내년에도 다시 우리의 영토를 습격할 겁니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여전히 부하들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을 날 곳을 찾아가기 위해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반도 동남쪽으로 진군할 거다. 그때 산맥을 넘는 고갯길에 복병을 숨겨 적을 섬멸할 생각이니 지금은 참고 기다려라.”

파비우스는 독재관에 선출되자마자 카르타고군을 수적으로 압도하기 위해 노예와 범죄자에게 자유를 약속하면서까지 8개 군단을 징집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중 2개 군단은 북이탈리아의 하밀카르를 견제하고 있는 전임 독재관 티베리우스를 돕게 하고 다른 2개 군단은 삼니움족을 견제하는 데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직접 지휘할 수 있었던 건 고작 4개 군단.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지휘하는 카르타고군과 비슷한 수준의 병력뿐이었다.

파비우스는 만약 현재 자신이 지휘하고 있는 병력만으로 한니발의 군대와 회전을 벌였다가는 전임 독재관 플라미니우스처럼 큰 패배를 당하고 말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부하 장교와 병사 대부분은 사령관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한니발의 계략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로마군이 회전에서 카르타고군에게 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사령관 미누키우스를 비롯한 로마군 장교들은 독재관이 단호하게 눈앞의 적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분한 표정으로 지휘관 막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미누키우스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와서도 화를 참지 못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늙은 쿵크라토르(굼벵이) 한 마리가 전 로마인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구나! 우리의 영토를 유린하는 적군의 뒤를 그저 시중을 드는 노예처럼 따라다니고 있으니!”

로마군 군영 곳곳에서 많은 장교와 병사들이 미누키우스와 같이 탄식하며 독재관을 원망했다.

파비우스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결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 * *

한편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캄파니아 약탈을 마친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10월 초가 되자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한니발이 월동지로 점찍어 둔 게루니움을 향해 행군하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대열의 선두에서 말을 탄 채로 동쪽에서 물결치고 있는 험준한 아펜니노 산맥을 바라보면서 곁에 있는 하스드루발과 장교들에게 말했다.

“내가 로마군의 사령관이라면 산맥을 넘는 고갯길에 복병을 숨겨 놓겠지. 적장 파비우스도 전략적 안목이 보통은 넘는 것 같으니 분명 매복을 시도할 거다. 대책을 마련하려면 고민 좀 해야겠군.”

그러자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한니발에게 물었다.

“로마의 장수들은 하나같이 고지식한 자들이라 매복을 야만인의 전술로 여긴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파비우스가 전형적인 로마인이었으면 우리가 로마인의 마을을 불태울 때 벌써 회전을 걸어 오지 않았겠나?”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산맥 근처에 도착하면 미리 척후병을 보내서 안전한 고갯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마하르발의 말에 하스드루발이 대답했다.

“마하르발. 척후병은 산맥 근처에 도착한 다음 이틀 정도만 기다렸다가 정찰을 보내도록 하게.”

“다른 대비책을 생각해 두신 모양이군요?”

“베누시아를 점령하고 나서 삼니움족 부족장들에게 9월 말부터는 아펜니노 산맥의 고갯길에 로마군이 매복하지 못하도록 열심히 순찰해 달라고 부탁했네. 분명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았거든. 아펜니노 산맥은 삼니움족의 앞마당 같은 곳이니 로마군에게 쉽게 매복할 곳을 내어주진 않을 걸세.”

원 역사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하스드루발은 파비우스가 다른 로마군 사령관과 달리 아펜니노 산맥에 복병을 숨겨 놓을 거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예상하고 있었다.

하스드루발의 대답에 기병대장 마하르발을 비롯한 바르카 가문의 장수들은 물론이고 한니발조차도 감탄을 금치 못하며 동생을 칭찬했다.

“정말 잘했다! 이제 나보다도 한 수 앞을 더 내다보고 전략을 짜는구나! 이 사실을 알고 나서 파비우스가 지을 표정이 궁금하군!”

큰 고민을 던 한니발의 군대는 거침없이 아피아 가도를 따라 동쪽으로 나아갔다.

* * *

하스드루발의 예상대로 미리 아펜니노 산맥 초입에서 진을 치고 있던 독재관 파비우스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산맥의 고갯길에 정찰을 나갔던 척후병 300명 중 살아서 숙영지로 돌아온 자가 채 50명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깨에 피 묻은 붕대를 감은 척후병이 식은땀을 흘리며 독재관에게 보고했다.

“파비우스 독재관님께 보고드립니다. 캄파니아에서 아펜니노 산맥을 넘는 고갯길에 매복해 있던 삼니움족에게 기습을 당해 정찰대 삼백 명 중 이백오십삼 명이 전사하거나 적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척후병의 보고에 파비우스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깊이 탄식했다.

“삼니움족은 아이밀리우스 전직 집정관님의 군대를 상대하느라 이곳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을 텐데! 적장이 내가 아펜니노 산맥에 복병을 숨겨 놓을 걸 예상하고 미리 손을 쓴 모양이구나! 로마에서는 이제 막 정계에 진출한 나이인 젊은 적장이 어쩜 이렇게 교활하단 말인가!”

독재관의 전략이 좌절되자 부사령관 미누키우스가 다시 한번 독재관에게 카르타고군을 공격하자고 아우성쳤다.

“파비우스 독재관님! 계속 아펜니노 산맥 초입에 진을 치고 있다가는 앞에서 몰려오는 카르타고군과 우리의 등 뒤를 노리는 삼니움족에게 포위당하고 말 겁니다! 차라리 군대를 서쪽으로 전진시켜 이번에야말로 적장 한니발과 일전을 치러야 합니다!”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마라. 자네는 플라미니우스 전직 독재관님께서 이 부근에서 한니발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가 얼마나 처참한 패배를 당하셨는지 벌써 잊어버린 건가?”

“플라미니우스 전직 독재관님께서는 적장의 교활한 술수에 속으셔서 불필요하게 병력을 나누는 바람에 패배하신 겁니다! 해가 떠 있을 때 평원에서 정정당당하게 카르타고군과 전투를 벌인다면 무적의 로마 군단병이 질 이유가 없습니다!”

미누키우스의 말에 평소 그를 따르던 로마군 장교와 병사들이 입을 모아 독재관을 압박했다.

“독재관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대로 우리의 영토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닌 적군을 보내 주면 전 지중해가 조국 로마를 우습게 볼 겁니다!”

“우리는 적과 싸우기 위해 생업을 버리고 전장에 나왔습니다! 그저 도망이나 다니려고 자비로 비싼 검과 갑옷을 산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파비우스의 의지는 식견이 부족한 부하들이 일으킨 소란에 흔들릴 만큼 유약하지 않았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미누키우스를 비롯한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조용히 해라! 지금 당장 군대를 북서쪽으로 움직여 적과의 충돌을 피한다! 이 문제를 가지고 더 시끄럽게 떠드는 자는 항명죄로 처벌하겠다!”

독재관의 호통에 그의 곁에서 서서 호위하고 있던 24명의 릭토르가 로마의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무기 파스케스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굵은 나무막대 다발에 도끼를 묶은 파스케스는 절대권력에 복종하는 않는 자를 나무 몽둥이로 매질하고 도끼로 목을 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로마군 장교들과 병사들은 속으로는 이를 갈면서도 더는 독재관에게 대들지 못하고 지휘관 막사 밖으로 나와 버리고 말았다.

분을 참지 못한 로마군 장교 열 명이 그날 저녁 점호가 끝나고 나서 부사령관 미누키우스의 천막으로 목소리를 죽여 가며 불만을 토해 냈다.

“미누키우스 부사령관님! 너무 화가 나서 잠이 오질 않습니다! 드디어 남이탈리아의 카르타고군을 전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 버리고 말다니요!”

“평원에서는 교활한 적이 술수를 부릴 수도 없는데 뭐가 그리 겁이 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늙은 쿵크라토르가 드디어 노망이 난 모양입니다!”

부사령관 미누키우스는 눈을 감고 장교들의 말을 경청하다가 갑자기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쿵크라토르를 쳐내야겠다.”

그 말을 듣고 불만을 토로하던 장교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면서 소란스럽던 천막 안에 불편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장교들 중 한 명이 접시처럼 크게 뜬 눈으로 미누키우스를 바라보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미누키우스 부사령관님. 아무리 그래도 설마 쿵크라토르를 암살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지요?”

“내가? 그럴 리가 있나? 쿵크라토르는 어리석고 겁 많은 늙은이지만, 그래도 로마 원로원이 직접 임명한 독재관이다. 한낱 부사령관인 내가 독재관을 처단하면 조국 로마에 반역을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럼 어떻게 쿵크라토르를 쳐내신단 말입니까?”

“노망난 늙은이에게 임페리움(로마의 군권)을 쥐여 준 원로원이 스스로 그에게서 절대권력을 빼앗게 하면 될 것 아닌가? 쿵크라토르는 고집스러운 원칙주의자라 원로원의 명령에는 반드시 따를 거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믿을 만한 기병 다섯 기를 몰래 로마로 보내서 로마 시민들에게 이곳의 사정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시민들이 쿵크라토르를 규탄하면 로마 원로원도 그에게 징계를 내릴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게 해 주겠나? 이건 상관을 음해하는 게 아니라 교활한 적과 무능한 지휘관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한 일이다. 그럼 당장 오늘 밤에 기병들을 로마로 출발시켜라.”

미누키우스와 작당한 로마군 장교들은 즉시 파비우스를 싫어하면서 입이 무거운 기병 다섯 명을 선별해 해가 뜨기 전에 로마로 출발시켰다.

로마 기병 다섯 기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피아 가도를 따라 말을 달려 이틀 만에 로마에 도착했다.

미누키우스가 보낸 기병들은 열정적으로 주점과 광장을 돌아다니며 파비우스의 흉을 보고 다녔고 며칠 지나지 않아 로마의 마르스 광장은 다시 독재관을 욕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뭐? 우리 삼촌의 집을 불태운 놈들을 그냥 보내 준다고? 미친 거 아니야?”

“적군도 로마인의 농장을 불태우고 로마군도 적군이 식량을 얻을까 봐 무서워서 농장을 불태우고 있다고? 그럼 한니발하고 쿵크라토르가 다를 게 대체 뭐냐!”

부사령관 미누키우스의 예상대로 로마 시민들은 다시 한번 쿠리아 호스틸리아 앞으로 몰려가 독재관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자신의 저택 2층에서 친구 막시무스와 함께 분노한 시민들이 몰려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던 스키피오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시 한번 동포의 피가 우리 땅을 적시겠구나···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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