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 [138화] 새로운 위협 (1)
파비우스가 로마 시민권을 되찾았다는 소식은 8월 중순이 지나기 전에 이탈리아 남서부의 대도시 카푸아 부근으로 위치를 옮긴 한니발의 숙영지에 닿았다.
한니발은 자신의 막사에서 로마에 심어둔 첩자가 보낸 서신을 읽고 곁에 있던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언젠가 벌어질 일이긴 했지만, 로마 민회가 이렇게 빨리 파비우스의 사면에 찬성할 줄은 미처 몰랐군.”
“그러게. 로마 원로원의 귀족파 의원들이 머리를 잘 썼어. 칸나이에서 잃은 병력을 보충한다고 범죄자들을 사면하면서 파비우스를 거기에 끼워 넣었다고 하더라고.”
“로마의 정치인들이 전부 미누키우스 같지는 않다는 건가... 지금 파비우스가 다시 권력을 잡기라도 하면 굉장히 골치 아파지겠군.”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이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은 지난 2년 동안 지중해 곳곳에서 로마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둬왔다.
덕분에 로마는 원 역사의 같은 기간과 비교해 몇만 명이나 더 많은 병력과 영토를 잃고 말았다.
바르카 가문은 로마 정복의 꿈을 향해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뀌어 버린 역사가 일방적으로 카르타고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밀카르는 두 아들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군을 공격하는 동안 히스파니아에서 출발한 수송대가 남부 갈리아 지역을 경유 해 이탈리아 북부까지 도착할 수 있는 안정적인 보급로를 확보했다.
그러나 바르카 가문은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보급선을 로마군과 도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적지 않은 수비병을 서지중해의 해안지대 곳곳에 배치해야만 했다.
그런 이유로 하밀카르는 남부 이탈리아를 점령한 두 아들에게 보급품은 자주 보낼 수 있었지만, 지원군은 충분히 보낼 수 없었다.
로마가 항복을 거부한 지금, 한니발이 로마 정벌에 마침표를 찍으려면 먼저 해상 보급로를 확보해 본국 카르타고로부터 적어도 만 단위의 지원군을 더 데려올 필요가 있었다.
반면 로마는 신병 징집과 훈련이 끝나는 반년 뒤면 모든 병력을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를 지키는데 집중적으로 배치해 여전히 수적으로 한니발의 군대를 압박할 태세였다.
원 역사와 달리 바르카 가문에게 갈리아 남부와 사르데냐를 빼앗겼고 일찌감치 히스파니아 정벌을 포기해버렸기 때문에 방어해야할 거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하스드루발은 걱정에 빠진 형에게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파비우스라면 분명 다시 지구전을 펼치면서 우리의 보급선을 끊으려고 하겠지. 그래도 시칠리아만 되찾고 나면 카르타고에서 용병을 얼마든지 보내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봐. 내가 본국에 승전보를 전하고 시칠리아를 되찾은 다음 돌아올 테니까.”
“음... 꼭 네가 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승전보를 전하는 거면 기스코를 보내도 상관없을 거다.”
“기스코를 보내자고? 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지원군을 요청하는데 하급장교를 보내면 급이 안 맞잖아. 형이 직접 카르타고에 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장군인 내가 가야지. 형 설마 또 진지한 얼굴로 농담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농담이라니... 내 생각이 짧았다. 네가 카르타고에 다녀올 수밖에 없겠구나. 대신 상황을 봐서 시칠리아 공략은 보밀카르 매형에게 맡기고 일찌감치 이탈리아로 돌아오도록 해...”
한니발은 불안함이 조금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형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한니발 형이 전군을 지휘해왔지만, 이제는 지켜야 할 영토가 생겼으니 우리도 병력을 나눌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단독으로 군대를 지휘할 만한 장수가 턱없이 부족하니 걱정될 수밖에...’
원 역사의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둔 후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다른 카르타고의 장군들이 한니발에 비해 너무나도 무능해 로마군에게 연전연패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현재의 한니발은 아직 부하에게 군대를 맡겼다가 큰 손해를 입은 적이 없지만, 곧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유능한 장군인 하스드루발이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곁으로 돌아와 군대를 지휘해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형과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상황 봐서 형 말 대로할게. 그래도 만약 내가 금방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로마군과 싸울 때 한 가지만 조심해줘.”
“그게 뭔데?”
“마르켈루스라는 로마군 장군하고 전장에서 마주치면 정말 조심해야 돼. 지금까지 만났던 적장들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사납고 교활한 맹장이니까 말이야.”
“마르켈루스... 로마에 심어둔 첩자에게 그런 이름의 적장이 있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군. 알았어. 잘 기억해 둘게.”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에게 조만간 마주치게 될 강적에 대한 충고를 한 후 동맹도시 카푸아가 지배하는 항구에서 배를 타고 본국으로 출발했다.
* * *
기원전 216년 9월 초.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칸나이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지면서 전 지중해 세계의 정세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방위에 전 병력을 집중하기 위해 그리스 서부 해안 지대에 있는 일리리아 식민지를 포기하고 그곳을 지키던 군단을 본국으로 철수시켰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은 그 틈에 늘 탐내던 일리리아 지역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차지한 다음 몇 년 전 하스드루발과 맺은 약조를 지키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를 침략할 준비에 착수했다.
현대의 터키와 이란 지역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대왕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몇 년 전 한니발과 맺은 약조대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마케도니아를 공격하는 것을 견제하는 것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한니발의 원조 덕에 일찌감치 반란군을 진압하고 원 역사의 같은 시기보다 더 강한 세력을 자랑했다.
안티오코스 대왕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적대세력을 일소하고 스파르타를 비롯한 친 로마성향 그리스 도시국가와 이집트를 정벌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진정한 후계자로 거듭날 준비를 착실하게 진행해 나가고 있었다.
이처럼 격랑에 휩쓸린 지중해의 정세 변화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라는 로마뿐만이 아니었는데, 그중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도 있었다.
훗날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라는 묘호가 붙는 이집트의 파라오는 나날이 강성해지는 숙적 셀레우코스 제국을 주시하며 중신들 앞에서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칸나이 전투가 끝난 직후 아나톨리아 반도에 첩자를 파견해 강성해진 셀레우코스 제국의 동향을 염탐하도록 했다.
파라오의 명령대로 셀레우코스 제국의 수도 오론테스 강의 안티오케이아에서 첩보임무를 수행한 첩자는 거의 한 달 만에 임무를 마치고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왕궁 알현실로 급히 발걸음을 옮겨 왕좌에 앉아있는 파라오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미천한 종복이 감히 태양신의 아들이시자 이집트의 지배자이신 위대한 파라오를 뵙습니다.”
“번거로운 격식은 생략하라. 그래. 셀레우코스 제국의 동향은 알아봤나?”
“안티오코스 왕은 지난달 초 칠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반도 동쪽 끝에 있는 페레가몬 왕국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 냈습니다. 이제 로마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견제하는 동시에 병력을 나눠 우리 이집트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첩자의 말을 듣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깊이 탄식했다.
이미 광대한 아나톨리아 반도를 통일한 숙적 셀레우코스 제국이 그리스 남부까지 차지하고 나면 다음에는 이집트를 공격할게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집트가 셀레우코스 제국에 선제공격할 수도 없었다.
양국은 아직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내정치 상황에는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티오코스 대왕은 집권 초기에 과감하게 간신 무리를 숙청하고 원 역사보다 일찍 관제를 개혁해 문관과 무관으로 나뉘어 정쟁을 일삼던 신하들의 대립에 마침표를 찍고 안정적인 통치체제를 갖추었다.
반면 이집트는 간신 소시비오스와 아가토클레스를 중심으로 여러 권신이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나라 재정을 축내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그런 와중에도 셀레우코스 제국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많은 용병을 고용했고 그들에게 지급할 급료를 충당하기 위해 이집트 원주민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그런 이유로 이집트는 언제 반란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국내 사정이 불안정했고 그렇기에 단기 결전으로 제압할 수 없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침략할 여유가 없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첩자를 물러가게 한 후 알현실을 나와 왕궁 최상층에 있는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그는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시중을 드는 노예에게 간단한 주안상을 차려오도록 지시한 후 발코니로 나가 알렉산드리아 시내를 바라보았다.
근심 어린 파라오의 눈동자에 훗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게 되는 알렉산드리아의 등대의 장엄한 모습과 수많은 등불이 켜져 있어 마치 낮처럼 환한 거리가 눈에 비쳤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동지중해에서 가장 번화한 대도시의 아름다운 야경을 눈에 담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전경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별의별 짓을 다 했건만! 셀레우코스의 도적놈이 왕좌를 빼앗기 위해 칼을 가는 걸 보고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
그는 지금까지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피로 피를 씻어온 나날들을 떠올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왕좌에 앉기 전에 많은 정적을 암살하며 파라오가 되었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간신 소시비오스와 아가토클레스의 조언을 듣고 왕권을 위협한다고 판단한 측근들을 잔인하게 살해해 왔는데 그중에는 친어머니와 제사장인 친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그렇게 온갖 패륜을 저질러 오면서까지 지켜온 왕권을 오랜 원수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이 침실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파라오에게 보고했다.
“태양신의 아들이시자 이집트의 지배자이신 위대한 파라오시여. 방금 왕궁에 도착한 로마의 사절단이 전하를 알현하고 싶다고 전해왔습니다. 관례대로 밤이 늦었으니 내일 낮에 다시 오라고 전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고개를 돌려 시종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절단은 전부 몇 명이고 행색은 어떻더냐?”
“왕궁에 찾아온 로마의 사절단은 신분이 낮은 수행원을 제외하면 총 열 명이었습니다. 그자들은 모두 자주색 염료로 물들인 로마의 의복인 토가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종의 말을 듣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자주색 토가는 로마 원로원 의원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얼마 전 카르타고군에게 큰 패배를 당한 로마가 원로원 의원 열 명을 보내왔다면 이집트와 군사동맹을 맺으려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지중해 세계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는 이집트에서는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었던 것이다.
그는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시종을 불러세운 뒤 말했다.
“내일까지 기다릴 것 없다. 내 즉시 예복을 갖추고 알현실로 갈 테니 사절단을 왕궁으로 들이고 잘 대접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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