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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21화 (121/201)

[ 121 ] [120화] 가짜 영웅 미누키우스 (1)

“이 시국에 로마로 돌아와서 제전(祭典)에 참가하라니···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지만, 시기가 너무 좋지 않구나.”

파비우스는 원로원이 보낸 전령이 건네준 서신을 읽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마 원로원은 독재관에게 로마에서 열릴 종교행사 참석을 ‘권유’했다.

그러나 정치 경력이 30년이 다 되어 가는 파비우스는 원로원이 보낸 서신이 담고 있는 진짜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정중한 문체로 쓰여 있는 초청장은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정적들이 적장을 놓쳐 버린 일에 대해 문책하기 위해 보낸 소환장이었던 것이다.

로마의 정치인들은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 거부감이 없어 제전이나 신점(神占)을 정적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평민과 귀족 모두 신앙심이 깊은 카르타고에서는 결코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자신에게 서신을 보낸 자들의 검은 속내를 훤히 알고 있음에도 로마로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고지식한 그의 성격상 원로원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비우스가 제전에 참여하길 거부한다면 신앙심이 깊은 로마의 평민들이 그렇지 않아도 미워하고 있는 독재관을 무신론자로 몰아 처벌하려 들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파비우스는 부사령관 미누키우스를 비롯한 부대의 모든 장교를 지휘관 막사로 불렀다.

그는 휘하의 장교가 모두 막사 안에 들어서자 부하들에게 원로원에서 보낸 서신을 펼쳐서 보여 주며 말했다.

“일주일 후에 로마에서 번개의 신이시자 올림포스의 왕이신 유피테르의 제전이 열린다고 한다. 원로원에서 공식적으로 내가 그 행사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로마에 다녀올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군법에 따라 내가 없는 동안 부사령관 미누키우스를 독재관 대리에 임명한다. 모두 그의 명령을 잘 따르도록 해라.”

미누키우스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간신히 가슴속에서 벅차오르는 기쁨을 억눌렀다.

사실상 징계를 받으러 로마로 떠나는 독재관 앞에서 웃음을 터뜨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면서 파비우스의 말에 대답했다.

“독재관님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기병 삼백 기를 선별해 로마로 가시는 동안 독재관님을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다. 카르타고군의 움직임을 감시하려면 기병이 한 기라도 더 필요할 거다. 내 호위는 릭토르 스물네 명이면 충분하다.”

“알겠습니다. 올림포스의 신들께 독재관님께서 무사히 제전을 마치고 돌아오시길 빌겠습니다.”

미누키우스는 평소 격앙된 목소리로 독재관에게 따질 때와는 달리 그 어느 때보다 공손하게 말했지만, 자꾸 귀에 걸리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잡아 두느라 볼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파비우스는 그런 부사령관의 모습을 보고 그가 기쁨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보통의 로마군 지휘관이었다면 십중팔구 미누키우스에게 역정을 냈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화를 내는 대신 걱정스러운 얼굴로 부사령관에게 말했다.

“미누키우스 부사령관. 부디 교활한 적장 한니발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라. 절대로 경솔하게 군대를 움직이면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독재관님.”

파비우스는 부사령관의 대답을 들은 후 릭토르들과 함께 막사 밖으로 나섰다.

독재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미누키우스의 입꼬리가 그의 귓가를 향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갔다.

미누키우스는 파비우스가 말을 타고 숙영지 밖으로 달려나가자마자 곧바로 밝은 표정으로 한니발의 군대와 일전을 벌일 준비를 했다.

그는 먼저 독재관이 떠난 날 저녁에 병사들을 숙영지 한가운데에 모아 놓고 말했다.

“이제 굴욕의 시간은 끝내야 한다! 독재관님께서 로마에 가 계시는 동안에 오만한 카르타고의 오합지졸들을 우리의 손으로 물리치자! 내일 해가 뜨자마자 동쪽에 있는 적군을 추격할 테니 모두 저녁을 든든히 먹고 일찍 자도록 해라!”

그동안 가족과 동맹도시의 마을이 불타는 모습을 그저 보고만 있는 것이 불만스러웠던 로마 군단병들은 부사령관 미누키우스의 말을 듣자마자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드디어! 드디어 카르타고 놈들에게 복수한다!”

“우와아아아! 미누키우스 부사령관님 만세!”

미누키우스는 자신에게 열광하는 4만 명의 병사들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곁에 있던 군단장 네 명에게 말했다.

“병사들의 함성이 올림포스에까지 닿겠구나! 오늘은 특별히 병사들에게 저녁을 먹이도록 해라.”

전장에 나선 고대 로마의 병사들은 전통적으로 점심만 먹고 저녁은 먹지 않았다.

완고한 보수주의자인 파비우스는 그런 로마의 전통을 철저하게 지켜 왔지만, 30대 중반의 젊은 부사령관은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 온 관습을 잠시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밤 캄파니아의 로마군 병사들은 오랜만에 저녁에 구운 고기와 부드러운 빵을 양껏 먹고 적의 동태를 감시하러 정찰을 나가는 대신 숙영지 천막에서 단잠을 자며 전장에서 한니발의 군대를 물리치는 꿈을 꾸었다.

* * *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파비우스가 로마로 떠난 지 이틀도 지나지 않아 까다로운 적장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눈치챘다.

정찰을 나갔던 기병대가 숙영지로 돌아와 그동안 일정한 거리를 두고 로마 원정대를 쫓아오던 로마군이 갑자기 속도를 올려 맹렬하게 추격해 오고 있음을 한니발에게 보고했기 때문이다.

한니발은 아군의 숙영지로 다가오는 로마군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기병대장 마하르발과 기병 500기만 이끌고 서쪽으로 말을 달렸다.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군 4만 4천 명이 빠른 속도로 행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니발은 무턱대고 동진하는 로마군의 진형을 찬찬히 둘러보고는 싸늘한 조소를 띄며 중얼거렸다.

“파비우스의 후임은 화난 멧돼지 같은 자인가 보군. 전략을 모르는 야만족의 군대를 상대로는 그럭저럭 전공을 올리겠지만, 그 정도가 한계인 전형적인 로마군 장수다.”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한니발의 말을 듣고 그에게 물었다.

“저 정도의 적이라면 플라미니우스 때처럼 계책을 쓰지 않고 회전을 벌여도 로마군을 압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숙영지로 돌아가서 전투를 준비할까요?”

“아니다. 우리가 순수하게 힘으로 로마군에게 회전에서 승리하는 순간 로마인 중에서 유일하게 머리가 돌아가는 파비우스가 다시 권력을 잡게 될 거다. 지금은 저 멍청한 멧돼지가 파비우스의 발목을 잡도록 유인해야 한다.”

“적장이 적장을 견제하도록 하시다니··· 한니발 장군님과 하스드루발 장군님의 지략에 매일 같이 감탄하게 되는군요.”

“칭찬은 이번 작전을 확실히 성공시킬 때까지 미뤄 두게. 어서 숙영지로 돌아가 아펜니노 산맥을 넘을 준비를 하세나. 적장은 분명 우리가 로마군의 진격에 겁먹고 도망치는 줄 알고 미친 듯이 쫓아올 테지.”

“알겠습니다. 이 정도 거리면 로마군이 하루면 우리의 숙영지에 도착할 테니 서둘러야겠습니다.”

한니발과 마하르발은 즉시 말머리를 동쪽으로 돌려 기병대와 함께 숙영지로 향했다.

한니발은 장교들에게 천막을 걷고 보급품과 전리품을 수레에 싣게 할 생각이었지만, 그가 숙영지의 목책 안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하스드루발은 형이 마하르발과 함께 숙영지로 돌아온 것을 보고 한니발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형. 이제 이탈리아 동남부로 출발할 생각이지? 왠지 그럴 거 같아서 미리 준비해 놨어.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돼.”

“또 내 생각을 읽고 미리 행군 준비를 마쳐 놨구나! 정말 잘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얼른 출발하자. 괜히 꾸물거리다 로마군에게 따라잡히면 이번 전투는 사자 대신 멧돼지 한 마리 잡은 걸로 만족해야 할 테니까 말이야.”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동쪽의 천연장벽 아펜니노 산맥의 고갯길로 향했다.

애초에 숙영지가 산맥에서 가까운 곳에 지어져 있었기 때문에 한니발의 군대는 하루도 지나지 않나 고갯길의 초입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4열 종대로 늘어서서 좁은 고갯길을 넘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은 산맥을 넘는 도중 마주친 삼니움족 순찰대를 마주칠 때마다 그들의 대장에게 한니발과 자신이 짠 작전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곧 4만 명이 넘는 로마군이 우리 바르카 가문의 군대를 뒤쫓아 아펜니노 산맥을 넘으려고 할 겁니다. 그때 적을 공격해서 행군속도를 늦추되 너무 치열하게 싸우시지는 말고 적당히 적을 상대해 주다 후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두 장군님께서 또 신묘한 작전을 생각해 내신 모양이군요. 삼니움족의 부족장님들께 하스드루발 장군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하스드루발은 적장이 군대를 움직이는 모습을 볼 때 작은 성공에 쉽게 흥분하는 성격일 거라고 판단했다.

삼니움족에게 고갯길을 지나는 로마군을 보내 주라고 한 것도 적장에게 근거 없는 자신감을 심어 주기 위한 작전의 일환이었다.

‘적장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나 저돌적인 자다. 삼니움족의 매복공격을 별 피해 없이 견뎌 내고 고갯길을 넘는다면 기고만장해지겠지. 그런 자가 로마의 군권을 잡으면 우리에게는 어지간한 동맹보다 더 도움이 될 거다. 파비우스가 전장을 떠난 이 기회를 잘 살려야 돼.’

* * *

한편 미누키우스는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예상대로 군대를 이끌고 열심히 카르타고군을 추격했다.

그는 마침내 아펜니노 산맥 고갯길의 초입에 도착했을 때 먼발치에서 적군의 최후미가 막 가파른 산길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주변의 장교들에게 소리쳤다.

“봐라! 쿵트라토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카르타고 놈들이 우리가 진격해 오니까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고 있다! 저런 오합지졸에게 에트루리아와 캄파니아를 약탈당했으니 이 얼마나 분한 일이냐! 당장 녀석들을 뒤쫓아라! 우리의 가족과 이웃이 당한 고통을 가증스러운 적에게 고스란히 갚아 주자!”

로마 군단병들은 잘생긴 젊은 사령관의 열정적인 외침에 고무되어 군가를 부르며 더 힘차게 행군했다.

마침내 미누키우스의 로마군은 산맥의 고갯길로 들어서 산악행군을 시작했다.

미누키우스는 행군을 서두르면서도 북이탈리아의 산과 숲에서 갈리아인과 싸울 때의 경험을 살려 행군 경로에 미리 척후병을 보내 적의 매복공격에 대비했다.

로마군이 산악행군을 시작한 지 반나절이 흘렀을 때, 정찰을 나갔던 경보병 벨리테스를 지휘하는 하급장교가 미누키우스에게 돌아와 보고했다.

“미누키우스 독재관 대리님께 보고드립니다! 고갯길을 따라 6스타디온(약 1km)(을) 더 가면 나오는 숲에 삼니움족의 경보병이 매복해 있습니다!”

“적군의 숫자는 어느 정도지?”

“적군이 나무 그늘에 숨어 있어서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대략 2천 명에서 4천 명 사이인 듯합니다.”

“적이 매복해 있는 곳을 알았으니 그 정도 병력의 공격은 얼마든지 돌파할 수 있다. 전군 겁먹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

미누키우스는 병사들에게 외친 후 자신도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손에 검과 투창을 들고 대열의 맨 앞에 섰다.

새로운 사령관의 호기로운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사기가 오른 로마군 병사들은 검으로 방패를 두드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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