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37화 (137/201)

[ 137 ] [136화] 부족자결주의

칸나이 전투가 끝난 다음 날 아침, 한니발은 전장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한번 남동쪽의 평원으로 향했다.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숙영지를 나와 아우피디우스 강을 건너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지난 십삼 년 동안 숱한 전장을 지나왔지만, 이렇게 끔찍한 장면은 처음 본다. 역시 하스드루발을 데리고 오지 않길 잘했구나.”

승자의 환호성과 패자의 비명이 흘러가는 시간에 떠내려가 버린 전장에는 처절한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푸른 풀 이외에 아무것도 없던 대지는 5만 구가 훨씬 넘는 로마군의 시신과 말 수천 마리의 시체로 가득찼고, 하늘에는 시체를 쪼아먹기 위해 모여든 독수리와 까마귀 따위의 날짐승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한니발과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꺼림칙한 기분을 간신히 억누르고 죽음으로 가득한 검붉은 평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작업의 지휘를 맡은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한여름의 더운 날씨 때문에 부패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느긋하게 굴다가는 전염병이 돌 수도 있으니 최대한 빨리 시신을 수습해 화장해야 한다. 전사자의 시신을 전장 한가운데에 모아라. 다만 로마군 장교의 시신은 장례를 진행할 예정이니 따로 모아 둬야 한다.”

기병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만 명의 병사들이 손수레를 끌고 전장으로 흩어졌다.

시신 수습 작업을 맡은 병사들은 한여름의 뙤약볕 때문에 부패한 시신에서 풍기는 악취를 막기 위해 입고 있는 옷의 소매를 찢어 코와 입을 가려야만 했다.

한니발은 작업 중인 병사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격려의 말을 건넸다.

그러던 중 그를 수행하던 하급장교 기스코가 갑자기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면서 넘어졌다.

“으아악!”

한니발이 고개를 돌려 기스코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냐?”

“자...장군님!!! 누군가 제 발목을 붙잡아 넘어뜨렸습니다!”

겁에 질린 부하의 말에 한니발이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갈색 눈동자에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젊은 로마군 병사가 바닥에 쓰러진 채 오른손으로 기스코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로마군 병사는 한니발과 눈이 마주치자 나직이 중얼거렸다.

“죽여주십시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사지와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은 병사는 이미 안색이 창백하고 입술이 파래진 모습으로 보아 더는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였다.

한니발은 말없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어 서서히 죽어가는 병사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로마군 병사가 희미한 미소를 띠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고맙습니다...”

그는 대답 대신 병사의 목에 검을 찔러 넣어 그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기스코는 몸에 묻은 흙을 손으로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아직 스무 살도 안됐을 것 같은데, 적이지만 딱하군요.”

“그러게 말이다. 감사를 받고도 이렇게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또 처음이군.”

한니발은 칸나이 평야 한복판에서 전사자들을 화장하느라 피어오르는 불꽃을 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내 아들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위대하신 바알 함몬이시여. 부디 로마 원로원이 제가 내민 평화의 손길을 잡게 인도해 주소서! 이탈리아의 전쟁광들이 이번만큼은 참혹한 전쟁 대신 평화를 선택하게 해주소서!”

* * *

한니발이 전장을 정리하고 있을 때 하스드루발은 이번 전투에서 사로잡은 로마의 동맹도시 출신 포로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늘 하던 대로 로마 시민권자가 아닌 포로를 석방하기 전에 그들에게 카르타고와 바르카 가문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겁에 질린 포로들을 다독이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로마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마음을 자극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점이다.

하스드루발은 동맹도시 출신 포로들에게 좋은 음식과 술로 점심을 대접한 후 그들을 숙영지 한가운데로 모이게 했다.

그런 다음 그는 미리 준비해둔 연단에 올라 그리스어로 연설을 시작했다.

“카푸아, 타렌툼, 폼페이, 쿠마이, 그밖에 전 이탈리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부족이 세운 모든 도시국가의 시민 여러분! 저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 하스드루발은 모든 카르타고인을 대신해 어제 여러분과 전장에서 만나 서로 술잔 대신 방패와 검을 부딪칠 수밖에 없어 안타깝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

하스드루발의 외침에 동맹도시 출신 포로들은 놀란 눈으로 연단 위에 서 있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이미 전장에 나서기 전에 들은 소문을 통해 카르타고군이 로마 시민권이 없는 포로를 몸값을 받지 않고 풀어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맹도시 출신 포로들이 예상한 바르카 가문의 장군은 대단한 자비를 베풀 듯 거들먹거리며 포로를 풀어주는 정복자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공손한 말씨로 동맹국의 사절을 대하듯 포로를 대하는 하스드루발의 모습은 대단히 신선하게 비쳤다.

하스드루발은 포로들의 이목이 완전히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보고 더욱 열정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수백 년 동안 조국 카르타고 무역상들의 중요한 고객이었던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과의 전쟁을 멈추고 싶습니다! 우리 카르타고의 주신이신 바알 함몬께 맹세코 우리 바르카 가문은 이탈리아 반도를 가문의 영지로 삼을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때 포로 중 한 명이 그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다면 당신들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은 무엇 때문에 저 험준한 알프스를 넘고 늪지대를 건너 지중해의 거인 로마에 싸움을 걸었단 말입니까! 당연히 전리품과 영토를 노리고 있는 거 아니요!”

“우리 카르타고인들은 그저 로마에 빼앗긴 우리의 바다와 영토를 되찾고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한 후 평화로운 교역을 이어나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말에 2만 명에 가까운 포로들이 겸손한 정복자에게 호의적인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하스드루발의 말에 수긍한 건 아니었다.

또 다른 포로 한 명이 갑자기 군중 속을 뚫고 나와 연단 앞에 서서 소리쳤다.

“저 페니키아인의 말에 속으면 안 됩니다! 페니키아인은 모두 사기에 능한 장사치들입니다! 분명 카르타고는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때까지만 우리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을 이용하다 로마가 망하고 나면 새로운 지배자가 되려고 할 게 뻔합니다!”

그러자 하스드루발의 말에 감격했던 포로 중에서도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자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저 사람 말이 맞는 것 같은데? 로마나 카르타고나 어차피 똑같은 놈들이라면 이교도 보다는 우리와 같은 올림포스의 신들을 섬기는 로마하고 잘 지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포로의 무례한 외침을 듣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려 했지만, 하스드루발은 오른팔을 옆으로 뻗어 성난 부하들을 만류했다.

그는 포로들을 선동하는 연단 밑에 선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겉보기에는 그리스인 같은데도 로마인처럼 수염을 밀었군. 친로마파 가문의 아들인 모양이네. 제 목숨을 가문을 위해 바치겠다 이거냐? 내가 지 말에 반박하면 그리스인의 종특인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논쟁을 벌이려고 하겠지.’

하스드루발은 친로마파 포로의 말을 무시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군중을 향해 자기가 원래 하려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친애하는 전 이탈리아의 자유민 여러분! 저 하스드루발이 바르카 가문의 수장이시자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이신 하밀카르 바르카를 대신해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이번 전쟁에서 로마가 무릎 꿇은 후에는 이탈리아의 모든 도시국가와 부족이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다른 나라나 부족의 내정간섭을 받지 않게 될 겁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수천 명의 포로가 다시 한번 두 눈을 크게 뜨고 젊은 카르타고인 장군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하스드루발을 향해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럼 만약 로마가 카르타고에 항복하고 나서 우리 부족이 다시 로마와 동맹을 맺어도 카르타고 정부와 바르카 가문은 상관하지 않겠다는 거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대신 다시 한번 로마와 손잡고 우리 카르타고를 위협한다면 그때는 로마와 함께 당신의 도시가 지도에서 지워질 겁니다. 위대하신 바알 함몬께 맹세코 우리 카르타고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모든 이탈리아의 자유민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도시와 부족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겁니다!”

그가 연설을 마치자마자 독립의 열망을 가슴에 품은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희망으로 가득 찬 함성을 질러댔다.

* * *

부족자결주의.

하스드루발이 20세기 초 한반도에 삼일 운동의 시발점이 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이 새로운 이념은 순식간에 전 이탈리아에 번져나갔다.

그가 동맹도시 출신 포로들을 풀어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라틴 식민지를 제외한 모든 이탈리아의 도시에서 로마 연합에서 탈퇴하자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뜨겁게 울려 퍼졌다.

특히 그리스식 민주주의를 탄압해온 로마 원로원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리스계 식민도시의 평민들은 매일 같이 광장을 가득 메우며 시위를 벌여 친로마파 기득권 세력을 압박했다.

“그리스인의 운명은 그리스인이 정해야 한다! 로마는 내정간섭을 멈춰라!”

“더는 로마인이 얻을 전리품과 영토를 위해 피를 흘리기 싫다! 원로원은 로마와의 관계를 끊고 강제징집을 멈춰라!”

“로마 원로원이 폐쇄한 민회를 부활시켜라! 평민도 세금을 낸다! 우리도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로마 원로원은 지금까지 로마 연합에 소속된 도시국가에서 반로마 여론이 형성되려고 할 때마다 군단을 파견하거나 친로마파 기득권 세력에 무기나 자금을 지원해 동맹시의 평민세력을 탄압해 왔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칸나이에서 로마군이 잃은 병력은 전사자와 포로를 합쳐 약 9만 명.

이제 로마 원로원은 하밀카르와 남부 한니발이 지휘하는 군대를 견제할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기에도 벅찼기 때문이다.

결국 남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평민들의 거센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칸나이 전투가 끝난 후 2주일도 지나지 않아 로마 연합에서 탈퇴하고 한니발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군의 숙영지로 모여드는 여러 도시국가에서 보낸 사절무리와의 회담을 마친 다음 휘하의 장교들을 자신의 막사로 소집한 후 입을 열었다.

“모두 기뻐해라! 캄파니아와 아풀리아, 그리고 루카니 지역의 거의 모든 도시국가가 로마와의 관계를 끊고 우리 바르카 가문을 새로운 연합의 맹주로 추대했다! 올해 겨울은 숙영지의 천막 대신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카푸아의 성벽 안에서 침대에서 잠을 자며 보내게 될 것이다!”

장군의 말에 바르카 가문의 장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기쁨의 눈물을 글썽였다.

“드디어! 드디어 로마 연합이 금이 가기 시작했군요!”

“이제 며칠 후에는 로마 원로원이 보낸 사절이 장군님 앞에 무릎 꿇고 평화를 구걸하게 될 겁니다!”

하스드루발도 형의 말에 기쁜 와중에도 한 편으로는 새로운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원 역사보다 훨씬 많은 도시국가들이 한니발과 동맹을 맺기로 결정한 탓에 한니발의 군대가 로마군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영토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반면 한니발은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남부 이탈리아의 도시에서 병사를 징집하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본국의 지원이 없으면 병력을 충원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됐다.

‘남부 이탈리아에서 아직 로마편에 남은 곳은 라틴 식민지인 파이스툼과 시칠리아에서 가까운 레기움 뿐인가... 방어선이 상당히 길어지겠네. 로마가 항복해오지 않으면 하루라도 빨리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제해권을 완전히 되찾아야 한다. 그래야 이번 전쟁에서 이길 수 있어.’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