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 [135화] 엇갈리는 희비
칸나이 전투가 끝난 후 하스드루발이 도망치던 트리아리들을 물리치고 있을 때 한니발은 전장의 정리를 다음 날로 미루고 아우피디우스강 너머에 있는 숙영지로 포로들을 압송했다.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던 데다 로마군 전사자의 숫자가 워낙 많아 어차피 하루 이틀 안에는 전리품을 전부 수거하고 시신을 매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숙영지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스드루발도 포로로 붙잡은 트리아리 3천 5백 명을 데리고 형의 곁으로 돌아왔다.
한니발은 로마군의 잔당을 쓸어버리고 온 동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보아하니 로마군 숙영지의 수비병들이 도망치기 전에 제시간에 도착했구나. 정말 잘했다.”
“낮에는 병사 육만으로 구만 명이 넘는 로마군을 이겼잖아! 이번엔 내 병사들이 훨씬 많았는데 당연히 이겨야지! 오늘의 승리는 역사에 길이 남을 거야! 지구상에서 인류가 멸종하기 전까지는 절대 영원히 기억될 거라고!”
“지구? 지구가 뭔데?”
“아··· 세계 말이야. 세계.”
“아무튼 네 말대로 역사에 흔적을 남긴 날이니 축배를 들지 않을 수 없지.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시자! 내일 해가 뜨기 전에 식량창고를 싹 비워 버리는 거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사령관의 말을 듣고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축제다!”
“오랜만에 배불리 먹을 수 있겠구만!”
신이 난 병사들은 숙영지의 취사장 곳곳에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남은 포도주와 벌꿀주를 모두 창고에서 가지고 나와서 마음껏 먹고 마셨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도 스승 실레노스와 부하 장교들을 숙영지 한가운데의 공터에 피워 놓은 모닥불 근처로 부른 후 술판을 벌였다.
바르카 가문의 장교들은 꼬치에 끼워 구운 말고기를 안주로 삼아 술을 마시며 잠시 격식을 잊고 웃고 떠들어 댔다.
“이제 조만간 로마인들은 ‘로마 인빅타’가 아니라 ‘로마 빅토’라고 외치게 되겠네요! 로마 빅토~!”
바르카 가문의 장교들은 평소 하스드루발의 라틴어 욕설 강의를 꾸준히 들은 덕에 ‘로마 빅토’가 ‘정복된 로마’라는 뜻의 문장임을 잘 알고 있었다.
기스코가 얄미운 목소리로 로마군의 성대모사를 하자 얼큰하게 술기운이 오른 장교들이 숨이 넘어가도록 웃어 댔다.
“푸하하하하! 로마 빅토~ 그거 어감 좋네!”
“아 기스코 이 자식아! 그만 좀 웃기라고! 피 같은 포도주가 자꾸 콧구멍으로 흘러나오잖아!”
한니발은 오늘 아침 사령관인 자신이 한 농담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정색하던 부하들이 하급장교의 농담을 듣자마자 눈물까지 흘려 가며 박장대소하는 모습을 야속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자신의 잔에 독한 벌꿀주를 가득 따른 후 단숨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기병대장 마하르발은 사령관이 자작하는 모습을 보고 술기운 때문에 볼이 벌게진 채로 포도주 한 병을 들고 한니발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한니발 장군님! 오늘같이 기쁜 날 왜 그리 어두운 표정을 짓고 계십니까?”
“아무것도 아닐세.”
“이건 벌꿀주 냄새군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둔 날에 촌놈들이나 마시는 독주를 드시다니요! 그러지 마시고 제 잔을 한잔 받아 주십시오! 제가 아껴 둔 본국의 바그라다스강의 농장에서 빚은 포도주를 가져왔습니다!”
“그거 자네가 로마와의 전쟁이 끝나는 날 따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최고급 포도주 아닌가?”
“이제 전쟁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전투로 로마 놈들은 야전군이 완전히 씨가 말라 버렸습니다! 이제 로마로 쳐들어가 세르빌리우스 성벽을 넘기만 하면 장군님은 알렉산드로스 3세 대왕을 능가하는 영웅으로 역사에 남으실 겁니다!”
“우리는 로마로 진격하지 않는다.”
“로마를 공격하지 않으시겠다니요? 그럼 지금까지 우린 무엇을 위해 싸워 왔다는 말씀입니까?”
기병대장 마하르발의 질문에 한니발이 두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걸 이제 와서 내게 묻는단 말인가? 로마에게 빼앗긴 우리의 바다를 되찾기 위해서인 게 당연하지 않나?”
“물론 그 사실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회에 이탈리아반도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의 정복자가 되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 가문은 로마인의 땅이나 빼앗고 도시를 불태우기 위해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쟁을 준비해 온 게 아니다. 전쟁 중에 얻는 전리품이나 영토 같은 건 다 부차적인 것들일 뿐이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그만. 더는 내 앞에서 전략을 논하지 마라.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강화조약을 맺을 것이다. 로마군이 시칠리아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로마 원로원이 본국 정부에 합당한 전쟁배상금을 내기로 약조한다면 장사 대신 전쟁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지.”
마하르발은 한니발과 함께 처음 전장에 선 이후 지금까지 누구보다도 그를 존경해 왔다.
그가 한니발에게 거듭 로마를 공격하자고 권한 이유도 전리품을 더 얻고 싶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이 13년 동안 모셔 온 장군이 더욱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마하르발은 한니발이 자신의 진심 어린 권고를 전리품과 영토를 얻기 위한 것쯤으로 치부해 버리자 그만 마음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거기에 오랜만에 마신 말술이 이성을 마비시키는 바람에 그는 평소라면 한니발에게 할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을 말을 하고 말았다.
“위대하신 바알 함몬께서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장군님께서 적에게 승리를 거두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지만, 그 승리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는 전혀 모르고 계신 걸 보니 말입니다.”
마하르발이 입을 닫자 술자리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한니발은 그의 말을 듣고도 아직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마치 눈빛으로 마하르발을 태워 죽이려는 듯이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스드루발은 팽팽하게 맞서는 두 사람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방금 마하르발이 로마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한니발의 말을 듣고 한 말은 원 역사의 현대에도 전해지는 유명한 일화이다.
그러나 마하르발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더는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전생의 하스드루발은 늘 그 이유를 궁금해해 왔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원 역사에서 마하르발이 이런 분위기에서 이 말을 했다면 형에게 처형당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한니발 형은 하극상을 쉽게 용서하는 성격은 아니고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면 군기에 문제가 생길 테니까.’
기병대장 마하르발은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을 제외하면 로마 원정대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장교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모시는 장군에게 비아냥거린 것 자체도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른 장교들이 보는 앞에서 한니발의 전략적 안목을 깎아내린 것은 상관 모독죄로 처형당해도 할 말이 없는 만행이었다.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한 말이라고는 하나 자칫하면 한니발의 권위에 흠집을 내 앞으로 그가 병사들을 통솔하는 데 지장을 줄 가능성도 있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저렇게 유능한 장수를 어이없이 잃을 수는 없지. 여기서는 일단 마하르발이 형에게 사과하도록 해야겠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이 그를 모욕한 심복에게 분노를 쏟아 내기 전에 일부러 마하르발에게 크게 화를 내면서 그를 꾸짖었다.
“닥쳐라! 마하르발! 감히 총사령관에게 그따위 망언을 지껄이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구나!”
“한니발 장군님께서 로마의 정복자가 되실 수 있다면 제 목숨 따위는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네 말대로 하면 로마를 정복하기는커녕 우리 모두 타지에서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우리가 아야몬테를 공격하다 위기에 처했을 때를 벌써 잊어버린 거냐? 그날 우리가 왜 위기에 처했었는지를 잘 생각해 봐라.”
그 말을 듣고 마하르발은 12년 전에 히스파니아 남부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를 생각했다.
그는 당시 하밀카르와 한니발이 아야몬테의 수비병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병사로 도시를 포위하고도 배후에서 몰려오는 카르페타니족의 대군에게 역으로 포위당해 전멸할 뻔했던 기억을 떠올리자 그날 적이 던진 투창에 맞아 생긴 허벅지의 흉터가 욱신거렸다.
하스드루발은 생각에 빠진 마하르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직 삼니움족과 갈리아인을 제외하면 이탈리아에 있는 다른 어느 부족도 우리 편으로 돌아서지 않았다. 로마와 그 동맹국의 인구를 다 합치면 아직도 사백만 명이 넘지. 로마 원로원이 결전을 각오한다면 아직도 십만이 훨씬 넘는 병사를 몇 달 만에 징집할 수 있다는 소리다.”
“우리가 로마를 포위했을 때 십만 대군이 배후에서 진격해 오면 이번에는 아야몬테에서처럼 일이 잘 풀리진 않겠군요··· 로마 연합의 인구까지 조사해 두시다니, 두 분은 역시 대단하십니다. 한니발 장군님, 주제넘게 무례를 저질러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제게 어떤 처벌을 내리신다고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마하르발이 순순히 한니발에게 사과하자 하스드루발은 이번엔 형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도 좀 그랬어! 마하르발이 전리품이나 땅을 얻자고 로마를 공격하자고 할 사람은 아니잖아? 충성심에서 한 말을 그런 식으로 매도하면 기분 나쁠 수밖에 없지!”
한니발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마하르발이 자신에게 반발한 이유를 깨닫고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명문 귀족 가문의 부와 명예, 천재적인 두뇌, 건장한 체격과 수려한 용모.
이 모든 것을 다 타고난 한니발은 아무래도 다른 사람보다 공감 능력이 조금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두 손으로 마하르발의 양어깨에 얹으며 말했다.
“나야말로 미안하네. 내가 철이 들기 전부터 우리 가문에 충성을 바쳐 온 자네에게 무심코 모욕적인 말을 해 버렸군. 방금 서로에게 한 말은 서로 취중에 한 말로 흘려넘기세. 앞으로도 내 오른팔이 돼 주게.”
한니발의 말을 들은 마하르발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에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한니발 장군님. 앞으로도 장군님과 바르카 가문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화해하자 하스드루발과 주변의 다른 장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쉰 후 다시 화기애애한 술자리를 이어 나갔다.
* * *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승리를 축하하며 장교들과 술잔을 부딪치고 있을 때, 집정관 바로를 비롯한 로마군 패잔병은 칸나이 평원에서 남서쪽으로 7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요새도시 카누시움으로 도망쳤다.
견고하지만 작은 성채 안에 전투에서 몸을 다친 부상병의 신음과 마음과 정신에 상처 입은 패잔병의 흐느낌이 가득했다.
그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 있던 스키피오는 전투가 끝난 다음 날 아침이 되고 나서야 간신히 하나뿐인 눈을 떴다.
“헉!”
그는 눈을 뜨자마자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켜 앉은 후 왼쪽 눈이 있던 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굳은 피가 묻어 굳어 버린 붕대의 소름 끼치는 감촉이 그의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등골에 식은땀 한 방울이 맺혔다.
그때 그의 뒤편에서 늙은 남자의 기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군요.”
스키피오가 뒤를 돌아보자 손에 붕대와 작은 칼을 든 노인이 보였다.
차림새와 손에 든 물건으로 보아 군의관임이 분명했다.
늙은 의사는 떨리는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보는 젊은 기병대장에게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말을 이어 나갔다.
“여긴 카누시움입니다. 어제 칸나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우리 로마군은 크게 패했습니다. 십만에 가깝던 대군 중 겨우 4천 명만이 이곳으로 도망칠 수 있었죠. 기병대장님께서는 운이 좋으신 분이군요.”
그 말을 듣고 스키피오는 오른손을 뻗어 군의관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운이 좋아? 난 겨우 일 년 사이에 카르타고인에게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잃고 이제는 애꾸눈이 되었다! 지금 이런 나한테 운이 좋다고 말한 거냐?!”
“그래도 살아서 복수를 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눈에 화살을 맞고 살아남는 사람은 제 경험상 백 명 중 한 명도 안 됩니다. 안타깝게도 대장님을 이곳까지 데리고 오신 친구분은 운이 좋지 못하셨습니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의사의 멱살을 잡은 손을 놓아 버린 후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막시무스······.”
군의관은 그를 딱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렇지 않아도 친구분의 장례를 진행하려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군의관의 뒤를 따라갔다.
임시병동이 되어 버린 요새 건물 밖으로 나와 성문을 나서자 장작더미 위에 놓여 있는 친구의 시신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군의관은 참담함을 이겨 내지 못하고 말문이 막혀 버린 스키피오에게 말했다.
“친구분께서는 옆구리에 화살을 맞은 상황에서도 대장님의 눈에서 화살을 뽑고, 입고 계시던 옷을 찢어 붕대로 삼아 응급 처치 하셨습니다. 하지만 적의 추격을 따돌리느라 경황이 없었는지 정작 자기 옆구리에 박힌 화살을 뽑고 붕대를 감지 않아서 대장님을 데리고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과다출혈로 사망하셨습니다. 정말 훌륭한 친구를 두셨군요.”
두 사람은 알 수 없었지만, 스키피오는 여러 가지 행운과 우연이 겹친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먼저 누미디아 궁기병이 그에게 활을 쏠 때 마침 역풍이 불고 있어 화살의 위력을 줄였고, 궁기병이 쏜 화살은 사슬갑옷을 잘 관통하지만 일반 화살보다도 목표물에 작은 상처를 입히는 송곳 모양의 화살촉을 쓴 물건이었다.
또한 스키피오가 탄 말은 덩치가 작은 이탈리아산 말이라 체고가 낮은 데다 그가 낙마한 곳에 마침 부드러운 늑대 가죽을 몸에 두른 벨리테스의 시신이 놓여 있었던 덕에 간신히 추락사를 면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스키피오는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친구를 구한 막시무스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스키피오는 군의관이 건네준 은화를 막시무스의 입 속에 넣은 후 슬픔과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막시무스··· 네게 빚진 목숨을 평생 복수를 위해 쓰겠다. 위대한 번개의 신 유피테르께 멩세코 카르타고를 불태우고 그 자리에 소금을 뿌려 네 넋을 달래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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