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 [121화] 가짜 영웅 미누키우스 (2)
미누키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삼니움족의 산발적인 공격에 대응하느라 시간을 잡아먹고 있을 때,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아펜니노 산맥의 고갯길을 지나고 있었다.
한니발은 삼니움족에서 보내온 길잡이에게 가장 빨리 산맥을 넘을 수 있는 경로로 자신을 안내하게 했다.
로마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월동지로 정한 이탈리아 남동부의 작은 도시 게루니움을 점령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삼니움족 길잡이가 안내한 고갯길은 폭이 좁고 경사가 조금 가팔라 행군하기 편한 곳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길 양옆에 늦가을을 맞아 붉게 물든 단풍나무숲이 아름답게 우거져 있어 무거운 장비를 몸에 걸치고 산을 타느라 지쳐 가는 병사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었다.
특히 이번 생에 처음으로 단풍나무를 본 하스드루발은 애마 페라리의 등 위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단풍나무를 마지막으로 본 게 대체 얼마 만이지? 전생에 고등학교 수학여행 다녀오고 나서 처음이니까 거의 삼십오 년 만인가? 전쟁 중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지나가게 될 줄이야! 부인이 보면 아주 좋아하겠다.’
추억에 잠긴 하스드루발은 머릿속에 히스파니아에 두고 온 아내 소포니스바의 모습을 떠올리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팔자도 세지. 전생에는 연애할 틈도 없이 바빴는데, 이번 생에는 기껏 역사에 이름을 남긴 미녀와 결혼하고도 신혼을 즐길 새가 없구나. 대체 언제쯤 전쟁을 끝내고 나도 좀 인생을 즐길 수 있으려나.’
그가 마음속에서 푸념을 늘어놓고 있을 때 한니발이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하스드루발, 왜 그렇게 풀 죽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거냐?”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갑자기 카르타고 노바에 두고 온 부인 생각이 좀 났어.”
“그랬구나. 그러고 보니 내 아들 아스파르도 이제 글을 배울 나이가 됐겠다. 늦어도 네가 서른 살이 되기 전에는 로마의 항복을 받아 내자. 전쟁이 더 길어지면 네가 남들은 손주를 볼 나이에 첫 자식을 보게 생겼으니 말이야.”
두 형제의 근처에서 걷고 있던 장교와 병사들이 한니발의 농담을 듣고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형의 농담이 현실이 될까 봐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원 역사대로라면 내가 마흔 살쯤 됐을 때야 전쟁이 끝나겠지. 한니발 형은 여전히 앞으로 큰 회전에서 한두 번만 더 이기면 로마가 우리에게 항복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을 거야.’
원 역사의 로마는 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 지 3년도 안 돼서 약 10만 명의 병사를 잃었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전쟁을 끝낼 때까지 무려 약 30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까지 16년 동안이나 치러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런 로마를 이기려면 아직 파비우스를 제외한 다른 로마인들이 명장 한니발을 ‘교활하고 운이 좋은 풋내기’쯤으로 여기고 있을 때 로마군에 더 큰 피해를 입혀야만 한다.
하스드루발은 이번 작전이 절반의 성공만 거둬 미누키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을 섬멸해도 로마 원로원이 일찌감치 한니발의 무서움을 깨닫게 된다면 이번 전쟁도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파비우스가 다시 권력을 잡기 전에 적어도 칸나에 전투급의 회전에서 한 번 더 승리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 적군을 지휘하고 있는 적장을 로마의 전쟁영웅으로 만들어야 해. 산맥을 넘자마자 놈에게 승리를 안겨 줄 연극무대를 세팅해 봐야겠군.’
* * *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최단코스로 산맥을 넘고 하루 정도 병사들을 쉬게 한 후 곧바로 다음 공격 목표인 게루니움을 공격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게루니움은 북쪽에 흐르는 걸어서 건널 수 없는 강과 남쪽이 험한 산지와 맞닿아 있어 수비하기에 좋은 위치에 세워진 도시였다.
그러나 게루니움은 도시의 규모가 작고 변변한 수비군도 없었던 데다 무엇보다 강력한 이웃인 삼니움족이 로마연합에서 이탈해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니발에게 대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게루니움 시민들은 먼발치에서 한니발이 이끄는 5만 대군이 보이기 시작하자 성문에 백기와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나무 가지를 내걸며 항복하고 말았다.
비록 지방의 중소도시이긴 하지만, 삼니움족에 이어 두 번째로 로마연합에서 이탈한 세력이 생긴 것이다.
한니발은 많든 적든 아군의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공성전을 아주 싫어했기 때문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휘하의 장교들에게 말했다.
“위대하신 바알 함몬께서 우리에게 다시 한번 은총을 내리셨다! 이번 겨울은 숙영지 대신 게루니움 시내에서 지낸다!”
사령관의 말에 바르카 가문의 장교와 병사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만세!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좀 먹겠구나!”
“천막 대신 침대에서 자는 게 대체 얼마 만이냐!”
하스드루발도 게루니움에 무혈입성하게 되어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기뻐했다.
원 역사의 한니발은 로마군의 지원군을 기다리며 끝까지 저항한 게루니움을 함락시킨 후 시민들을 죽이거나 쫓아냈는데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열의 선두에서 말을 타고 게루니움의 성문으로 들어서면서 옆에 있는 한니발에게 말했다.
“쓸데없이 피를 흘리지 않아도 돼서 정말 다행이다! 이제 월동 준비에 신경 쓰지 않고 로마군을 상대할 준비만 해 두면 되겠어!”
“그래. 로마군이 우리가 만들어 둔 무대에서 춤추게 하려면 준비를 철저히 해 둬야지. 적장도 파비우스가 군권을 맡길 정도이니 바보는 아닐 테니까 말이야.”
두 형제는 게루니움에 입성한 후 원정대를 추격하는 로마군을 상대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기병대장 아즈루바알에게 기동력이 좋은 누미디아 궁기병 500기를 맡겨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오고 있는 적의 위치와 적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아즈루바알은 정찰을 나간 지 나흘 만에 게루니움으로 돌아와 한니발에게 보고했다.
“한니발 장군님께 보고드립니다. 우리를 추격하고 있는 로마군이 어제저녁에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게루니움에서 북서쪽으로 50스타디온(약 9km) 정도 떨어진 평야에 숙영지를 세웠다고 합니다. 적군의 규모는 우리 군과 비슷하거나 약간 적은 걸로 보입니다.”
“적의 규모가 예상했던 범위를 넘지는 않는군. 그나저나 적장에 대해서는 알아 온 게 없나?”
“로마군 숙영지에 식량을 공급한 인근 주민을 붙잡아 심문했는데 미누키우스라는 젊은 장군이 독재관 대리로 임명돼 군대를 지휘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과 함께 기병대장 아즈루바알의 보고 듣고 나서 원 역사에서 별로 유명하지 않은 적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미누키우스면 파비우스의 부사령관이었던 자네. 꽤 무모한 자니까 조금만 신경 쓰면 내 생각대로 잘 움직여 주겠구나.’
원 역사의 미누키우스는 파비우스와 대립하며 그에게 반발해 일부러 휘하의 병사들과 함께 무모하게 카르타고군을 공격하다 한니발의 뛰어난 전술에 휘말려 전사할 뻔한 위기에 처한다.
그런 상황을 예견한 파비우스가 전군을 이끌고 그를 구하러 온 덕에 미누키우스는 간신히 목숨을 구하고 생명의 은인인 파비우스에게 그동안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
파비우스는 그런 미누키우스를 기꺼이 용서하고 로마 시민들은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독재관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하스드루발은 가장 까다로운 적장인 파비우스가 로마 시민에게 호감을 심어 주고 군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한니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삼니움족이 매복공격을 하는 시늉만 한 걸 고려해도 로마군이 생각보다 빨리 산맥을 넘어왔네. 빨리 군사회의를 열어서 구체적인 작전을 짜 보자.”
“그게 좋겠다. 아즈루바알, 장교들을 게루니움의 마을회관으로 불러라. 전원이 모이는 즉시 군사회의를 열 생각이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기병대장 아즈루바알은 즉시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묵고 있는 귀족의 저택을 나와 휘하의 병사들을 시켜 장교들을 마을회관으로 소집했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그동안 구상해 두었던 작전을 장교들에게 설명한 후 전 로마인을 속이기 위한 연극의 막을 올렸다.
* * *
회의를 마친 로마 원정대는 각자 맡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한니발은 기병대장 마하르발과 함께 전 병력의 3분의 2를 이끌고 아직도 로마의 편에 붙어있는 풀리아 지역의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기 위해 게루니움의 성문을 나섰다.
형이 남동쪽으로 진군하고 있을 때, 하스드루발은 남은 병사 1만 5천 명 중 8천 명은 도시의 수비를 위해 남겨 두고 보병 6천 명과 기병 1천 기를 이끌고 게루니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언덕으로 향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게루니움 시내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에 요새를 지으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적장 미누키우스를 꾀어 내기 위한 미끼를 던진 것이었다.
하스드루발이 성문을 나선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정찰을 나왔던 로마의 기병대가 카르타고군이 게루니움 근처의 언덕 위로 목재를 나르는 것을 보고 숙영지로 돌아가 사령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미누키우스는 기병의 보고를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군단장들에게 말했다.
“전쟁의 신 마르스께서 드디어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시려는구나! 더 늦기 전에 요새를 지으려는 카르타고군을 쫓아내고 우리가 그 언덕을 점령해야 한다! 적의 주력이 약탈을 나간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거다!”
미누키우스는 혹시 한니발이 군대를 돌려 숙영지를 공격할 때를 대비해 1개 군단만 데리고 언덕 위로 목재를 나르는 하스드루발의 병사들을 향해 진격했다.
하스드루발은 미누키우스의 군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병사들에게 목재가 담긴 수레를 버리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게 했다.
“북동쪽에서 적이 몰려온다! 갈리아 보병대는 앞으로 나서라!”
그의 명령에 카르타고군의 모루 역할을 하는 갈리아인 경보병 4천 명이 전선의 맨 앞에 서고 그 뒤를 북아프리카 중장보병 2천 명이 받쳤다.
누미디아 궁기병 1천 기는 본대의 좌익과 우익에 500기씩 배치되었다.
곧 미누키우스가 이끄는 로마군 1만 1천 명이 성난 소 떼처럼 8천 명의 카르타고군을 향해 들이닥쳤다.
하스드루발은 아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도 적장에게 로마 원로원에 자랑할 만한 승리를 안겨 주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여 병사들을 지휘했다.
전황은 누미디아 궁기병 1천 기가 로마 기병대를 쫓아 버렸지만, 보병끼리의 싸움에서는 로마군이 카르타고군의 본대를 점점 뒤로 밀어내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마침내 아군 본대가 게루니움 성벽 근처까지 밀렸을 때, 하스드루발은 기수에게 깃발을 흔들게 해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카르타고군이 게루니움의 성벽 안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자 미누키우스가 적을 뒤쫓으려는 로마 군단병들을 제지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성벽 위에 있는 궁수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게 된다! 도망치는 적을 쫓지 말고 적 본대가 돌아오기 전에 언덕을 점령하라!”
사령관의 명령이 장교들을 통해 전군에 전해지자 로마군은 도망치는 적군을 뒤로하고 언덕 위로 올라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우리가 이겼다! 드디어 우리가 카르타고군을 이겼다!”
“미누키우스 사령관님 만세!”
병사들의 환호성을 듣고 기분이 좋아진 미누키우스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곁에 있던 기병에게 말했다.
“서신을 적어 줄 테니 당장 로마로 출발해 원로원에 이 기쁜 소식을 알려라! 이 미누키우스가 드디어 적에게 승리를 거뒀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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