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 [130화] 대망의 칸나이 전투 (2)
기원전 216년의 봄을 맞은 이탈리아 반도에는 폭풍전야의 고요함이 감돌았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가을밀 수확철을 기다리며 게루니움에서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고 로마의 신임 집정관 바로와 메틸리우스는 최대한 많은 군단병을 징집할 궁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집정관 중 바로는 동맹도시를 방문하여 보조병 지원을 호소하고 메틸리우스는 로마에서 징병과 훈련업무를 맡기로 합의했다.
바로가 동맹도시를 향해 로마를 떠나자마자 메틸리우스는 두 사람의 뜻을 시민들에게 공표하기 위해 원로원 회의를 소집했다.
모든 원로원 의원이 쿠리아 호스틸리아에 모이자 메틸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저와 바로 집정관님은 며칠 동안 밤낮으로 논의한 끝에 카르타고군 정벌대의 규모를 정했습니다. 앞으로 석 달 안에 아홉 개 군단으로 구성된 정벌대를 조직할 생각입니다. 한니발도 10만에 가까운 대군의 공격을 받으면 그 옛날 우리의 땅을 침범한 피로스처럼 이탈리아 반도 밖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의 말에 귀족파 의원은 물론이고 평민파 의원들까지 놀란 눈으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동료와 눈을 마주치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귀족파의 중진 의원인 아이밀리우스가 바로의 말을 듣자마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집정관의 의견에 반대했다.
“존경하는 메틸리우스 집정관님. 저도 전례 없는 국가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병력을 징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로마에는 당장 그만한 병사를 모을 여력이 없습니다.”
아이밀리우스의 말에 파비우스의 아들 막시무스가 맞장구쳤다.
“저도 아이밀리우스 의원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존경하는 바로 집정관님. 그 계획대로 대군을 조직하려면 석 달 안에 일곱 개 군단을 더 징집해야 합니다. 하지만 잘 아시다시피 지난 전투에서 우리는 벌써 십만이 넘는 병력을 잃지 않았습니까?”
두 사람의 반박에 집정관 메틸리우스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두 분 말씀대로 현행법 하에서 그 많은 병사를 징집하기는 어렵겠지요. 따라서 저와 바로 집정관님은 육군 지원자격인 재산 하한선을 사천 아세스로 낮추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는 방안을 여러분께 제안하기로 했습니다.”
로마는 기원전 6세기부터 재산이 1만 1천 아세스 이상인 로마 시민권자만이 육군에 복무할 수 있도록 법으로 규정해왔다.
당시 로마의 평범한 인부의 하루 일당은 대략 10아세스 정도였다.
최소한 일반적인 임금 노동자의 약 3년 치 연봉이 넘는 재산을 가진 시민만이 로마 군단병이 될 수 있었던 셈이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전장에서 목숨을 걸 신념이 없을 거라는 당시의 통념이 반영된 법률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육군 복무 경험이 없으면 공직에 나설 수 없는 로마 사회에서 가난한 평민의 정계 진출을 막기 위한 귀족의 계산이 깔려있었다.
바로와 메틸리우스는 오랜만에 평민파가 다시 원로원에서 주도권을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평민의 권익 신장을 위해 군단병의 재산 하한선을 낮추고자 했다.
신임 집정관의 말에 귀족파 원로원 의원들이 불편함을 숨기지 않으며 불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돼! 그런 가난뱅이들이 제대로 된 무기를 살 수나 있겠습니까?”
“집정관님의 말씀대로라면 머지않아 글라디우스 대신 식칼을 들고 방패 대신 수레바퀴를 든 군단병이 전장에 서게 될 겁니다!”
그러자 집정관 메틸리우스가 고함을 질러대는 귀족파 의원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저와 바로 집정관님의 의견에 반대하신다면 부디 대안을 말씀해 주십시오. 군단병의 재산 하한선을 낮추지 않고 카르타고군을 압도할 병력을 징집할 다른 방안을 알려주신다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 말에 아우성치던 귀족파 의원들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중산층 시민 수만 명이 전사하거나 카르타고군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려간 상황에서 병력을 증강할 다른 뾰족한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로마의 귀족파 의원들은 집정관 바로와 메틸리우스가 제안한 법안에 더는 반대할 명분을 잃고 말았다.
* * *
바로와 메틸리우스는 작성한 입법안이 통과되자마자 군단병 징집과 신병 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3월이 끝나갈 때 즈음에 첩자의 보고를 통해 로마 원로원이 로마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대를 조직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두 형제는 원로원에 첩자를 잠입시킬 수는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시내의 광장에서 딜렉투스라고 불리는 모병행사를 공개적으로 열어 군단병 징집 대상자를 모았기 때문에 새로 조직될 로마군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니발은 첩자가 보낸 서신을 읽은 후 근심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홉 개 군단이라... 예상했던 것보다 많군. 확실히 로마는 신화 속의 괴물 히드라같이 끈질긴 나라구나.”
하스드루발도 형의 말을 듣고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대충 보병 구만 명에 기병은 팔천 기가 조금 안 된다는 말이잖아. 로마가 그 병력을 다 데리고 공격해오면 전략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겠는데...”
원 역사의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는 총 8만 6천 명의 대군으로 한니발의 군대 5만 명에게 맞섰다.
그중 로마군의 최선임병 트리알리 1만 명은 전투가 벌어질 때 본진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7만 6천 대 5만 명의 싸움이 벌어졌고 한니발은 얇고 넓은 보병 방진으로 적을 포위해 역사적인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로마군의 보병이 원 역사보다 1만 명이나 늘어 버리면 한니발의 보병 4만 명과 기병 1만기로는 완전한 포위망을 짤 수가 없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두 장군이 깊은 고민에 빠지자, 하급 장교 기스코가 한니발에게 말했다.
“한니발 장군님. 병사가 부족하다면 삼니움족에게 지원군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삼니움족은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니 우리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나도 조금 전에 그 생각을 해보긴 했다. 하지만 갑자기 우리 군에 합류한 삼니움족이 전장에서 내 지시에 따라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군.”
“아...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원 역사의 칸나이 전투는 3천 년이 지난 후에도 세계 여러 나라의 사관학교에서 생도들에게 포위섬멸전의 가장 이상적인 예로서 가르칠 정도로 완벽한 전투였다.
한니발이 이처럼 역사에 길이 남은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그의 병사들이 여러 번 큰 전투를 치르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스드루발은 형의 말에 동의하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형 말대로야. 삼니움족 병사들은 용맹하지만, 우리 병사들처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도중에도 기수가 흔드는 깃발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아군과 적군의 뿔나팔 소리를 구별할 수는 없겠지.”
“그렇겠지. 그건 두세 달 정도 훈련받는다고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어쩌면 당분간은 아버지께서 시칠리아에서 로마군과 싸우실 때 하셨던 것처럼 아펜니노 산맥에 숨어서 유격전을 벌여야 할지도 모르겠군.”
한니발의 말대로 차선책으로서 게릴라전을 펼치면 아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로마군을 괴롭힐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두 형제는 그런 방법으로는 전투에서 이길 수는 있어도 전쟁에서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전쟁처럼 로마연합의 도시국가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줘야 할 때는 게릴라전이 마지막 수단이야. 산적처럼 첩첩산중에 숨어있다가 적이 빈틈을 보일 때만 콕콕 찔러대면 어느 도시가 우리를 우러러보겠어.’
그때 게루니움의 성문을 지키고 있던 초병 한 명이 지휘관 막사 안으로 들어와 한니발에게 경례한 후 보고했다.
“한니발 장군님께 보고드립니다. 하밀카르 총독님께서 보내신 수송대가 조금 전 게루니움에 도착했습니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아버지께서 보내신 지원군과 물자는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뒀나?”
“전직 독재관 티베리우스가 지휘하는 군대가 방해하는 바람에 지원군을 보내시지 못했지만, 마차 오백 대 분량의 보급품과 북아프리카산 말 오백 마리를 보내셨습니다.”
“누미디아 기병들이 좋아하겠구나. 하지만 지금은 식량이나 말보다는 정예병이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라 좀 아쉬운걸.”
“아 그리고 카르타고 노바에 계신 아르키메데스 선생님께서 하스드루발 장군님께 보내신 선물도 이번 수송대 편으로 도착했다고 합니다.”
병사의 말에 하스드루발이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내가 전에 부탁드렸던 게 드디어 완성됐나 보네! 아르키메데스 선생님이 보내신 물건을 이리 가져와라! 아니. 조심히 다뤄야 하는 물건일 것 같으니 내가 그쪽으로 가야겠다. 어서 안내해라!”
하스드루발이 막사 밖으로 나가자 한니발도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동생을 따라갔다.
두 형제는 곧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수송대가 끌고 온 천장이 덮여 있는 마차 한 대 앞에 섰다.
하스드루발은 병사들에게 수레에 실려있는 나무 상자 여러 개를 조심스럽게 꺼내도록 지시했다.
병사들이 작업을 마친 후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자 심지가 삐져나와 있는 작은 대나무 통 수십 개와 옆면에 바르카 가문의 상징인 번개문양이 새겨진 네모 반듯한 우츠 강철 덩어리가 담겨 있었다.
한니발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물건을 눈앞에 두고 오른손으로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게 대체 뭐지? 도저히 용도가 짐작이 안가는군.”
그러자 하스드루발이 형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나무통은 히스파니아의 불을 작게 만든 거고 저 네모반듯한 쇳덩어리는 불을 쉽게 피울 수 있는 기계장치야! 이제 뿔피리나 깃발을 쓰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군대를 지휘할 수 있겠어!”
아르키메데스가 보내온 물건은 바로 신호탄 용도로 쓸 폭죽과 폭죽 심지에 불을 붙일 지포 라이터였다.
전생에 한국의 장교였던 하스드루발은 무전기나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는 고대의 전장에서 수만 명의 병사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과정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왔기에 어린 시절부터 폭죽을 만들어 신호탄 대용으로 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볍고 내구성이 좋아 소형 폭죽의 용기로 적합한대나무가 먼 인도 땅에서 수입한 귀중품인 데다 각궁의 재료로 우선 적으로 쓰여왔기 때문에 군사용으로 쓸 만큼 많은 폭죽을 만들기는 어려웠다.
또한 늦봄과 여름을 제외하면 습한 날씨가 이어지는 지중해의 기후를 고려하면 전장에 불씨를 가지고 다니는 것도 수고스러운 일이었기에 그는 폭죽을 신호탄으로 쓰는 것을 지금까지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바르카 가문의 장남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히스파니아에서 대나무를 기르는 데 성공했기에 대나무를 전보다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르키메데스가 아르키메데스의 불꽃의 원료를 만들기 위해 천연유전에서 추출한 원유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얻은 등유를 사용해 지포 라이터를 개발해냈기 때문에 하스드루발의 오랜 소원이 이뤄진 것이다.
‘지포 라이터가 어지간한 책 한 권만큼 큰 건 좀 아쉽지만, 이게 어디야. 지금의 금속가공 기술로는 작은 부품을 만들기 어려우니까 이 정도면 아주 대단한 거지.’
그는 폭죽 한 개를 집어 대나무 통에 달린 나무 막대를 땅에 꽃은 후 지포 라이터의 철제 뚜껑을 열어 심지에 불을 붙였다.
심지에 붙은 불꽃이 성인 남자의 팔 절반 정도 길이의 대나무통 안으로 스며들자 곧 요란한 소리를 내며 보라색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다.
- 피유우우우우웅 파앙!
폭죽이 쏘아 올린 불꽃은 불꽃놀이용 화공품이 쏘아 올리는 국화 모양 불꽃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제법 먼 거리에서도 확연히 보일 만큼의 크기는 되는 불꽃을 하늘에 남겼다.
한니발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것만 있으면 오늘 뽑은 신병도 일사불란하게 지휘할 수 있겠구나! 정말 잘했다 하스드루발! 네 덕에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대담한 작전도 시도해 볼 수 있겠어!”
두 형제가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때 한 수송대 병사가 하스드루발에게 서신을 하나 건네주며 말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이건 아르키메데스 선생님께서 장군님께 보내신 서신입니다.”
하스드루발은 즉시 병사에게서 서신을 받아 펼쳐 한니발도 들을 수 있도록 소리 내어 읽었다.
“하스드루발 보아라. 네가 이 서신을 읽고 있을 때쯤이면 내가 만든 발명품에 감탄하고 있겠지. 그 폭죽이라는 물건은 애초에 네가 만든 물건을 개량한 것이니 어떤 이름을 붙여도 간섭하지 않겠다. 하지만 불을 뿜는 장치의 이름은 반드시 ‘아르키메데스의 부싯돌’이라고 불러야 한다. 네가 그 물건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바르카 가문과의 인연을 끊고 시라쿠사로 돌아가겠다. 너의 스승이자 제자인 아르키메데스가.”
동생의 말을 듣자마자 보기 드물게 환하게 웃던 한니발의 표정이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그 노인네 자의식 과잉이 여전한 걸 보니 아직 정정한 모양이군. 어쩌면 시라쿠사의 히에론 왕보다 더 장수할지도 모르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