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 [128화] 겨울을 보내며
기원전 217년 10월 말.
파비우스는 독재관직을 사임하라는 원로원의 권고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은 파비우스를 지켜 주던 독재관의 권력이 사라지자 시민들의 바람대로 그에게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친 혐의를 적용해 추방형을 선고했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로마에 심어 둔 첩자들은 즉시 게루니움에서 한창 겨울을 날 준비에 매진하고 있는 로마 원정대에 서신을 보내 그 사실을 알렸다.
한니발은 지휘관 막사에서 첩자가 보낸 서신을 읽은 후 턱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추방형인가··· 사형이 아니고 추방형이란 말이지.”
그의 주변에 있던 바르카 가문의 가신들은 평소 말수가 적은 한니발의 속내를 잘 읽지 못했지만, 그가 뭔가 고민하고 있을 때 턱수염을 만지는 버릇이 있다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한니발에게 그동안 집필한 로마 원정기의 초고를 보여 주고 있던 실레노스는 고민하는 제자에게 말했다.
“아마 파비우스에 대한 첩보문서를 읽으신 모양이군요. 너무 걱정 마십시오. 명예를 중시하는 로마인에게 추방형은 사형에 버금가는 중형입니다. 추방형이 선고되면 단순히 로마 시내에서 살 수 없게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시민권이 박탈되지요.”
“그건 나도 알고 있네. 파비우스의 정치생명은 여기서 끝났다고 봐도 되겠지. 그저 이유 없이 꺼림칙한 기분이 들 뿐이라네.”
“이번 전쟁이 시작된 뒤로 로마는 농지를 많이 잃는 데다 장정을 많이 잃었습니다. 지중해 최강국을 자처하는 셀레우코스 제국이나 이집트도 이 정도로 큰 피해를 입는다면 제국을 유지하지 못했겠지요.”
“자네 말대로네. 아직도 저항하는 로마인들의 저력이 놀랍긴 하지만, 내년에 대규모 회전에서 한 번만 더 승리하면 로마 원로원도 우리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겠지.”
하스드루발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속으로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까지 짧은 기간 동안 로마에 원 역사보다 더 큰 타격을 입혔으니 한니발 형의 예견대로 내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로마가 내년에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의 플랜 B도 생각해 둘 필요가 있어.’
현재 로마는 한니발의 군대가 알프스를 넘은 이후 지중해 곳곳에서 카르타고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12만 명이 넘는 병력을 잃었다.
기원전 3세기인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겨우 2년 동안 이 정도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는 단 하나도 없었다.
내년이면 전쟁이 끝날 거라는 한니발과 실레노스의 판단이 근거 없는 낙관론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 역사의 로마는 2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면서 30만 명이 넘는 병사를 잃고도 결국 한니발에게 승리했고 현재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하스드루발뿐이었다.
그는 만약 내년에 예정대로 칸나에에서 큰 승리를 거둬도 로마가 항복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하고자 했다.
“형하고 실레노스 말대로 되면 가장 좋겠지만, 로마가 내년에 회전에서 지고도 버티는 경우에 대한 대비책도 세워 두는 편이 좋겠어.”
“그런 경우에는 남부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지금까지처럼 우리에게 적대적인 마을을 습격하면서 로마연합이 무너지길 기다리면 될 거다.”
“내 생각도 형하고 비슷하지만, 그 전략이 성공하려면 여러 도시에 수비병력을 배치해야 돼. 야전군도 지금처럼 대부대 하나를 운영하는 대신 여러 소규모 부대를 조직할 수밖에 없겠지. 그러다 보면 곳곳에서 국지전이 벌어져서 점점 우리의 병력이 줄어들게 될 거야.”
“전쟁이 그 정도로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지는 않을 것 같지만, 네 말은 항상 잘 맞아 왔으니까 무시하기 어렵구나. 그런 상황에서 점점 줄어드는 병력을 본국에서 보충하려면 제해권 확보가 필수겠군.”
“맞아.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아버지가 육로로 보내 주시는 수송대가 로마군에게 차단당할 확률이 크니까. 제해권은 무조건 확보해야지. 그러려면 시칠리아에 군항을 확보해야 하고.”
“하지만 지금 당장 시칠리아를 점령하는 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잖아? 그 일은 본국의 해군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어.”
“우리가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에 상륙할 수는 없지만, 시라쿠사에 공작원을 보내서 친카르타고파 세력을 조성할 수는 있을 거야. 시칠리아에서 제일 큰 나라가 우리 편이 되면 서지중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도 꿈은 아니지.”
한니발은 동생의 말을 듣고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네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시라쿠사의 히에론 왕은 절대 로마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히에론 왕은 벌써 아흔이 다 돼 가. 길어야 앞으로 한두 해 정도 더 살겠지. 그리고 다음 시라쿠사의 왕은 로마를 배신하고 우리와 동맹을 맺으려고 할 가능성이 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뭐야?”
“히에론 왕은 너무 장수하는 바람에 아들이 죽고 손자 히에로니무스가 후계자가 됐는데 그 친구가 야심이 대단하대. 그리고 평소 어머니 쪽 핏줄이 피로스 왕의 후손인 걸 굉장히 자랑하고 다닌다고 들었어.”
원 역사의 시라쿠사 왕 히에론은 칸나에 전투가 끝난 바로 다음 해인 기원전 215년에 노환으로 91세에 사망한다.
그는 자신이 나라를 다스린 56년 동안 일관되게 로마와 우호관계를 다져 왔지만, 히에로니무스는 할아버지에게 시라쿠사의 왕위를 물려받자마자 로마를 배신하고 한니발과 동맹을 맺는다.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이 보여 준 영웅적인 활약에 깊은 감명을 받은 데다 카르타고군의 도움을 받아 시칠리아에서 로마군을 몰아내고 섬 전체를 다스리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즉위 당시 겨우 15살이었던 히에로니무스는 친로마파 신하들의 반란을 막지 못하고 암살당하고 만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하스드루발은 지금부터 시라쿠사에 친카르타고파 시민의 세력을 은밀히 키워 앞으로 2년 후에 왕이 될 히에로니무스를 친로마파의 비수로부터 지켜 낼 생각이었다.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고 그에게 대답했다.
“손쉽게 제해권을 차지할 가능성이 있다면 어느 정도 노력은 해 봐야겠군. 그리스인들은 혈통을 굉장히 중시하니 네 말대로 히에로니무스가 피로스 왕의 핏줄이면 왕위에 오르고 나서 우리 편을 들지도 모르겠어. 곧 시칠리아 출신 공작원을 시라쿠사로 보낼게.”
“좋은 생각이야. 본국에 계신 보밀카르 매형에게도 서신을 보낼게. 본국의 해군도 시칠리아를 공격할 준비를 미리 해 둘 필요가 있을 테니까 말이야.”
* * *
기원전 217년 11월 초.
지중해에 다시 겨울이 찾아오자 카르타고와 로마 양측의 병사들은 살을 에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숙영지에 틀어박혔다.
그러나 병사들이 모닥불 근처에 모여 빵을 굽고 포도주를 마시며 쉬는 와중에도 바르카 가문의 사람들과 카르타고 정부의 관리들은 타도 로마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한니발은 동생과 함께 이탈리아 중남부의 게루니움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지중해 전체를 담은 지도를 바라보며 다음 전투를 벌일 장소와 공작원이나 외교관을 파견할 나라를 정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하스드루발은 동절기에 짬짬이 새로운 무기나 전쟁물자를 고안해 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그는 가장 먼저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을 괴롭히고 있는 괴혈병을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올해 괴혈병으로 고생하는 병사가 은근히 많았지. 게루니움을 점령하면서 꽤 많은 과일을 전리품으로 얻어 올해는 어떻게든 위기를 넘겼지만, 내년에는 괴혈병으로 죽는 병사도 생길지도 몰라. 안 그래도 우리는 병사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인데 영양부족으로 전력이 줄어들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인류는 상당히 오랫동안 괴혈병을 일종의 전염병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괴혈병은 사실 몸에 비타민 C가 부족하면 인체 조직에 쉽게 출혈이 발생하게 되는 병으로 근대 초기까지도 많은 선원이나 탐험가가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전장에 나선 병사들은 간혹 현지에서 약탈한 신선한 채소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선원보다야 사정이 나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휘관이 보관과 운송이 쉬운 밀가루 위주의 식량을 병사들에게 배급했기 때문에 전쟁이 길어질수록 괴혈병에 걸리는 병사가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고대에는 당연히 비타민 C 알약 같은 걸 만들 수는 없을 거고 과일을 오래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아직 유리가 보석으로 취급받는 시대이니 병조림은 어렵겠고··· 잼을 만들어 볼까?’
인류 역사상 최초의 잼은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원정 과정에서 전리품으로 얻은 설탕을 사용해 만든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고대의 설탕은 고가품이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배급할 식량을 만드는 데 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하스드루발은 설탕 대신 꿀로도 잼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먼저 게루니움 인근에서 항아리 장인을 고용해 한 손으로 어렵지 않게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항아리를 여러 개 만들게 했다.
그 후 하스드루발은 병사 몇 명을 불러다 사과잼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며 작업을 지시했다.
“사과를 잘게 썰어서 꿀과 10대8 비율로 솥에 넣고 거품을 숟가락으로 걷어 내면서 계속 끓여라. 사과의 형태가 많이 풀어지면 그때 식초를 조금 넣으면 된다.”
“또 뭔가 신기한 군용 식량을 개발 중이신 모양이군요. 하스드루발 장군님.”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번에 만들 물건의 용도는 굳이 따지자면 보존식보다는 약에 가깝겠지.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작업 내용은 간단하니 어렵지는 않을 거다.”
병사들이 지시대로 모든 작업을 마치자 그는 잼이 식기 전에 항아리에 넣고 밀랍으로 잘 밀봉한 뒤 상온에서 식혔다.
하스드루발은 모든 과정을 마치고 사과잼을 한 숟가락 떠서 먹어 보았다.
“성공이다! 전생에 먹던 거하고 맛이 거의 똑같아!”
그는 고생한 병사들에게도 잼을 조금 나눠 준 후 기쁜 마음으로 지휘관 막사에 있는 한니발을 찾아가 자신의 성과를 자랑했다.
“형! 이거 봐! 내가 괴혈병을 예방할 수 있는 음식을 만들었어!”
하스드루발은 사과잼이 담긴 항아리를 한니발에게 내밀며 잼의 용도와 제조 방법을 설명했다.
한니발은 잼이 괴혈병을 막을 수 있다는 동생의 말을 의외로 쉽게 이해했다.
“확실히 ‘하루에 사과 한 개를 꾸준히 먹으면 의사를 찾아갈 일이 없다.’는 말이 있지. 시험해 봐야 알겠지만, 네가 만든 과일잼이라는 음식이 괴혈병 예방에 도움이 될 것 같구나! 금보다 비싼 설탕을 쓰지 않고 값싼 꿀을 써서 만들 생각을 해낸 것도 정말 훌륭하다!”
하스드루발은 형의 칭찬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한니발은 그런 동생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가끔 네가 바알 함몬께서 내려 주신 지혜를 전쟁이 아니라 문화와 과학의 발전에 모두 쏟고 카르타고의 상인들이 세상 끝까지 네가 이룩한 성과를 전파하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진다. 분명 지금보다는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겠지.”
“그건 로마를 정복하고 나면 알 수 있겠지. 일단 이번 전쟁을 빨리 끝내는 일에 집중하자. 카르타고 노바에 계신 형수님 품에 안겨 있을 조카도 전장에 나서는 미래는 정말 끔찍할 테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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