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 [129화] 대망의 칸나이 전투 (1)
기원전 216년 3월 초.
집정관 선거를 앞둔 로마 시내에는 끓는 솥에서 뜨거운 물이 넘치듯 모든 거리와 광장에서 정치인들의 열변이 흘러넘쳤다.
귀족파 원로원 의원들은 청야 전술을 시행해 온 전직 독재관 파비우스가 로마에서 추방된 마당에 시민들 앞에서 지구전 전략을 지속하자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 대한 대책을 내놓는 대신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공적을 세웠고 얼마나 좋은 가문의 출신인지를 강조하며 유권자들에게 귀중한 한 표를 달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아직도 전쟁영웅 미누키우스를 잊지 못한 로마 시민들의 귀에 평소 별로 관심 없는 귀족 출신 집정관 후보자가 얼마나 좋은 가문 출신 도련님인지 따위를 설명하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뛰어난 선동가인 평민 출신 법무관 바로는 경쟁자의 실책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그는 카피톨리노 언덕 근처에 있는 로마의 시민광장 포룸 로마눔에 연단을 설치한 후 그 위에 올라 자신의 주변에 모여든 시민들에게 외쳤다.
“존경하는 로마 시민 여러분! 지금 원로원의 귀족들은 마치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그들의 위대한 선조와 자신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신의 핏줄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고명하신 명문 귀족들께서 자기가 반신(半神)이라고 우겨 대도 놀라지 않을 겁니다!”
그리스나 로마의 왕족과 명문 귀족 중에는 자기 가문의 시조가 올림포스의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이라고 여기는 자가 많았다.
바로가 그 점을 비꼬아 뼈있는 농담을 하자 포룸 로마눔에 모인 수천 명의 시민들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푸흐흐흡! 반신반인씩이나 되는 분들이 반년 동안 한니발의 그림자만 보여도 도망치기 바빴나?”
“크크크킄! 확실히 명문 귀족 중에는 신의 혈통이 아닌 자가 거의 없긴 하지!”
청중의 이목을 한 번에 끈 바로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과 목소리로 대중을 설득해 나갔다.
“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존경하는 로마 시민 여러분께 내세울 만한 가문 출신은 아닙니다! 저는 그저 천한 백정의 아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가문의 지원 없이 오직 저의 능력으로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명예로운 경력을 발을 들인 후 지금은 법무관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때 광장 한가운데에서 꾀죄죄한 튜닉을 입은 서른 명 정도 되는 시민들이 바로를 비난하며 소란을 피웠다.
“그래서 어쩌라고! 네가 돌아가신 플라미니우스 전 독재관님이나 미누키우스 부독재관님보다 대단한 인물이라도 된다는 거냐?”
“돼지나 잡는 백정 아들내미가 좀 출세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보지?”
난동꾼들의 정체는 그의 유세를 방해하려고 귀족파 원로원 의원들이 보낸 하수인들이었다.
귀족파의 하수인들은 바로보다도 더 입지전적인 평민 출신 정치인들도 결국 한니발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일깨워 그의 지지율을 떨어트리고자 했다.
곧 포룸 로마눔은 무리 지어 웅성거리는 로마 시민들의 불안한 목소리로 가득 찼다.
“나도 바로 법무관을 그동안 지지해 오긴 했는데··· 이 시국에 저 사람한테 집정관을 맡기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그러게··· 집정관을 몇 번이나 역임하고 개선식까지 치른 플라미니우스 전 독재관님도 한니발을 당해 내지 못했잖아. 괜찮은 인물인데 아직 경험이 부족해.”
바로는 자신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곧바로 정적들의 수작에 대응했다.
“확실히 플라미니우스 전 독재관님이나 미누키우스 전 부독재관님은 저보다 뛰어난 지휘관이셨습니다. 두 분 다 생전에 전장에서 우리 로마의 역사에 남을 위대한 승리를 거두셨지요. 그럼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장군도 적장 한니발에게 패했으니 우리 로마의 군단은 절대로 카르타고군과 싸워 이길 수 없는 겁니까?”
그러자 격분한 로마 시민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헛소리! 로마군은 무적이다!”
“카르타고의 용병 나부랭이에게 군단병이 질 리 없다!”
바로는 시민들이 자신이 예상한 반응을 보이자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적장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확실히 뱀처럼 교활한 자들입니다! 그동안 우리 로마의 명장들이 전장에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건 용맹이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귀족파의 방해로 너무 적은 병사만 이끌고 풀숲에 숨은 카르타고의 독사를 찾다 독니에 발목을 물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로마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었던 말을 하는 바로의 말에 집중했다.
로마의 평민들은 평민의 자랑인 푸블리우스와 미누키우스는 결코 능력이 부족해서 진 게 아니라 너무 적은 병력으로 강력한 적과 싸웠기 때문에 신화에 나오는 영웅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고 믿고 싶었다.
바로는 그 점을 잘 이해하고 선거유세에 영리하게 이용했다.
“존경하는 로마 시민 여러분! 언제까지 북아프리카의 독사들이 로물루스의 후손을 얕잡아 보도록 내버려 두실 겁니까? 저를 집정관에 당선시켜 주신다면 오백 년이 넘는 우리 로마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대군을 조직하겠습니다! 하밀카르가 사자의 자손이라고 칭한 적장 한니발을 네메시스의 사자를 때려잡은 헤라클레스처럼 무찌르겠습니다! 전 지중해에 아무도 우리 로마를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겠습니다!”
바로의 열정적인 연설에 포룸 로마눔에 모인 시민들은 우레같은 환호성으로 대답했다.
“로마 인빅타(정복되지 않는 로마)!”
귀족파의 하수인들은 눈치를 보다 시민들의 함성을 뒤로한 채 조용히 광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열린 선거에서 바로는 평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정치적 동지인 전직 호민관 메틸리우스와 함께 기원전 216년의 집정관에 당선됐다.
* * *
로마의 선거가 끝나고 약 이주일 뒤 여전히 게루니움에서 지내고 있는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에게 전해졌다.
한니발은 첩자가 보낸 서신을 읽은 후 지휘관 막사에 모든 장교들을 소집한 후 그 소식을 전했다.
“놀랍게도 얼마 전에 새로 선출된 로마의 집정관 두 명이 모두 평민 출신이라고 한다. 법무관을 지낸 바로와 호민관을 지낸 메틸리우스라는 자라고 하더군. 이제 머지않아 로마는 사력을 다해 우리에게 덤벼들 것이다.”
그의 말에 기병대장 마하르발과 아즈루바알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로마 원정대에서 가장 연장자인 두 사람은 1차 포에니 전쟁에서 하밀카르와 함께 시칠리아에서 로마군과 싸운 경험이 있었다.
두 사람은 로마군이 마음먹고 압도적인 물량으로 적을 밀어붙이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피부로 느낀 적이 있었기에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입꼬리가 광대에 닿는 것을 참지 못할 정도로 기뻐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법무관 바로가 집정관에 당선될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호민관 메틸리우스도 덤으로 당선될 줄이야! 미누키우스를 영웅으로 만든 성과가 생각보다 훨씬 크네!’
원 역사에서 기원전 216년 집정관에 당선된 사람은 법무관 바로와 스키피오의 장인 아이밀리우스였다.
여러 사료에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신중한 성격에 귀족 출신인 아이밀리우스는 한니발을 상대로 무모한 회전을 벌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런 그도 시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바로의 폭주를 막지 못하고 칸나이 전투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아이밀리우스는 뛰어난 통솔력을 발휘해 스키피오와 파비우스의 장남 막시무스를 비롯한 자신이 지휘하는 로마군 장교들이 패색이 짙은 전장에서 달아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이번에 바로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된 전직 호민관 메틸리우스는 원로원 의원에 선출되지 못해 쿠리아 호스틸리아에 자기 자리도 없는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하니 전장에서 아이밀리우스와 같은 활약을 할 리 없을 것이었다.
‘로마인들이 이 정도로 거한 밥상을 차려 줬는데 밥풀 하나 남기지 말고 싹싹 긁어먹어야지. 올해 얼마나 로마에 피해를 줄 수 있느냐가 이번 전쟁의 승패를 가를 거다. 역사 지식이 좀 있다고 방심하면 몇 년 뒤에 웃는 건 우리가 아니라 로마가 될 테니 정신 차려야 한다.’
그때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한니발에게 말했다.
“호전적인 집정관이 두 명이나 당선됐으면 로마군이 먼저 싸움을 걸어 올 법도 한데 너무 잠잠합니다. 마치 파비우스를 상대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지금 당장은 적장 바로의 움직임이 파비우스하고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두 사람의 목적은 완전히 다르다. 파비우스는 보급을 끊어 우리를 말려 죽이려고 했지만, 바로는 군대를 최대한 많이 모아서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전투를 벌이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을 거다.”
“그렇다면 적이 병사를 모으기 전에 아풀리아 지역을 약탈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 지역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밀이 없으면 로마군은 당장 군량이 부족해질 겁니다. 로마군은 밥을 굶지 않기 위해서라도 장군님의 의도대로 아풀리아의 평야 지대로 몰려오겠지요.”
“로마는 당장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아풀리아의 곡창지대에서 생각되는 식량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만 충분하면 시라쿠사 같은 동맹국에게 밀을 수입하는 방법으로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지.”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는 것보다는 로마를 조금이라도 괴롭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마하르발의 말을 듣고 하스드루발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금은 아직 삼월이라 한창 봄밀이 밭에서 자라고 있으니 농장을 습격해 봐야 식량을 별로 얻을 수 없네. 괜히 병사들만 지칠 걸세.”
“그렇겠지요. 하지만 밀밭에 불을 지르면 조금이나마 로마의 재정에 타격을 입힐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동맹국에서 밀을 사 오는 데 예상하지 못한 돈을 써야 할 테니 말입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앞으로 석 달이 지나고 가을밀을 수확할 시기가 됐을 때 아풀리아를 공격하면 더 효과적이지 않겠나?”
기병대장 마하르발은 그제야 두 형제의 의도를 이해하고 감탄을 금치 못하며 소리쳤다.
“아! 외국에서 밀을 수입한다고 해도 외교사절을 보내 협상하고 배로 밀을 수송하려면 최소한 몇 달은 걸리겠지요! 그사이에 로마군은 식량난을 견디다 못해 우리가 원하는 전장으로 끌려 나오겠군요!”
“그 말대로네. 게다가 그때쯤이면 로마군도 지난가을에 수확한 밀을 거의 다 먹어 없앴을 테니 우리의 도발에 응할 수밖에 없을 걸세.”
“밀의 수확 시기까지 염두에 두시고 전투를 벌일 시기를 고르시다니··· 저는 앞으로 전장에서 십 년을 더 보내도 지휘관 자리에 앉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한니발이 너털웃음을 웃은 후 마하르발에게 말했다.
“요즘 들어 자네답지 않게 앓는 소리를 많이 하는군! 아무래도 바알 함몬께서 직접 하스드루발에게 지혜를 내려 주시고 계신 게 분명하다. 그러니 내 동생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학할 필요 없네. 앞으로 석 달 동안은 다음 전투를 대비한 강도 높은 기동훈련을 할 테니 병사들 관리에 더 신경 쓰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한니발 장군님. 그럼 아풀리아 지역의 어느 곳을 전장으로 상정하고 훈련을 진행하면 되겠습니까?”
“뻔한 거 아닌가? 로마군 최대의 군량 창고가 있는 칸나이 주변의 평야 지대다.”
칸나이.
기원전 3세기 이후 전쟁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 뛰게 만드는 한마디.
하스드루발은 그 세 글자를 가슴에 새기며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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