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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28화 (128/201)

[ 128 ] [127화] 파비우스의 수난

“파비우스 독재관님께 보고드립니다. 부독재관 미누키우스 님 휘하의 3군단과 4군단이 남동쪽의 구릉 지대에서 카르타고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전멸했습니다.”

위기에 빠진 미누키우스의 군대를 구하러 가던 파비우스는 정찰을 보낸 기병의 보고가 도저히 믿기지 않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정찰병에게 물었다.

“올림포스의 왕이신 유피테르께 맹세코 확실한 정보인가···?”

“제 두 눈으로 적장 한니발의 군대가 군단병의 복장을 갖춘 포로 약 이천 명을 데리고 게루니움으로 행군하는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말도 안 돼··· 미누키우스는 전략에 어둡지만, 전술 지휘 능력이 부족한 장수는 아니다. 그런데 양군의 숫자가 비슷한 상황에서 이렇게 빨리 적에게 당했다고?”

“게루니움으로 복귀하는 카르타고군은 언뜻 보아도 4만 명이 넘어 보였습니다.”

“그럴 리가? 적장 한니발은 게루니움에 수비군을 배치하고 복병을 숨기느라 미누키우스를 공격하는 데 그렇게 많은 병사를 동원할 여유가 없었을 텐데?”

그때 파비우스의 옆에서 말을 타고 행군하고 있던 장교들 중에서 스키피오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건넸다.

“저··· 독재관님. 혹시 카르타고군은 강변에 복병을 숨기지 않았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파비우스를 호위하고 있던 릭토르 중 한 명이 흥분하면서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스키피오 기병대장님께서도 강 건너에서 다리를 막아서는 적장 하스드루발을 똑똑히 보지 않으셨습니까! 설마 한니발이 자기 동생에게 호위병도 붙여 주지 않고 이만 명이 넘는 적군을 막아서게 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주변에 있는 다른 릭토르와 장교들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깊은 한숨을 쉬며 스키피오의 말에 동의했다.

“하아··· 스키피오 기병대장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카르타고군이 게루니움에 수비병을 배치한 건 이미 확인했지. 지금 행방이 묘연한 건 하스드루발이 지휘하고 있어야 할 부대뿐이다. 바르카 가문의 두 형제가 모두 교활하기 짝이 없구나. 머리 두 개 달린 뱀에게 발목을 제대로 물렸어.”

독재관의 말에 다른 장교들도 부정하고 싶었던 현실을 받아들이고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스키피오는 아마도 지금쯤 하스드루발이 쉬고 있을 게루니움 쪽을 바라보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일군의 부사령관쯤 되는 인물이 그토록 무모한 짓을 하다니··· 카르타고인들의 생각은 도저히 읽을 수가 없구나······.”

파비우스는 하는 수 없이 말머리를 뒤로 돌리며 휘하의 장교들에게 말했다.

“다시 북서쪽으로 돌아간다. 산맥 기슭에 숙영지를 짓고 다시 카르타고군의 동태를 감시한다. 아무래도 올해 우리가 조국 로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일 것 같다.”

독재관의 명령에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배한 로마 군단병들은 참담한 표정으로 험준한 아펜니노 산맥을 향해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 * *

파비우스가 아펜니노 산맥의 험한 산기슭에 숙영지를 짓고 있을 때 한니발은 게루니움 근처의 강변에 휘하의 장교와 병사를 모두 집합시킨 후 미누키우스의 장례식을 진행했다.

한니발은 로마군 포로 5천 명을 모두 풀어 주었지만, 그중 1천 명이 넘는 로마 시민권자 출신 로마 군단병이 카르타고군을 따라와 장렬하게 전사한 장군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한니발은 휘하의 병사들을 시켜 미누키우스의 시신에서 갑옷을 벗기고 대신 깨끗한 자주색 천으로 만든 토가를 입혔다.

로마에서 자주색 옷을 수의로 입고 장례식을 치를 수 있는 자는 최고위 관직인 감찰관을 지낸 자뿐이었다.

로마의 패잔병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장이 미누키우스에게 보이는 정중한 예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장작을 네모반듯하게 쌓아 올린 다음 그 위에 자색 옷을 입힌 미누키우스의 시신을 올리고 그의 입속에 저승의 뱃사공 카론에게 노잣돈으로 줄 은화를 넣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한니발이 엄숙한 표정으로 횃불을 들고 장작 옆에 서 있는 병사에게 명령했다.

“불을 붙여라.”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는 조심스럽게 손에 든 횃불을 장작더미에 가져다 댔다.

곧 제단 모양을 본떠 가지런히 쌓아 올린 장작더미와 그 위에 놓인 미누키우스의 시신이 화염에 휩싸였다.

그러자 로마군 패잔병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자가 그 앞에 서서 신에게 올리는 기도문을 읊조리며 로마식 장례의식을 진행했다.

로마군 병사들은 그동안 존경해 온 장군이 불길 속에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구슬프게 흐느꼈다.

마침내 불길이 사그라들고 장례의식이 끝나자 한니발은 미리 준비해 둔 순은으로 만든 항아리에 그의 유골을 담은 후 그 위에 뚜껑 대신 금으로 만든 월계수 모양 관을 씌웠다.

그는 적장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를 직접 로마군 장교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내가 입었던 갑옷이 튼튼하지 않았다면 이 항아리에 담긴 건 내가 됐을 수도 있겠지. 이제 로마로 돌아가라. 가서 너희 동포들에게 위대한 장군이 명예롭게 싸우다 너희가 섬기는 신들의 곁으로 떠났다고 전해라.”

로마군 패잔병들은 한니발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아펜니노 산맥의 고갯길을 향해 힘없이 걸어갔다.

그 모든 과정을 묵묵히 지켜본 바르카 가문의 가정교사 실레노스는 그날 저녁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 로마 원정기의 집필을 이어 나갔다.

‘지혜로운 적장 파비우스와 어리석은 적장 미누키우스는 서로 반목하다 결국 바르카 가문의 두 형제가 세운 책략에 넘어가고 말았다.

파비우스는 단신으로 2만 대군을 막아선 하스드루발 장군의 대담한 전략에 속아 적과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장이 되었고 어리석은 미누키우스는 한니발 장군과의 결투에서 패해 끝내 전장에 자신의 피를 흘리고 말았다.

한니발 장군은 로마인들 간의 반목을 부채질하기 위해 미누키우스를 정중하게 화장하고 그의 유골을 로마군의 패잔병 손에 들려 로마로 돌려보냈다.

이제 미누키우스의 몸을 태운 불꽃은 사그라졌다.

그러나 그의 유골이 로마의 일곱 언덕을 둘러싼 세르빌리우스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로마 시민들의 가슴에 거짓된 영웅을 잃은 슬픔과 현명한 겁쟁이에 대한 증오의 불꽃이 다시 타오를 것이다.’

* * *

기원전 217년 11월 초.

미누키우스의 유골을 지닌 로마군의 패잔병들은 아피아 가도 위를 쉬지 않고 걸은 끝에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다.

그들이 원로원에 보고하기 위해 마르스 광장을 지날 때 수많은 로마 시민들이 그들의 주변에 모여들어 사정을 물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군단병이 장군의 인솔도 받지 않고 로마 시내로 들어오는 겁니까?”

시민들의 질문에 패잔병들을 인솔하던 장교는 끝내 참아 왔던 눈물을 터뜨리며 로마 원로원에 보고하기 전에 먼저 군중들에게 비보를 알렸다.

“미누키우스 부독재관님께서 전사하셨습니다! 전황이 불리한 와중에도 거구의 적장과 정정당당한 결투를 벌이셨지만, 안타깝게도 영웅다운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로마 시내는 미누키우스가 전사했다는 소식에 큰 충격에 빠져들었다.

패잔병들은 한바탕 크게 울어 모시던 장군을 잃은 슬픔이 조금 가라앉자 이제는 성난 목소리로 시민들에게 외쳤다.

“미누키우스 부독재관께서는 일찌감치 쿵크라토르에게 지원군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노욕에 찌든 탐욕스러운 늙은이는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정적을 제거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자는 함정에 빠진 아군이 적에게 살해당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습니다!”

“존경하는 로마 시민 여러분! 부디 쿵크라토르의 악행을 벌해 주십시오! 그 늙은 괴물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이만 명의 아군 병사와 적장조차 인정한 로마의 영웅이 적의 손에 죽도록 내버려 둔 반역자입니다!”

1천 명의 패잔병들은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로마에 심어 놓은 수십 명의 첩자보다 훨씬 열정적으로 로마 시내 곳곳을 누비며 죽은 미누키우스의 용맹을 찬양하고 파비우스의 비겁함을 비난했다.

그로부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미누키우스를 잃은 슬픔에 잠겼던 로마 시민들의 가슴은 독재관 파비우스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올랐다.

수천 명의 과격한 시민이 횃불과 망치 따위를 손에 들고 파비우스 가문의 저택 앞으로 몰려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반역자에게 죽음을!”

“비열한 음모가의 집을 불태워라!”

로마 원로원은 법치국가 로마에서 아직 재판도 받지 않은 독재관의 집에 폭도들이 불을 지르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에 급히 수도방위군을 급파해 그의 집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중무장한 수도방위군 군단병들에게 돌을 던지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비켜! 너희들의 가족 중에도 쿵크라토르 때문에 죽은 사람이 있을 거 아니야!”

“미누키우스 장군님의 원수를 갚게 내버려 두라고!”

파비우스 가문의 저택으로 몰려간 폭도들보다 교양있는 대부분의 로마 시민들도 독재관을 증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파비우스의 저택 대신 카피톨리노 언덕을 올라 원로원 의원들이 회의를 열고 있는 쿠리아 호스틸리아로 몰려갔다.

곧 수만 명의 시위대가 웅장한 로마 원로원의 의회 건물을 포위하듯 둘러싼 후 로마의 일곱 언덕이 떠내려갈 듯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독재관 파비우스를 탄핵하고 사형을 선고해라!”

“쿵크라토르를 죽여 영웅 미누키우스의 넋을 달래라!”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시민들의 성난 외침을 들으며 의회 건물 안에서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져들었다.

귀족파의 중진의원인 스키피오의 장인 아이밀리우스가 근심으로 가득한 얼굴로 동료 의원들에게 물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미누키우스 부독재관님께서 전사하시고 두 개의 군단이 전멸하는 손실을 입은 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독재관을 탄핵하라니요?”

평민 출신이지만 평소 파비우스와 가깝게 지내온 마르켈루스도 입을 열었다.

“지금은 모든 로마 시민이 하나로 뭉쳐 강력한 적에게 맞서 싸워야 할 때이지 마치 카르타고인처럼 패장의 잘잘못을 가릴 때가 아닙니다. 애초에 패장을 처벌하지 않는 것이 우리 로마의 오랜 전통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원로원은 로마의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독재관을 탄핵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자 평민파의 중진의원이자 법무관인 바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마르켈루스에게 언성을 높였다.

“존경하는 마르켈루스 의원님! 패장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전통은 최선을 다해 적과 싸우고도 안타깝게 패배한 지휘관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지레 겁을 먹고 싸워 보지도 않고 적에게 포위당한 아군을 외면한 자에게는 그 전통을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뭐요? 바로 법무관님! 법무관님께서도 파비우스 독재관님께서 평소 지구전 전략을 주장해 오신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독재관님께서는 적장 한니발에게 겁먹고 도망치신 게 아니라 전략적 후퇴를 하신 겁니다!”

“그럼 밖으로 나가서 쿠리아 호스틸리아를 포위한 시민들에게도 한번 그렇게 말씀해 보십시오. 그래서 시민들이 물러난다면 저도 제 뜻을 굽히겠습니다.”

마르켈루스는 법무관 바로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주먹으로 애꿎은 탁자만 내리쳤다.

아이밀리우스는 그런 동료들을 말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 모두 진정하십시오. 두 분의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마르켈루스 의원님 말씀대로 시위대의 말을 그대로 들어주면 공화정 로마의 법치주의가 무너지겠지요. 그렇다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바로 법무관님 말씀대로 카르타고군이 아니라 우리 로마 시민들의 손에 신성한 카피톨리노 언덕이 모두 불타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에 바로가 되물었다.

“그럼 존경하는 아이밀리우스 의원님께서는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이라고 보십니까?”

“원로원이 독재관을 파면할 수는 없지만, 사임을 ‘권고’할 수는 있습니다. 애국자이신 파비우스 독재관님은 로마 시내의 사정을 알리고 사임을 권하면 거절하시지 않을 겁니다. 대신 사형이 아닌 추방형을 선고한다는 조건을 걸면 파비우스 가문을 지지하는 저 같은 시민들의 불만도 최소화할 수 있겠지요.”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만장일치로 아이밀리우스의 의견에 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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