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 [124화] 덫에 걸린 로마군 (2)
부독재관 미누키우스는 옛 상관 파비우스가 자신의 숙영지를 떠나자마자 자신의 곁에 있는 두 군단장에게 지시했다.
“이번에도 쿵크라토르는 언덕을 점거한 적장의 등짝만 쳐다볼 생각인 것 같다. 우리끼리라도 적장 한니발이 전초기지를 완성하기 전에 카르타고군을 급습할 수밖에 없겠군. 당장 전군에 출격 명령을 내려라!”
부독재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2만 2천 명의 로마군이 벗어두었던 사슬 갑옷을 입고 검과 방패를 들었다.
신속하게 행군 준비를 마친 로마군 2개 군단은 숙영지를 떠나 게루니움 북쪽에 흐르는 강에 놓인 다리를 건넜다.
미누키우스는 게루니움 근처를 지나면서 카르타고군이 점령한 도시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자기들 본거지 근처를 지나는 데도 게루니움에서 적군이 나오질 않는구나. 카르타고군의 병력이 대부분 남동쪽으로 진군했다고 봐야겠군.”
그 말을 듣고 그의 곁에 있던 군단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누키우스에게 물었다.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이만 회군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적장 한니발이 병력 대부분을 이끌고 나왔다면 우리는 두 배가 넘는 적군을 상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직 속단하긴 이르다. 정찰을 다녀온 기병은 언덕을 점거하고 있는 적군이 2만 명 정도였다고 보고했다. 저번처럼 한니발이 정예병력을 이끌고 풀리아 지역의 마을을 약탈하러 간 거겠지.”
부독재관의 말에 로마군 장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비슷한 상황에서 적장 하스드루발이 지휘하는 군대에게 승리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로마 군단병들은 승리를 확신하며 젊은 부독재관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힘차게 행군해 몇 시간 후 한니발의 군대가 점거한 언덕 부근에 도착했다.
부독재관 미누키우스는 언덕 기슭에서 고개를 들어 카르타고군의 진영을 바라보고는 장교들에게 말했다.
“역시 정찰병의 보고대로 언덕을 점거한 적군은 우리보다 수가 적다. 이번에도 적군 중 대다수가 풀리아 지역을 약탈하러 떠난 게 틀림없다.”
그 말에 로마군의 군단장 중 한 명이 분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빌어먹을 카르타고놈들! 또 마을이 불타겠군요!”
“나도 마음 같아서는 적에게 공격당하고 있을 마을을 구하러 가고 싶다. 하지만 등 뒤에 이만 명이나 되는 적군을 남겨두고 마을을 구하러 갔다가는 카르타고군에게 포위당할 게 뻔하지 않겠나? 최대한 빨리 눈앞의 적을 섬멸하는 게 로마 시민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하는 길이다.”
“알겠습니다. 미누키우스 부독재관님. 병사들에게 전투에 대비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그래. 여기 없는 적이 돌아오기 전에 전투를 끝내야 하니 서둘러 진형을 다시 짜도록 해라. 프린키페스를 전열의 맨 앞에 세우고 벨리테스는 좌익과 우익에 배치할 기병대의 뒤를 받친다.”
“벨리테스와 하스타티가 아니라 프린키페스를 맨 앞에 세우란 말씀입니까?”
“그렇다. 질문은 나중에 하고 빨리 움직여라! 지금 이 순간에도 적장 한니발이 로마 시민을 해치고 있다!”
부독재관의 호령에 로마군 장교들이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부대의 진형을 다시 짜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로마군은 경보병 벨리테스를 전열에 맨 앞에 내세워 적에게 투창 세례를 퍼부은 후 중장보병대로 밀어붙이는 전술을 즐겨 사용한다.
게다가 중장보병대의 최선봉에 서는 것은 보통 선임병인 프린키페스가 아닌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은 하스타티였다.
그럼에도 미누키우스가 로마 군단의 핵심전력인 프린키페스를 전열에 맨 앞에 세우는 변칙적인 전술을 사용하기로 한 이유는 카르타고군의 강력한 원거리 공격과 기병에 대항하기 위한 임기응변이었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의 중산층 시민으로 구성된 프린키페스는 튼튼한 투구와 철제 사슬 갑옷, 청동 정강이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어 화살에 맞아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반면 가난하고 젊은 하스타티는 중장보병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상반신을 모두 보호하는 사슬 갑옷 대신 간신히 심장 부근만 가리는 조잡한 금속제 가슴받이를 착용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적의 사격에 취약했다.
미누키우스는 자신의 부대가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우렁찬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외쳤다.
“언덕 위로 진격해라! 해가 지기 전에 고지를 점령해야 한다!”
부독재관의 명령에 기수가 깃발을 흔들자 2만 2천 명의 로마군이 방패로 몸을 가리면서 언덕 위로 서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언덕 꼭대기에서 먹잇감을 향해 거리를 좁혀오는 늑대 무리처럼 다가오는 로마군을 보고 하급장교 기스코에게 말했다.
“기스코. 저기를 봐라. 적장이 중장보병을 최전방에 세우고 경보병을 기병대 뒤에 배치했다. 확실히 저렇게 진형을 짜면 돌과 화살을 맞고 다치는 병사가 줄어들 거다. 그럭저럭 머리가 돌아가는 장수로군.”
“하지만 그런 적장도 끝까지 한니발 장군님께서 숨겨두신 복병을 발견하지 못했군요. 제가 적장이었다면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척후병을 한 번 보냈을 것 같은데 일군의 사령관이라는 자가 저렇게 성급하게 굴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적장 미누키우스가 실수를 저지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파비우스와 전공을 다투느라 시야가 좁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 적장이 경험에 오염된 자이기 때문이다.”
“네? 경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기스코는 고개를 돌려 한니발의 옆얼굴을 바라보면서 질문했다.
한니발은 언덕 기슭을 지나는 로마군에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로마 원로원이 군권을 맞길 정도면 적장도 그동안 제법 많은 전공을 쌓아온 자일 거다. 아마 북부 이탈리아에 사는 갈리아인과 전투를 벌여 여러 번 승리를 거둬왔겠지. 하지만 바로 그 경험 때문에 발밑의 함정을 볼 수 없었던 거다.”
“갈리아인은 매복 전술을 즐겨 사용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부 갈리아나 알프스를 넘을 때도 몇 번이나 적대적인 갈리아인 부족을 물리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갈리아인은 숲이나 산지 이외에 지형에서 싸울 때는 매복을 잘 시도하지 않는다.”
“아... 확실히... 알프스를 넘을 때 우리를 공격했던 갈리아인들은 병사들이 하나같이 덩치가 커서 그런지 덤불 같은 곳에는 복병을 잘 숨기지 않았었습니다.”
“잘 기억하고 있군. 그래서 적장 미누키우스는 자신의 경험만을 근거로 나무 한 그루 없는 구릉 지대에서는 복병을 숨길 수 없다고 속단해 버린 거다. 여기는 북부 이탈리아가 아니고 나는 갈리아인이 아니라 카르타고인인데도 말이다.”
“한니발 장군님과 하스드루발 장군님의 식견에는 늘 감탄하게 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차라리 적장이 햇병아리였으면 분명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언덕 주변에 정찰병부터 보냈겠군요.”
“그랬겠지. 그렇기에 장수는 배움을 멈추면 안 된다. 학자가 학문을 연구하듯 늘 새로운 전장과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숙지해야 하지. 배움을 멈춘 장수에게 경험은 무기가 아니라 언제가 자신과 부하들을 죽이게 될 맹독이다. 그 점을 절대 잊지 말아라.”
“명심하겠습니다. 이제야 한니발 장군님께서 젊은 나이에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신 비결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기스코의 말에 한니발이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아부는 전투가 끝나고 해라. 슬슬 적군이 우리 군의 사정거리에 들어오는군. 기스코. 전군에 사격명령을 내려라.”
“알겠습니다. 한니발 장군님.”
기스코는 한니발과의 대화를 마치고 허리춤에 매달아 놓은 뿔나팔을 들어 힘차게 불었다.
- 뿌우우우우우우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구릉 지대를 웅장한 뿔나팔 소리가 가득 메우자 발레아레스 투석병 4천 명과 크레타 궁수 2천 명이 언덕 아래에 있는 로마군을 향해 일제히 달걀만 한 납덩이와 화살을 발사했다.
- 쐐애애애애액!
수천 개의 납덩이와 화살이 슬링과 활시위에서 떠나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며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적을 향해 포물선을 그렸다.
미누키우스는 해일처럼 로마군을 덮쳐오는 화살과 납덩이를 보고 큰소리로 외쳤다.
“테스투도!”
부독재관의 명령은 순식간에 병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로마 군단병들은 재빠르게 스큐툼을 들어 올려 우박처럼 떨어지는 화살과 납덩이가 머리 위로 떨어지기 전에 거북이 등딱지 모양의 방어벽을 완성했다.
- 투두두둑! 텅! 텅!
두꺼운 나무 방패에 화살이 꽂히고 납덩이가 부딪치면서 둔탁한 타격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지만, 로마군의 비명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미누키우스는 자신의 병사들이 카르타고군의 사격에 잘 견디며 전진하는 것을 보고 기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한니발의 궁수들이 쏘는 화살은 방패와 갑옷을 꿰뚫는다더니 다 헛소문이었구나! 모두 계속 전진하라! 오늘이야말로 지겨운 전쟁을 끝내고 우리가 개선식의 주인공이 되는 거다!”
사령관의 호기로운 외침에 로마군은 사기가 올라 화살과 납덩이가 날아오는 전방을 주시하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한니발은 참을성 있게 적군이 복병을 숨긴 장소를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다 귀갑진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로마 군단병들이 언덕을 반쯤 올라왔을 때 기스코에게 소리쳤다.
“지금이다 기스코!”
기스코는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즉시 뿔피리를 다시 입에 물고 힘차게 두 번 불었다.
- 뿌우우우우우우 뿌우우우우우우
그 순간 한니발이 언덕 기슭 곳곳에 파여있는 구덩이와 그늘진 낮은 벼랑 밑에 숨겨놓은 북아프리카 중장보병과 갈리아인 귀족전사 2만 명이 일제히 로마군에게 달려들며 우렁찬 함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로마 군단병들은 신화에 나오는 용아병(龍牙兵)처럼 갑자기 땅속에서 철갑을 두른 적군이 솟아 나와 덤벼들자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으아악! 카르타고군의 기습이다!”
“적군이 몰려온다! 귀갑진을 풀고 검을 들어라!”
로마군의 백인대장들은 복병과 맞서 싸우기 위해 사령관의 명령을 기다릴 틈도 없이 백병전에 취약한 귀갑진을 풀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발레아레스 투석병과 크레타 궁수들은 사령관에게 미리 지시받은 대로 망토를 두르거나 화려한 색의 띠를 두른 로마군 장교들에게 조준 사격을 가했다.
- 쐐애애애애액!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납덩이와 화살이 날아갈 때마다 로마군 백인대장들이 얼굴과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순식간에 로마군 백인대장의 절반 이상이 전사해 버렸고 로마군의 지휘체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카르타고의 중장보병대는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적의 본대 측면에 마음껏 외날검 팔카타와 갈리아식 장검을 휘둘러 적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그 모습을 보고 우레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승기는 완전히 우리 쪽으로 기울었다! 이제 적의 배후를 포위해 한 놈도 이곳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기병대는 나를 따르라!”
말을 마친 후 한니발이 외날검 팔카타를 허리춤에서 뽑아들고 말을 달리자 4천 기의 기병이 장군의 뒤를 따라 흙먼지를 일으키며 언덕 아래의 적을 향해 돌진했다.
부독재관 미누키우스는 한니발의 기병대가 로마군의 배후를 공격하기 위해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급한 나머지 자신의 주변을 지키고 있는 릭토르들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내 호위는 됐으니 어서 파비우스 독재관님을 찾아가라! 당장 지원군을 불러오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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