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 [123화] 덫에 걸린 로마군 (1)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정찰병의 보고를 듣자마자 다음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장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즈루바알. 나는 다음 전장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올 테니 그때까지 병사들에게 점심을 먹이고 출진할 준비를 해 놓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한니발 장군님.”
“그리고 하스드루발과 기스코는 나와 함께 간다. 기스코, 누미디아 기병들에게 곧 정찰을 나갈 테니 말에게 미리 여물을 먹여 두라고 전해라.”
“네? 저도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한니발 장군님.”
모든 준비를 마친 후 한니발은 하스드루발과 기스코, 그리고 누미디아 궁기병 500기와 함께 다음 전장으로 점찍은 남동쪽의 구릉 지대를 향해 말을 달렸다.
한니발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일행들과 함께 말에서 내린 후 전방에 솟아 있는 언덕을 바라보며 말했다.
“복병을 숨기기에 딱 좋은 곳이군.”
그 말에 기스코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메뚜기 떼가 휩쓸고 지나간 밀밭처럼 황량한 구릉 지대와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언덕뿐이었다.
기스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니발에게 대답했다.
“한니발 장군님. 병사들을 매복시키려면 주변에 산이나 숲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곳에는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참 다행이군.”
“뭐가 말씀입니까?”
“나와 함께 전장을 누빈 지 이 년이 다 되어 가는 자네 눈에 병사를 숨길 곳이 보이지 않는다면 적장 미누키우스도 내가 복병을 숨길 장소를 발견하지 못할 테니 잘됐다는 말이다.”
한니발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기스코는 사령관이 자신을 은근히 질책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도저히 병사를 숨겨 둘 만한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한니발에게 말했다.
“한니발 장군님. 부끄럽습니다만,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저 같은 범부는 십 년이 지나도 한니발 장군님과 하스드루발 장군님 같은 지략을 갖지는 못할 것 같군요. 부디 어리석은 제게 가르침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직도 깨닫지 못했나··· 하스드루발. 너라면 이미 내가 말하는 장소가 어딘지 눈치챘겠지.”
“처음에는 기스코와 같은 생각이었는데, 잘 살펴보니까 괜찮은 장소가 많네. 저런 데다 병사를 숨길 생각이지?”
하스드루발은 말을 잠시 멈추면서 손가락으로 복병을 숨길 만한 곳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으로 한니발과 기스코가 고개를 돌리자 세 사람의 눈에 언덕 경사면에 움푹 파여 있는 구덩이가 보였다.
“이 지역에는 저렇게 땅이 움푹 파여 있는 구덩이나 언덕의 경사면이 무너져서 생긴 단차가 많네. 아마 나무가 없으니까 뿌리가 흙과 암석을 잡아 두질 못해서 자연스럽게 비바람에 침식돼서 그런 거겠지? 저런 곳에 복병을 숨겨 두면 이번 전투도 쉽게 풀어 나갈 수 있겠어.”
동생의 말을 듣고 한니발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하급장교 기스코는 다시 한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하스드루발에게 대답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물론 로마군이 어설픈 화살에 맞은 멧돼지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다면 구덩이 속에 숨은 복병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전장에 도착한 적군 중 한 명이라도 주변을 둘러보면 복병을 숨긴 것이 들통나지 않겠습니까?”
“그럼 적이 앞만 바라보도록 하면 되지 않겠나?”
“네?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우리가 저 언덕 위에 투석병과 궁수를 미리 배치해 두면 저돌적인 미누키우스는 병사들에게 방패를 몸으로 가리면서 언덕 위로 진격하라고 명령하겠지.”
“아···! 아군 복병이 발견당하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적의 주의를 끄는 거군요! 역시 두 분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로마의 지휘관 중 이 작전을 간파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렇지도 않을 거야. 아마 파비우스라면 군대를 진격시키기 전에 주변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겠지. 그러니까 파비우스가 궁지에 몰린 미누키우스에게 지원군을 데리고 오기 전에 매복에 걸린 로마군을 전멸시켜 버려야 해.”
이번에는 한니발이 동생의 말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파비우스가 미누키우스를 구하기 위해 달려올 거라고? 설마! 미누키우스는 저번에 거둔 작은 승리 덕에 파비우스의 가장 위협적인 정적으로 성장했을 거다. 안 그래도 전투에 소극적인 파비우스가 눈엣가시 같은 정적이 위험에 처했다고 지원군을 보낼까?”
기스코도 한니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한니발 장군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파비우스가 미누키우스를 구하려고 달려오는 건 마치 두 분이 대 한노를 구하시는 경우나 마찬가지인 경우일 듯합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파비우스가 일반적인 로마군 장군이라면 두 사람 말이 맞을 거야. 로마의 장군과 장교는 모두 정치인이니까 어지간하면 적의 손을 빌려서 정적을 제거할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 그렇지만 파비우스는 달라. 분명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젖혀 두고 바로 전장으로 달려올 거야.”
한니발을 포함한 카르타고의 다른 장수들은 아직 파비우스가 전략적 안목이 뛰어난 까다로운 적장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원 역사의 지식을 가진 덕에 현재 가장 위협적인 적장의 됨됨이도 잘 알고 있었다.
원 역사에서 파비우스의 장남 막시무스는 집정관에 당선된 후 길을 가다 아버지와 마주치자 원로원 의원을 제외한 모든 관직을 내려놓은 파비우스에게 수행원을 보내 집정관에 대한 예를 갖추게 한다.
그 장면을 본 로마 시민들은 하나같이 아버지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한 막시무스를 뒤에서 손가락질하며 불효자식이라고 욕했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나중에 아들을 만나 로마의 전통과 법도를 잘 지켰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파비우스는 공화정 로마의 정체성과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개인적인 감정이나 가문의 이익 따위는 얼마든지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겠지. 말 그대로 공화정 로마의 화신 같은 자다. 전략적 재능은 둘째치고 다른 로마군 장군하고는 전장에 나서는 동기 자체가 달라.’
동생의 말을 듣고 한니발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음··· 네가 그렇게 말하니 좀 신경이 쓰이는구나. 하긴 시민들의 일시적인 불만을 잠재우려고 캄파니아에 있는 가문의 영지를 모두 국가에 기부해 버리는 극단적인 자이니 네 말대로 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그럼 파비우스가 지원군을 보내올 경로에도 병사를 배치해야겠군.”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파비우스의 군대는 내가 혼자서 막을게.”
“뭐···? 대체 무슨 수로 이만 대군을 혼자서 막겠다는 말이냐?”
하스드루발은 두 눈을 보름달처럼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한니발과 기스코에게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전장의 사전답사를 마치고 기병대장 아즈루바알이 데려온 병사 중 2만 명으로 언덕을 점거했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한니발의 지시에 따라 일부러 요란스럽게 움직였다.
덕분에 카르타고군이 게루니움 남동쪽의 언덕에 요새를 짓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금세 부독재관 미누키우스의 귀에 들어갔다.
자신의 막사에서 정찰병의 보고를 들은 미누키우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가증스러운 카르타고 놈들이 포기를 모르는구나! 놈들은 그 언덕을 전초기지로 삼아 남쪽에 있는 비옥한 곡창지대를 약탈할 생각인 게 틀림없다! 모두 전군을 출격시킬 준비를 해라! 요새가 완성되기 전에 적장 한니발에게 다시 한번 본때를 보여 줘야겠다!”
부독재관의 명령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군단장들이 병사들에게 출격 준비를 시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막사의 문 쪽에서 미누키우스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누키우스 부독재관님. 부디 이번 공격을 재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누키우스는 고개를 돌려 막사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핏대가 서 있는 눈동자에 전 상관인 독재관 파비우스의 모습이 비쳤다.
파비우스는 미누키우스가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카르타고군은 평소와는 다르게 보안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거침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적장 한니발이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모습입니다. 교활한 적이 다시 한번 우리 로마군을 함정에 빠트릴 준비를 하고 있을까 봐 걱정됩니다.”
파비우스는 자신과 같은 2개 군단의 지휘권을 가진 미누키우스에게 전통에 따라 예를 다하면서도 그가 경솔하게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는 것을 만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작은 성공을 거둔 후 자만심으로 가득한 미누키우스가 파비우스의 조언을 들을 리 없었다.
“파비우스 독재관님! 여기까지 오셔서 하신다는 소리가 또 적이 로마 시민과 동맹의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우는 걸 그냥 지켜보자는 말씀입니까? 이미 제가 저번의 승리로 적의 실력이 부풀려져 있음을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적장 한니발이 전 병력의 삼 분의 이를 이끌고 인근 마을을 습격하러 갔을 때 벌어진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하신 것 아닙니까? 이번에 언덕을 점거한 적 병력은 그때의 두 배가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부디 먼저 정찰병을 보내 정보를 수집한 후 제가 지휘하는 부대와 함께 움직이시지요.”
파비우스의 대답을 들은 미누키우스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불에 달군 쇠처럼 얼굴이 시뻘게졌다.
파비우스가 자신이 거둔 승리를 깎아내리고 있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파비우스 독재관님께서는 지난 몇 개월 동안 적장 한니발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그 작은 승리를 한 번이라도 거두신 적이 있습니까? 그럴 리가 없지요! 한니발의 그림자만 보여도 도망치기 바쁘셨으니까 말입니다!”
부독재관의 무례한 말에 파비우스를 호위하고 있던 릭토르 열두 명이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침착하게 옛 부관에게 대답했다.
“미누키우스 부독재관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더 얘기해 봐야 아무 소용 없겠군요. 저는 이만 제 숙영지로 돌아가겠습니다.”
파비우스는 예를 다해 미누키우스에게 인사한 후 릭토르들과 함께 지휘관 막사 밖으로 나왔다.
미누키우스 휘하의 군단병들은 독재관 일행에게 마지못해 예를 표하면서도 싸늘한 눈빛을 보내왔다.
파비우스는 이만 명의 병사들이 보내는 경멸로 가득한 눈빛을 견뎌 내며 숙영지 밖으로 나섰다.
그는 말을 타고 미누키우스의 숙영지 밖으로 나온 다음에야 근심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릭토르들에게 말했다.
“서둘러 우리 숙영지로 돌아가자. 이러다가는 미누키우스가 지휘하는 병사들이 전멸하고 말겠다.”
그의 말에 열두 명의 릭토르 중 가장 선임병인 자가 물었다.
“독재관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 건방진 미누키우스가 죽으면 독재관님과 파비우스 가문으로서는 좋은 일이 아닌지요? 게다가 감히 독재관님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병사들을 구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 자들이라도 우리의 동포다. 게다가 노예나 범죄자에게도 무기를 들려 주고 병사로 삼는 마당에 불필요하게 아군 전력이 줄어드는 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잔말 말고 어서 돌아가자! 앞으로 이틀 안에 숙영지를 게루니움 근처로 옮겨야 한다!”
말을 마치자마자 파비우스는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북서쪽에 있는 자신의 숙영지를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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