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 [131화] 대망의 칸나이 전투 (3)
새로운 전장에서의 명령 전달 수단을 손에 넣은 한니발은 즉시 삼니움족에게 전령을 보내 지원군을 요청했다.
삼니움족의 다섯 부족장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로마군을 쫓아내 준 하스드루발과의 신의를 지켜 한니발에게 중장보병 1만 명을 지원군으로 보냈다.
그렇게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삼니움족의 병사들이 게루니움에 도착하자마자 로마의 대군을 상대하기 위한 훈련에 매진하고 로마는 로마대로 신병 훈련에 열을 올리는 동안 어느덧 기원전 216년의 초여름이 찾아왔다.
드디어 두 형제가 원하던 이탈리아 남동부 아풀리아 지역의 가을밀이 익어 고개를 숙이는 계절이 찾아온 것이다.
한니발은 바르카 가문의 장교와 병사를 게루니움의 성문 앞에 집결시키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훈련의 성과를 시험할 때가 왔다! 지금부터 로마군의 군량 창고가 있는 칸나이로 행군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업적에 버금가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
사령관의 말에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우레같은 함성으로 대답하며 남동쪽으로 진군했다.
게루니움에서 칸나이까지의 거리는 약 100km였지만, 가는 길이 모두 평야 지대였고 병사들의 사기가 높았기 때문에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겨우 닷새 만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니발은 행군을 마치자마자 칸나이의 북쪽에 흐르는 아우피디우스강 변의 언덕 위에 숙영지를 세웠다.
하스드루발은 숙영지가 완성되고 망루 위에 올라 앞으로 강 너머에 펼쳐져 있는 평야 지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원 역사의 로마군이 이곳을 전장으로 고른 이유가 이해가 되네. 확실히 저기서는 기병이나 코끼리를 제대로 활용하기가 어렵겠네. 랜스차징을 연달아 사용할 수는 없겠군.”
곧 전투가 벌어질 평야 지대는 대규모 회전을 벌이기에는 약간 비좁은 곳이었다.
평야 지대의 북쪽에는 큰 강이 흐르고 있었고 남쪽에는 언덕 위에 세워진 몰락한 성채 도시 칸나이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과 언덕 사이의 한정된 공간을 9만 명 이상의 로마군이 가득 채우면 기병은 기동 반경이 한정되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즉 이번 전투에서 랜스를 들고 돌격한 중장기병은 지형지물과 전방에서 압박해 오는 적 때문에 후방으로 돌아가 부러진 무기를 교체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하스드루발은 이곳에서 바르카 가문의 군대가 로마군에게 패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 했으니 이번 전투는 무조건 이긴다. 중요한 건 원 역사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둬서 로마연합을 제대로 흔들어야 된다는 거야.”
* * *
한편 로마군도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군대를 이끌고 게루니움에서 출발하자 발 빠르게 움직였다.
로마는 먼저 전직 집정관 레굴루스와 게미니우스에게 4개 군단으로 이루어진 선봉대를 맡겨 카르타고군의 숙영지 근처에 진지를 구축하고 한니발의 발목을 잡게 했다.
집정관 바로와 메틸리우스가 징집한 신병이 훈련을 마치고 전장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카르타고군이 군량 창고와 농장을 약탈하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였다.
스키피오는 이번 전투에 기병대장으로서 참전하라는 원로원의 명령을 받은 후 집정관 바로와 메틸리우스가 지휘하는 군대에 합류했다.
그는 말을 타고 아피아 가도를 따라 칸나이를 향해 행군하면서 자신과 함께 전장에 서게 된 장인 아이밀리우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장인어른. 뭔가 불안합니다.”
“스키피오. 뭐가 그리 불안하단 말이냐?”
“현재 카르타고군의 규모는 우리 군의 절반이 조금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교활한 적장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왜 엄폐물도 없는 평야 지대로 진격해 온 걸까요? 그동안 적은 지형지물을 이용한 매복 공격에 의존해 승리를 거둬 왔는데 말입니다.”
“적장 한니발은 이제 서른 살이 넘은 젊은 장군이라고 들었다.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에 큰 승리를 여러 번 거뒀으니 슬슬 교만해질 때도 됐겠지.”
“장인어른 말씀대로였으면 좋겠습니다.”
“스키피오. 네가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바로 집정관님과 메틸리우스 집정관님은 군무 경험이 조금 부족한 편이시지. 하지만 두 분은 지난 몇 개월 동안 경험 많은 원로원 의원들에게 열심히 자문을 구하시면서 이번 전투를 준비하셨단다. 이번만큼은 적장 한니발도 우리를 자기 마음대로 농락할 수 없을 거다.”
집정관 바로와 메틸리우스는 미숙한 지휘관이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이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벌을 가리지 않고 군무 경험이 많은 전직 집정관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로마 원로원은 두 집정관의 요청을 받아 카르타고군에게 패배한 전투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전직 독재관 티베리우스와 다른 생환자의 증언을 토대로 패배의 원인과 카르타고군의 약점에 대해서 열심히 연구해 왔다.
그 결과 그들이 내린 결론은 카르타고군은 기병과 원거리 공격을 하는 경보병이 강하지만, 본대를 이루는 보병대는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강력한 중장보병대로 한 번에 적을 압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장인의 말을 듣고도 얼굴에서 불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확실히 트레비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군단병이 일점돌파로 적의 포위망을 뚫어 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에 주목하시고 원로원의 중진 의원님들께서 이번 전투를 준비하신 건 잘 알고 있습니다만······.”
“트레비아 전투뿐만이 아니다. 트라시메노 호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우리 군의 중장보병대는 적의 포위망을 뚫어 냈지. 솔직히 나는 아직도 파비우스 전 독재관님의 지구전 전략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작전을 제외하고 카르타고군을 물리칠 방법은 아마 이것밖에는 없을 거다.”
장인의 말을 듣고 그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긴 칸나이 인근의 평원에서 더 적은 병사로 대군을 포위하는 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살아 돌아와도 어려울 겁니다. 제 걱정이 지나쳤습니다.”
“그래. 고맙게도 적이 군량 창고에 눈이 멀어 간악한 꾀를 부리기 어려운 전장에 와 줬으니 우리는 그저 용맹하게 싸우기만 하면 된다. 그건 그렇고, 나를 언제까지 장인어른이라고 부를 거냐?”
“네?”
“난 네 장인이기 이전에 신들의 곁으로 떠난 네 아버지와 형제나 마찬가지인 사이였다. 지금은 내가 네 후견인이기도 하니 나를 아버지로 여겨 주면 고맙겠구나.”
아직 아버지 푸블리우스를 눈앞에서 잃은 슬픔을 떨쳐 내지 못한 스키피오는 아이밀리우스의 따듯한 말에 눈시울을 붉혔다.
* * *
기원전 216년 7월 말.
집정관 바로와 메틸리우스가 이끄는 로마의 5개 군단이 드디어 칸나이 평원에서 카르타고군과 대치 중인 로마군 4개 군단과 합류했다.
두 집정관은 행군에 지친 병사들을 숙영지에서 며칠 쉬게 한 후 8월이 시작되자 드디어 결전을 치르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전투에서 총사령관 노릇을 하게 된 바로는 5천 명의 병사만 숙영지 수비를 위해 남겨 두기로 했다.
8월 2일의 아침이 밝자 그는 8만 5천 명의 보병과 7천 5백 기의 기병을 아우피디우스강과 성채도시 칸나이가 세워진 언덕 사이의 평원에 진형을 갖추게 했다.
모든 병사가 자신의 위치에 서자 달변가 바로는 병사들의 앞에 서서 연설을 시작했다.
“드디어 복수의 날이 왔다! 우리는 바로 오늘 죽어 간 영웅 미누키우스와 간악한 적장 한니발의 계략에 속아 죽어 간 동포들의 넋을 야만인들의 피로 달래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 로마의 오백 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두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가장 자랑스러운 로물루스의 후손으로 기억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감히 이탈리아반도의 땅을 더러운 군화로 짓밟은 카르타고인들에게 아무도 로마를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 줄 것이다! 로마 인빅타!”
집정관의 연설에 9만 명이 넘는 병사가 내지른 함성이 칸나이 평원을 가득 메웠다.
“로마 인빅타!!!”
로마군의 고막을 찌를 듯한 함성은 이제 막 언덕 위의 숙영지를 나서고 있던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귀에도 들려왔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언덕 아래의 평원을 가득 메운 로마의 9만 대군을 바라보며 몸서리쳤다.
“벌써 십 년째 전장을 떠돌고 있지만, 저렇게 많은 병사가 모여 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군.”
“그러게··· 아무리 우리가 지금까지 한 번도 진 적이 없다지만, 저 많은 병력하고 정면으로 부딪쳐도 괜찮은 걸까?”
한니발의 장교 중에서도 병사들과 같이 불안감에 휩싸인 자가 적지 않았다.
하급장교 기스코가 손바닥에서 흐른 식은땀을 옷자락에 닦으며 한니발에게 말했다.
“정말 엄청난 광경이군요··· 로마군이 총력전을 펼칠 건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많은 병사를 모아 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오오 위대하신 바알 함몬이시여! 부디 저희를 지켜 주소서!”
그의 말에 다른 장교들도 불안함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 하스드루발만은 호기심과 기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형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그거 나오는 거냐? 이제야 역사에 길이 남은 아재 개그가 진짜 일어났던 일인지 확인할 수 있겠구나!’
현대의 사료에는 칸나이 전투를 앞두고 기스코가 로마의 대군을 보고 적군이 놀랄 만큼 많다고 말하자 한니발은 기스코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기스코.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
“그게 대체 무엇입니까? 한니발 장군님.”
“저렇게 많은 사람 중 이름이 기스코인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거다.”
그러자 평소 근엄하고 진지한 사령관의 농담에 한니발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병사들도 크게 웃은 후 자신감을 회복했다고 한다.
‘전생의 나였으면 사단장이 이런 농담을 해도 표정 관리가 어려웠을 것 같은데. 진짜 다들 그런 뜬금없는 농담을 듣고 웃어 댈까?’
마침내 그의 기대대로 한니발이 하급장교 기스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기스코.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
“그게 대체 무엇입니까? 한니발 장군님.”
“저렇게 많은 사람 중 그 맛있는 허니버터 아몬드를 먹어 본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거다.”
하스드루발은 형의 말을 듣고 맥이 풀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런 나비효과 싫다고··· 원 역사의 농담보다 더 썰렁하잖아······.’
한니발의 농담을 들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더욱 처참했다.
한니발이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바람에 다른 장교들은 그가 농담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바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르카 가문의 장교들은 한참을 생각한 끝에 한니발이 농담을 했다는 사실을 간신히 깨달았지만, 웃을 타이밍을 놓쳐 버려 그 자리의 분위기가 대단히 어색해지고 말았다.
결국 그 자리의 분위기는 하스드루발이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로마군의 숫자가 많다고 걱정할 것 없다! 저 구름떼처럼 모인 적군은 농사꾼이나 인부가 괭이나 망치 대신 검을 들었을 뿐인 오합지졸일 뿐이다! 기스코, 자네는 직업이 뭔가?”
“저는 철들 때부터 지금까지 군인입니다.”
“그래!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십 년 이상 전장을 누벼 왔다! 몇 달 전까지 밭이나 갈던 적군이 백만 명이 몰려온다 한들 우리를 이길 수는 없다!”
하스드루발의 호기로운 외침에 바르카 가문의 장교와 병사들이 우렁찬 환호성으로 대답했다.
한니발은 슬며시 동생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고맙다. 병사들의 긴장을 풀어 주려고 한 회심의 농담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줄은 몰랐군······.”
“고맙긴 뭘. 천재의 유머 감각이 시대를 앞서갔을 뿐이라고 생각해. 이제 병사들의 긴장도 풀렸으니 다음 전투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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