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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38화 (138/201)

[ 138 ] [137화] 로마의 자구책

로마의 9만 대군이 칸나이에서 궤멸당했다.

그 비보를 로마에 처음 전한 건 카누시움에 숨은 집정관 바로가 보낸 전령이 아닌 로마군의 포로들이었다.

한니발은 로마군 포로 중에서 원로원 의원 열 명을 뽑아 동료 전우 1만 명을 해방하고 싶으면 로마에 있는 동료 의원들을 설득해 자신이 내건 조건대로 강화조약 비준서에 서명을 해 오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조국에 비극적인 소식과 한니발의 제안을 전하기 위해 밤낮없이 말을 달렸다.

칸나이 전투가 끝난 지 닷새째 되던 날 로마군 포로들은 마침내 고향에 도착해 세르빌리우스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전장에 아버지나 아들을 내보낸 로마 시민들이 몰려와 말을 타고 카피톨리노 언덕을 향하는 열 사람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질문을 퍼부어 댔다.

“당신들 바로 집정관님께서 보낸 전령인가요? 벌써 전투가 끝난 거요?”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내 아들이 이번 전투에 출전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카르타고군을 무찔렀겠지요? 제 아들은 무사하겠지요?”

그러나 로마군 포로들은 그날의 참담한 기억과 전사한 전우들의 얼굴을 떠올리자 목이 메어서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숙인 채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 원로원 의원들이 모여 있을 쿠리아 호스틸리아를 향해 말을 몰아갔다.

로마군 포로들은 마침내 쿠리아 호스틸리아의 무거운 청동문을 열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원로원 의원들 앞에 섰다.

초조하게 집정관 바로와 메틸리우스가 보낼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던 원로원 의원들은 전투에 참여한 동료 의원 열 명이 손에 항아리를 들고 의회 건물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기겁하며 물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째서 원로원의 일원이신 여러분께서 전령 대신 이 먼 길을 오신 겁니까?”

한니발이 보낸 열 명의 포로 중 가장 상급자인 아빌리우스가 실로 꿰매기라도 한 듯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술을 억지로 열어 안색이 창백해진 동료 의원들에게 말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우리는 닷새 전 칸나이에서 카르타고군에게 크게 패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오직 성미가 불같은 마르켈루스만이 갓난아기의 머리만큼 커다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우리 군이 적보다 적어도 삼만 명은 더 많지 않았습니까! 이번엔 또 적장 한니발이 무슨 간악한 술수를 부린 겁니까?!”

“한니발은 아무런 계략도 쓰지 않았습니다. 양군은 정정당당하게 평야에서 대규모 회전을 벌였고 우리가 졌습니다.”

그 말에 맹장 마르켈루스조차 당황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럼 세 분이 손에 들고 계신 그 항아리는······.”

“메틸리우스 집정관님과 전직 집정관이신 게미누스 의원님과 아이밀리우스 의원님의 유골입니다. 적장 한니발은 마치 병사를 자기 수족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여 우리 군을 완전히 포위하고 학살했습니다. 전장에서 살아서 도망친 건 바로 집정관님께서 지휘하던 기병대 수천 기뿐입니다······.”

아빌리우스는 더는 복받쳐 오르는 비통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마르켈루스는 고개를 뒤로 젖혀 원로원 건물의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한니발이 지금까지 계략과 매복에 집착해 온 이유가 우리 군과 정면에서 부딪치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진짜 발톱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밀카르가 정말 교활한 사자 새끼들을 길러냈구나······.”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쿠리아 호스틸리아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에 본래라면 원로원 의원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의석이 거의 절반 가까이 비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기원전 3세기 후반의 로마 원로원의 정원은 300명.

그중에서 130명의 원로원 의원이 장교로서 칸나이 전투에 참전해 대부분 전사하거나 카르타고군에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동료 의원이 극히 적을 거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깊이 탄식했다.

아빌리우스는 그런 동료 의원들에게 다시 한번 입을 열어 한니발의 뜻을 전했다.

“한니발은 저에게 우리 로마와 강화조약을 맺고 전쟁을 멈추길 바란다고 원로원에 전하라고 말했습니다. 시칠리아에서 로마군이 전부 철수하고 전쟁배상금 이천 달란트와 포로 한 사람 당 오백 데나리우스의 몸값을 내면 이탈리아에서 군대를 철수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한 원로원 의원이 그에게 물었다.

“포로로 잡힌 로마 시민이 몇 명이나 됩니까? 또 그중에서 원로원 의원은 몇 명이나 되지요?”

“만 명 정도 되는 로마 시민이 카르타고군에 붙잡혔습니다. 원로원 의원은 저희를 포함해 삼십 명 정도 됩니다.”

아빌리우스의 대답에 그에게 질문한 의원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아직 칸나이 전투에 참전한 아들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다른 원로원 의원 몇몇이 동료 의원들에게 말했다.

“오백 데나리우스면 평범한 성인 노예 한 명 가격 아닙니까? 적장 한니발이 수전노인 페니키아인치고는 관대한 조건을 걸었군요.”

“우리 로마는 이번 패배로 하루아침에 인구의 백 분의 오를 잃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일단 한니발의 요구를 들어주고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러자 마르켈루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한니발에게 항복하자는 동료 의원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정신이 나간 겁니까?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께서는 세노네스족의 왕 브렌뉴스가 이끄는 갈리아인들이 로마를 불태우고 약탈하는 와중에도 카피톨리노 언덕 위에서 반년이나 농성하셨습니다! 지금 세르빌리우스 성벽 안에 적군이 한 명이라도 들어왔습니까? 우리 로마가 적과 조약을 맺는 건 오직 적의 항복을 받아들일 때뿐입니다!”

그 말에 항복을 입에 담았던 원로원 의원들이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해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의 말에 반박했다.

“마르켈루스 의원님의 말씀대로 적에게 항복하는 건 명예로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니발에게 붙잡혀 있는 로마 시민이 무려 만 명이나 됩니다! 일단 항복하는 시늉이라도 하면서 포로들을 되찾아 온 후 다시 전쟁을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원로원이 그런 식으로 치졸한 수작을 부리면 조국 로마가 로마 연합의 맹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게 됩니다. 로마연합의 결속에 금이 가면 당장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어도 카르타고인들은 닭장 속에 가둬 둔 암탉을 꺼내 목을 비틀 듯 언제든 자기들이 원할 때 우리의 조국을 멸망시킬 수 있게 되겠지요. 왜 그걸 모르십니까?”

이번에야말로 항복을 논하던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완전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거칠고 직선적인 마르켈루스의 말에 대국을 파악하는 지혜가 녹아 있음을 그들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켈루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빌리우스에게 말했다.

“존경하는 아빌리우스 의원님. 의원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 로마는 지금까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적에게 몸값을 지불하고 포로를 되찾아 온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를 잘 알고 계시지요?”

“물론입니다··· 우리 군단병이 쓸 물자를 사야 할 재물로 적에게 우리의 아들들을 해칠 검과 화살을 사 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어서 한니발에게 돌아가 원로원의 뜻을 전하십시오. 로마는 결코 카르타고에 항복하지 않을 것이며 포로의 몸값도 지불할 생각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참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도 마르켈루스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로마는 5백 년이 넘는 역사 동안 국가의 명예와 시민의 생명 중 한쪽을 택해야 할 때면 언제나 전자를 택해 왔다.

원로원 의원들은 선조들의 전례를 따라 나라가 어려울 때일수록 ‘정복되지 않는 로마’의 자긍심을 지키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결국 아빌리우스와 그의 일행 아홉 명은 고개를 숙인 채 쿠리아 호스틸리아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마르켈루스는 동료 의원 열 명이 다시 한니발에게 돌아가는 모습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이번 전투의 참담한 패배로 우리 로마는 역사상 전례 없는 존망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제 조국의 명예와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할 때입니다. 저는 그 첫걸음으로 가장 먼저 적장 한니발의 무서움을 가장 먼저 간파하신 파비우스 의원님의 복권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 * *

로마 원로원이 한니발이 제안한 강화조약을 거절한 뒤 일주일 후.

마르켈루스와 여러 귀족파 의원들의 노력 덕분에 파비우스는 다시 로마의 일곱 언덕 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몇 달 만에 명예와 권리를 되찾은 노장에게 조국으로 돌아온 날은 그의 58년 인생 중 가장 슬픈 날이 되었다.

“막시무스는 전우를 구하고 명예롭게 신들의 곁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로마 시내를 함께 걷던 도중 아들의 안부를 묻는 파비우스에게 마르켈루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파비우스는 떨리는 오른손으로 잠시 자신의 두 눈을 가렸다.

그의 주름진 손등 아래로 굵은 눈물 두 방울이 조용히 흘러 내려와 턱 끝에 맺혔다.

그는 눈물을 닦아 낸 후 다시 평소의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온 후 마르켈루스에게 말했다.

“아직 젊은 것이 이 늙은 아비보다 먼저 스틱스강을 건넜군요···.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느라 젊은 자식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도 없다니 야속한 일입니다.”

“막시무스는 젊은 원로원 의원 중에서 가장 유능한 젊은이였습니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국에 큰일을 해냈을 인재를 잃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대답을 마치며 마르켈루스는 화로의 여신 베스타의 여사제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폭도로 변한 로마 시민들을 바라보았다.

나풀나풀한 흰옷을 입은 열 명의 여사제는 구슬프게 울부짖으며 폭도들에게 애원했다.

“제발! 저희는 정말 결백합니다! 베스타 여신을 섬기기로 맹세한 후 남자의 손도 잡아 본 적 없습니다! 제발 풀어 주세요!”

그러나 이미 광기와 증오에 이성을 잃은 폭도 수천 명은 여사제들의 말을 무시한 후 광장 한복판에 커다란 구덩이를 판 다음 그녀들을 밀어 넣었다.

폭도들은 칸나이 전투의 패배가 신의 노여움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해가 진 뒤 거리를 돌아다니던 여사제들에게 간통죄를 뒤집어씌운 후 생매장해 제물로 바치려는 속셈이었다.

베스타 여신의 여사제는 로마 사회에서 존경받는 성직자이기 때문에 그녀들을 해치는 행위는 명백한 중범죄였지만, 아무도 폭도들의 행위를 말리지 않았다.

로마 원로원이 한창 흉흉한 사회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폭도들의 인신공양을 눈감아 주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파비우스는 베스타 여신의 여사제들의 비명을 애써 외면하며 마르켈루스에게 말했다.

“저런 비극이 또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카르타고인을 지중해에서 박멸해야 합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당장은 그럴 여유가 없을 겁니다. 칸나이에서 잃은 병력을 보충하려면 최소한 반년은 걸릴 테니까요. 그사이에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군이 시칠리아를 공격할까 봐 걱정스럽습니다.”

“우리의 힘이 부족하다면 우리와 뜻을 함께할 새로운 나라와 동맹을 맺고 그 힘을 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대로만 된다면 북아프리카에 있는 카르타고 영토를 초토화시킬 수 있고 그렇게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카르타고군이 입힌 손실을 회복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마르켈루스는 궁금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파비우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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