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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27화 (127/201)

[ 127 ] [126화] 덫에 걸린 로마군 (4)

전투를 멈추라는 한니발의 명령에 카르타고군이 검을 거두자 이미 전의를 잃고 패주하기 직전이던 로마 군단병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령관의 명령에 하나같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왜 공격을 멈추는 거지? 로마군이 항복하기로 한 건가?”

“한니발 장군님께서 적장 미누키우스하고 결투를 벌이신대. 장군님께서 이기면 로마군은 항복하고 적장이 이기면 로마군을 모두 풀어 주기로 약속하셨다더라.”

“이 시점에 결투? 결투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하는 거 아니냐?”

“내가 어떻게 아냐? 한니발 장군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뭔가 깊은 뜻이 있겠지.”

바르카 가문의 장교들도 병사들과 같은 생각이었지만, 감히 한니발에게 의중을 캐묻지 못했다.

그런 하급장교들을 대신해 기병대장 아즈루바알이 결투를 하기 위해 방패를 고르는 한니발에게 물었다.

“한니발 장군님. 저는 장군님께서 왜 미누키우스의 도전을 받아 주셨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적을 섬멸할 수 있는데 수고를 마다하시지 않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즈루바알, 얼마 전에 하스드루발은 미누키우스가 이끄는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일부러 져 준 적이 있지. 내가 하스드루발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로마인들이 미누키우스를 전쟁영웅으로 여기도록 해서 지구전 주의자인 파비우스를 견제하는 게 목적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그런데 미누키우스가 허무하게 전사하고 파비우스는 자기 부대를 온존하면 로마의 여론이 어떻게 흘러가겠나? 로마의 평민파 정치인들은 또 구심점을 잃고 세력이 약해지겠지.”

“아···! 그렇게 되면 로마 시민 중에서 지구전에 찬성하는 자들이 늘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되겠지요!”

“그렇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미누키우스의 영웅다운 죽음을 연출해 로마인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 발레아레스 투석병이 던진 납덩이에 머리를 맞고 죽는 것보다는 나와 결투하다 아깝게 지는 편이 더 극적이겠지. 안 그런가?”

“이제야 한니발 장군님의 깊은 뜻을 알 것 같습니다! 로마의 평민들이 저 머저리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동안 파비우스가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겠군요! 로마인들은 완전히 두 형제분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게 되겠습니다!”

기병대장 아즈루바알은 한니발의 압도적인 무력을 지켜봐 왔기에 자신이 모시는 장군이 적장과의 결투에서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한니발의 안위를 걱정하는 대신, 사령관이 결투에서 승리한 후 로마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 말하며 감탄했다.

한니발은 어린아이처럼 감탄하는 기병대장 아즈루바알의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누키우스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겠군. 그럼 다녀오겠다.”

“무운을 빕니다, 한니발 장군님.”

한니발은 아즈루바알과의 대화를 마치고 외날검 팔카타와 튼튼한 나무에 코끼리 가죽을 덧대어 만든 둥근 방패를 들고 미누키우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수만 명의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침내 양 군의 사령관이 전투준비 자세를 취하자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우렁찬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우우

양군의 병사들은 마치 검투 경기를 구경하는 관객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자신의 장군을 응원했다.

“미누키우스 장군님! 힘내십시오!”

“바르카 가문의 수호신이신 멜카르트시여! 부디 한니발 장군님을 도와주소서!”

한니발과 미누키우스는 병사들의 환호성을 등에 업고 왼손에 든 방패로 몸을 가리고 오른손에 든 검을 수평으로 세워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눈앞의 적수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은 영역 다툼을 하는 맹수처럼 상대방의 방패 위로 드러난 머리와 어깨에 검을 내지를 기회를 엿보며 눈을 마주친 채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란스럽게 응원을 하던 양군의 병사들도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다물고 두 장군의 모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환호성으로 가득했던 황량한 구릉 지대에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져 병사들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양손으로 팽팽히 잡아당긴 고무줄 같은 긴장감을 먼저 끊은 것은 바로 도전자 미누키우스였다.

그는 갑자기 속도를 올려 한니발의 오른편으로 돌아가 왼손에 든 방패를 수평으로 들더니 테두리를 철로 둘러싼 방패의 아랫부분으로 적장의 옆구리를 찍으려 했다.

한니발이 재빨리 몸을 틀어 자신의 둥근 방패로 미누키우스의 직사각형 방패를 막았다.

―카앙!

미누키우스가 든 커다란 방패 스큐툼의 아랫부분이 한니발의 방패 한가운데 박혀 있는 철심에 부딪히면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미누키우스는 거기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자신보다 키가 큰 한니발의 목을 향해 로마군의 검 글라디우스를 내질렀다.

한니발은 적장의 공격에 재빨리 대처할 수 있었지만, 짐짓 당황한 척하며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미누키우스의 공격을 피했다.

미누키우스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며 한니발의 볼을 가리고 있는 철제 투구에 스치자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채앵!

살아남은 로마군 병사들은 자신들의 사령관이 선전하자 일제히 우레같은 환호성을 질러 댔다.

“와아아아아아아! 미! 누! 키우스! 미! 누! 키우스! 미! 누! 키우스!”

“적장은 덩치만 커다랬지 우리 부독재관님의 상대도 안 되는구만!”

반면 바르카 가문의 장교와 병사들은 의외로 한니발이 적장에게 고전하자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급장교 기스코는 미누키우스의 검이 종이 한 장 차이로 한니발의 목에서 빗겨 나가는 장면을 보고 떨리는 목소리로 기병대장 아즈루바알에게 말했다.

“아··· 아즈루바알 기병대장님. 명예로운 행동은 아니지만, 지금이라도 결투를 중단시키고 로마군을 전멸시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저러다가 한니발 장군님께서 봉변을 당하시겠습니다!”

“기스코. 군 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이 년이 다 되어 갈 텐데 아직도 한니발 장군님을 잘 모르는구나. 장군님의 표정을 자세히 봐라. 고전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치고는 여유가 넘치지 않나?”

“확실히 평소처럼 침착한 눈빛을 하고 계시군요.”

“잘 봤다. 장군님께서는 아야몬테를 공격하다 군량이 떨어져서 처음으로 식사로 나온 순무를 눈앞에 두셨을 때 오히려 지금보다 더 비장한 표정을 지으셨지. 언뜻 봐도 적장의 검술 실력은 한니발 장군님의 발끝에도 못 미치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

“그럼 지금 한니발 장군님께서 결투가 아닌 연기를 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적장을 죽어서도 전쟁영웅으로 남게 해 로마 원로원의 지구전 주의자들을 견제하실 생각이시지.”

“정말 무서운 분이십니다··· 적장은 한니발 장군님께 순무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은 걸 알게 되면 수치심에 혀를 깨물고 죽을지도 모르겠군요.”

“그 전에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없겠지. 영웅의 죽음으로는 자살보다는 전사가 더 어울리니까 말이다.”

한니발은 그 후로도 몇 번 위기를 맞았다가 간신히 벗어나는 장면을 연출했다.

미누키우스는 자신이 완전히 한니발을 압도했다고 생각하고 세가 올라 적장을 바라보며 호기롭게 외쳤다.

“하밀카르가 로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자 새끼들을 길러 냈다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덩치 큰 고양이일 뿐이었구나!”

그는 과감하게 방패를 휘둘러 한니발을 뒤로 밀쳐냈다.

한니발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척하며 일부러 옆구리에 빈틈을 드러냈다.

미누키우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니발에게 접근해 그가 입고 있는 흉갑 모양 두정갑 위로 글라디우스를 내질렀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칼날은 한니발의 옆구리에 박히지 않고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튕겨 나왔다.

―챙!

가죽이나 천 옷 안에 철편을 못 박은 두정갑은 로마군이 주로 사용하는 사슬갑옷과는 달리 베는 공격보다 찌르는 공격에 더 강하다.

그 사실을 알 길이 없었던 미누키우스는 한니발이 던진 미끼를 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누키우스는 그저 징 박은 가죽 갑옷으로 생각하고 있던 적장의 갑옷이 자신의 회심의 일격을 막아 내자 크게 당황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그만 지루한 연극을 끝낼 생각이었다.

그는 미누키우스가 뒤로 물러나기 전에 왼손에 들고 있는 방패를 크게 휘둘러 적장의 옆통수를 세차게 후려쳤다.

―카앙!

청동 투구와 방패의 철심이 부딪치면서 둔탁한 타격음이 울려 퍼지자 미누키우스가 나무꾼의 도끼를 맞고 쓰러지는 나무처럼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투구 위로 공격당했다고는 해도 한니발의 온 힘을 다한 공격에 뇌진탕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한니발은 미누키우스가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고 쓰러져 있는 적장의 목을 검으로 찔렀다.

4만 명이 넘는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수세에 몰리던 사령관이 결투에서 승리하자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 댔다.

“와아아아아아아! 한니발 장군님께서 승리하셨다!”

“이번 원정이 여기서 끝나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다고!”

반면 로마 시민권을 가진 로마군 병사들은 무기를 손에서 놓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들은 한니발이 그동안 포로로 잡은 로마 시민권자를 모두 그리스나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들에게 노예로 팔아 버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카 가문의 장교들이 한니발의 주변으로 몰려가 장군의 승리를 축하했다.

“한니발 장군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결투가 너무 아슬아슬해서 보다가 졸도할 뻔했습니다! 위기에 몰려서도 한순간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한니발은 가만히 장교들의 면면을 바라보다가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는 다른 장교들과는 달리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기병대장 아즈루바알과 눈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이 자리에서 내 의도를 알고 있는 건 자네뿐인 것 같구나.”

“직접 언질을 주시지 않는 이상 장군님의 깊은 속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군에서 하스드루발 장군님뿐일 겁니다.”

“안타깝지만, 자네 말이 맞을 거다. 그건 그렇고 이번 전투에서 잡은 포로는 전부 몇 명이나 되는지 조사해 두었나?”

“총원 오천 명 정도고 그중 로마 시민권자는 이천 명 정도입니다.”

“생각보다 로마군 전사자가 많은 모양이군. 포로 중 동맹도시 출신 보조병은 모두 풀어 주고 로마 시민권자는 언덕 밑에 있는 공터에 모아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장군님.”

기병대장 아즈루바알은 한니발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포로 중 로마인들의 무장을 해제한 후 언덕 아래의 공터로 끌고 가 한곳에 모아 두었다.

모든 로마 시민권을 가진 포로가 공터에 모이자 한니발이 노예로 팔려 가는 줄 알고 울먹이는 로마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전투 중 허벅지에 화살을 맞는 바람에 다리를 저는 로마군 대대장 한 명이 그의 앞으로 나서며 그리스어로 말했다.

“한니발 장군님. 부디 저희에게 선처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희를 풀어 주신다면 로마에서 눈물짓고 있는 저희들의 가족이 장군님께 노예 상인보다 좋은 값을 치를 겁니다!”

그러자 한니발이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부드러운 말로 로마군 대대장을 달랬다.

“비록 적으로 만났지만 미누키우스는 위대한 장군이었다.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로마 시민에게 위대한 장군의 용맹했던 모습을 전하기 위해 이번에는 특별히 너희를 조건 없이 해방하겠다. 곧 미누키우스 부독재관의 장례식을 진행할 테니 너희는 장례식이 끝나는 대로 명장의 시신을 로마로 정중하게 모시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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