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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23화 (123/201)

[ 123 ] [122화] 가짜 영웅 미누키우스 (3)

기원전 217년 10월 말.

독재관 대리 미누키우스가 보낸 전령이 카피톨리노 언덕을 올라 원로원에 승전보를 전했다.

사실 로마군은 아군 피해가 거의 없었다고는 하지만, 카르타고군의 사상자 또한 500명도 채 안 되는 작은 승리를 거뒀을 뿐이었다.

그러나 전황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작은 승리는 로마 시민들에게 역사에 남을 대승으로 잘못 알려지고 말았다.

출세에 목마른 젊은 장군 미누키우스가 자신의 전공을 조금 부풀려서 원로원에 보고한 데다, 여러 사람의 입을 거쳐 승전보가 전해지는 동안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드디어 애타게 기다리던 승전보를 들은 로마 시민 수만 명이 거리와 광장으로 뛰쳐나와 큰 소리로 카르타고군을 물리친 장군의 이름을 불러 댔다.

“미! 누! 키우스! 미! 누! 키우스! 미! 누! 키우스! 미! 누! 키우스!”

몸이 불편해 거리로 나올 수 없는 시민들은 기쁨의 눈물로 볼을 적시며 창밖에 색색 가지 꽃잎을 뿌려 댔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후 꾸준히 카르타고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해 온 로마의 정치인들이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수십 명의 평민파 정치인들이 광장으로 몰려나와 미누키우스를 칭송하는 연설을 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유권자들에게 알렸다.

그들 중에서도 달변가로 유명한 법무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의 주변에는 수천 명의 시민이 모여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친애하는 로마 시민 여러분! 저를 비롯한 원로원 의원들은 기뻐하기보다는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여러분께 고백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원로원은 무엇이 두려워 조국 로마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적을 피해 도망 다니기 바빴단 말입니까! 용맹한 젊은 장군 미누키우스 루푸스가 야비한 카르타고군을 물리칠 때까지 원로원은 절대 적에게 굴하지 않는 로마인의 정신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때 파비우스는 번개의 신 유피테르에게 바치는 제전을 마치고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신전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그의 곁에 있던 마르켈루스가 미누키우스가 거둔 작은 승리에 열광하는 시민들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야말로 개선장군 없는 개선식이라 부를 만한 광경이군요. 미누키우스가 권력을 잡으면 로마 시민들은 순간의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점점 커져만 가는 종기를 피가 나도록 긁으려고 들 겁니다.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다는 말입니까······.”

마르켈루스는 평민 출신이지만, 파비우스의 전략적 안목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지구전 전략에 찬성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파비우스가 역시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면목 없습니다. 제가 부사령관을 휘어잡지 못한 바람에 적장 한니발을 돕게 생겼군요. 일단 미누키우스에게 군사 지휘권이 완전히 넘어가는 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흥분한 시민들이 미누키우스를 공석인 집정관 자리에 앉히기 전에 우리가 선수를 쳐야겠습니다.”

“제가 다시 전장에 가 있는 동안 뒷일을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신전 앞에서의 대화를 마치고 각자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로마에서의 용무를 모두 마친 파비우스는 미누키우스가 다시 돌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서둘러 릭토르 24명과 함께 아피아 가도를 따라 캄파니아를 향해 말을 달렸다.

그동안 마르켈루스는 독재관의 지구전 전략에 찬성하는 귀족파 원로원 의원들의 힘을 모아 최대한 빨리 집정관 보궐선거를 열었다.

로마 시내의 축제 분위기가 식을 줄을 몰랐기 때문에 집정관 선거가 열린다는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아 선거의 투표율은 예년보다 훨씬 저조했다.

그 덕에 마르켈루스와 지구전에 찬성하는 귀족파 원로원 의원들은 지지세력을 결집하여 보수적인 명문 귀족 출신인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를 비어 있는 집정관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 * *

미누키우스의 승리가 불러온 시민들의 지지에 취해 있던 로마의 평민파 정치인들은 갑자기 집정관 보궐선거가 열리고 귀족파인 레굴루스가 당선되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평민 출신 장군 미누키우스를 집정관에 당선시켜 전직 독재관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한 이후 빈자리로 남아 있던 평민파의 구심점으로 삼는다는 그들의 계획이 물거품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세력이 줄어든 평민파 중 그나마 영향력 있는 정치인인 법무관 바로는 집정관 선거 결과를 듣자마자 민회의 정무위원인 호민관 메틸리우스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그는 문을 연 노예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 들어선 후 젊은 호민관 메틸리우스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존경하는 메틸리우스 호민관님. 이렇게 늦은 시간에 댁에 불쑥 찾아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혹시 호민관님의 잠을 깨운 건 아닌지요?”

“아닙니다, 존경하는 바로 법무관님. 귀족파가 갑자기 레굴루스 의원을 집정관에 임명해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참이었습니다. 올해는 미누키우스 장군의 활약이 불러온 기회를 살리기 어려울 테니 내년 선거를 노려 봐야겠습니다.”

“메틸리우스 호민관님.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 평민파는 내년에도 귀족파의 위세에 눌려 원로원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지난 며칠 동안 시민들이 미누키우스 장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전부 보시지 않았습니까?”

“호민관님의 말씀대로 이 정도 열기면 1년 정도 시간이 지나도 미누키우스 장군의 인기가 식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인기도 미누키우스 장군이 살아 있어야 의미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법무관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법무관님께서는 앞으로 1년 안에 미누키우스 장군님께서 적장 한니발의 군대와 싸우다 전사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제가 걱정하는 건 한니발의 공격이 아니라 독재관 파비우스의 질투입니다.”

“쿵크라토르가 카르타고군보다 위험하다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메틸리우스 호민관님. 잘 아시겠지만 독재관에게는 즉결처분권이 있습니다.”

그제야 법무관 바로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은 메틸리우스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로마의 독재관에게는 자신이 군법을 어겼다고 판단한 자를 재판을 열지 않고 즉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바로와 메틸리우스는 이대로는 파비우스가 캄파니아에 주둔 중인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로 돌아간 다음 명령을 어긴 미누키우스를 처형시켜 버릴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파비우스는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부관으로서는 유능한 부사령관을 죽일 마음은 품지 않았다.

그러나 호민관 메틸리우스는 지난 몇 년 동안 로마의 정치판에서 온갖 정치공작과 음모가 판치는 모습을 보아 왔기 때문에 30년 이상 정계에 몸담아 온 파비우스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독재관이 숙영지에 돌아가자마자 항명죄로 미누키우스 장군에게 사형을 선고해도 해도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 노회한 쿵크라토르가 미래의 정적을 그냥 내버려 둘 것 같지 않군요! 바로 법무관님!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로마의 영웅을 귀족파의 손에서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호민관님뿐입니다.”

“제가 말입니까? 아시다시피 호민관에게는 독재관의 명령에 대한 거부권은 없습니다.”

“하지만 미누키우스 장군님에게 임페리움(군사 지휘권)을 부여할 권한은 가지고 계시지요.”

바로의 말에 메틸리우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평민 중에서 매년 두 명을 선거로 선출하는 민회의 정무위원 호민관은 원로원의 일원이 아님에도 집정관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호민관이 제정한 입법안은 다른 한 명의 호민관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이상, 독재관이라고 할지라도 부결시킬 수가 없었다.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가진 호민관이 로마 정계를 좌지우지해 오지 않은 이유는 군권과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원로원의 물리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원로원과 극한까지 대립하다 화가 난 귀족들이 법률을 무시하고 길거리에서 가신들과 함께 자신을 공격하기라도 하면 평민인 호민관으로서는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메틸리우스는 자신의 안전과 평민파의 이익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술을 간신히 열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미누키우스 장군님께 임페리움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겠습니다. 대신 원로원 내부에서의 반발은 법무관님께서 무마시켜 주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메틸리우스 호민관님의 용기 있는 결정은 역사에 나라를 구한 위업으로 남을 겁니다!”

* * *

법무관 바로와 헤어진 호민관 메틸리우스는 밤새도록 작성한 입법안을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민회에 출석해 공표했다.

법안의 내용은 전쟁 중 큰 공을 세운 장군을 민회가 ‘부독재관’에 임명해 독재관이 가진 군사 지휘권의 절반을 나눠 갖게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이밀리우스와 마르켈루스를 비롯한 지구전 주의자 정치인들은 그 소식을 듣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호민관 메틸리우스의 행동은 민회가 원로원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전쟁영웅 미누키우스에게 군사 지휘권을 주기 위한 법안을 원로원이 실력으로 저지한다면 다음에 벌어질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수십만 명의 평민들이 폭도가 되어 쿠리아 호스틸리아에 들이닥치는 것이었다.

결국 로마 원로원은 미누키우스에게 독재관 파비우스의 군사 지휘권의 절반을 나누어 줄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이 로마 시내에 심어 둔 첩자들은 말을 타고 캄파니아에 있는 로마 원정대의 진영에 기쁜 소식을 알릴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두 형제는 정찰병의 보고를 듣고 로마군 진영 내부에 뭔가 변화가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정찰을 나갔던 히스파니아 출신 경보병대의 장교가 한니발에게 보고했다.

“한니발 장군님께 보고드립니다. 로마군이 숙영지를 하나 더 짓고 병력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이제 적군은 얼마 전 점령한 게루니움 근처의 언덕과 이곳에서 북쪽으로 육십 스타디온(약 10.5km) 정도 떨어져 있는 평원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양쪽 숙영지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도 확인했나?”

“로마군은 병력을 정확히 반으로 나누었습니다. 양쪽 숙영지에 각각 보병 이만 명에 기병 이천 기 정도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하스드루발은 정찰병의 말을 듣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딱 우리가 원하던 대로 됐네! 이제 로마군이 탄 배가 사공 두 명이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할 때만 기다리면 되겠어!”

한니발도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주변의 장교들에게 말했다.

“비르사 언덕 위에 계신 신들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나 보구나! 이제 다음 전장으로 경솔한 미누키우스를 유인하기만 하면 되겠다! 마하르발. 내가 전에 얘기한 조건을 갖춘 장소는 물색해 두었나?”

“게루니움에서 남동쪽으로 오십 스타디온(약 9km)쯤 떨어져 있는 구릉 지대에서 장군님께서 말씀하신 조건에 딱 맞는 곳을 봐두었습니다.”

“잘했다! 자네는 보병 만 명과 함께 게루니움을 지켜라. 난 하스드루발과 함께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반쯤 덫에 발을 들여놓은 적을 유인하러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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