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40화 (140/201)

[ 140 ] [139화] 새로운 위협 (2)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로마의 사절단과 만나기 전에 시종들에게 자신의 옷을 갈아입히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속이 비치는 이집트의 전통 복장인 숄을 몸에 두른 여시종 세 명이 그의 옷을 벗긴 후 화려한 예복과 장신구를 파라오의 몸에 걸쳤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금실로 수를 놓은 이집트의 전통 의상 로인클로스를 허리에 두르고 파라오를 상징하는 뱀 모양 장식이 달린 두건을 머리에 쓴 후 알현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알현실로 들어서서 왕좌에 앉자 왕실 내관이 로마의 사절단을 프톨레마이오스 왕에게 소개했다.

그러자 사절단장인 파비우스가 일행 아홉 명과 함께 예를 갖추어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인사했다.

“진정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이시자 이집트의 파라오이신 프톨레마이오스 폐하를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뜻밖에 로물루스의 후손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요즘은 로마인들이 예전처럼 안심하고 지중해를 건너기 어려워졌다고 들었는데 오시는 길에 고생이 많으셨겠군요. 해적 무리 같은 카르타고인의 함대를 피해 험한 바닷길을 지나는게 보통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파라오의 말에 파비우스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언뜻 듣기에는 정중하고 따듯한 말에 뼈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카르타고가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를 점령하는 바람에 제해권에 구멍을 뚫려버린 로마의 절박한 상황을 파비우스에게 은근히 상기시키고 있었다.

그는 그럼으로써 로마 원로원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자 했다.

노련한 정치가인 파비우스는 젊은 파라오의 수작을 곧바로 눈치챘지만, 발끈하며 그의 말을 맞받아치지는 않았다.

현재 상황에서 사절단이 빈손으로 본국으로 돌아갈 경우 더 큰 손해를 보는 건 이집트가 아닌 조국 로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억지로 미소를 입가에 묻히며 아들뻘의 파라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위대하신 파라오께서 저희의 노고에 마음을 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로마는 간악한 카르타고의 해적들로부터 서지중해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거점인 시칠리아를 잘 지켜내고 있습니다. 덕분에 저희 사절단도 큰 어려움은 없이 이곳 알렉산드리아까지 올 수 있었지요.”

“그렇군요. ‘아직’ 로마의 국력이 건재한 듯하니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이유로 전쟁으로 바쁜 와중에 이 먼 곳까지 찾아오셨는지 궁금하군요.”

“위대하신 파라오께서 허락하신다면 우리 로마는 지금까지 다져온 이집트와의 우호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공동의 적을 무찌르기 위해 동맹을 맺고자 합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파비우스의 말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 기뻐하는 기색을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마치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로마의 적이라면 카르타고 아닙니까? 카르타고는 우리 이집트의 중요한 교역 상대입니다. 파비우스 의원님께서 그 사실을 모르고 계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잘 알고 있습니다. 이집트는 인도로 가는 카르타고 무역상들에게 길을 빌려주고 상당한 통행세를 받고 있다지요. 하지만 배은망덕한 카르타고인들은 파라오께서 베푸신 은혜 덕에 벌어들인 재물을 이집트의 적을 살찌우는 데 쓰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이미 잘 아시겠지만, 카르타고는 파라오께서 길을 내어주신 덕에 인도의 마우리아 제국과 교역해 매년 많은 이윤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벌어들인 재물로 군대를 육성해 이집트의 적인 셀레우코스 제국의 내전을 종식 시켰으니 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일입니까?”

그 말을 듣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자기도 모르게 눈가에 조금 힘을 주고 말았다.

사실 그도 한니발이 몇 년 전 숙적 셀레우코스 제국의 반란군을 진압한 사실에 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카르타고와 척을 지고 무역로를 차단해 버리면 인도의 패자 마우리아 제국의 돈줄을 끊는 형세가 된다.

그는 이집트와 마우리아 제국의 우호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카르타고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집트 왕실이 간신히 파산을 면하고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마우리아 제국과의 향신료 무역에서 얻는 막대한 수입이었기 때문이다.

파비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분노와 곤궁함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짓자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갑자기 이집트가 카르타고와 적대하게 되면 파라오께서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신다는 것은 우리 로마 원로원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시면서 그런 제안을 하신단 말씀입니까?”

“물론 아무런 대안도 준비하지 않고 이런 제안을 드린 건 아닙니다. 앞으로 오 년 동안 나일 강의 축복 덕에 남아도는 이집트의 밀을 우리 로마가 시세보다 5할 더 비싼 가격에 전부 사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로는 마우리아 제국과의 무역이 중단되면 왕실이 입게 될 재정손실을 만회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몇 년 정도는 버티실 수 있겠지요. 그리고 우리 로마가 적장 한니발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고 마케도니아의 침략을 막고 나면 함께 로마와 이집트의 연합군이 카르타고를 공격하는 겁니다!”

“카르타고를 친다...”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나면 도시를 약탈해서 얻은 전리품은 모두 우리 로마가 갖는 대신 카르타고의 영토는 파라오께 바칠 것을 약속드립니다. 파라오께서도 카르타고인들이 비옥한 리비아 땅을 경작해 얼마나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는지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파비우스의 제안에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카르타고인들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비옥한 북아프리카 땅에서 상품작물을 재배해 매년 평균 1만 달란트에 달하는 엄청난 수입을 올려 왔기 때문이다.

1차 포에니전쟁이 끝나고 카르타고가 로마에 물어낸 배상금이 약 3천5백 달란트인 것을 고려하면 1만 달란트만 해도 이미 작은 왕국의 1년 치 국가예산 정도는 가볍게 뛰어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거기에 지금은 하스드루발이 인도에서 들여온 설탕을 북아프리카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한 덕분에 카르타고의 농업수입은 최근 몇 년 동안 몇 배나 더 늘어난 상태였다.

그는 파비우스가 던진 미끼를 당장 물 뻔했지만,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상당히 관대한 조건이군요. 하지만 우리 이집트는 당장은 이탈리아 반도에 지원군을 보낼 여력이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왕이 알렉산드리아를 불태우기 위해 대군을 모으고 있으니 말입니다.”

“로마 원로원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로마가 파라오께 가장 부탁드리고 싶은 건 바로 그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대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과연...! 셀레우코스 제국의 방해 때문에 로마와 동맹을 맺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마케도니아를 견제하지 못해 곤란하셨던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제국이 나날이 강성해지는 걸 늘 두려워해 왔지요. 이미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파라오께서 셀레우코스 제국을 공격하시면 중장보병 이만 명을 지원군으로 보내기로 로마 원로원과 협약을 맺었습니다.”

“정말 주도면밀하십니다. 분명 그리스의 정예 중장보병대가 가세하면 건방진 안티오코스의 군대를 무찌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카르타고도 셀레우코스 제국에 지원군을 보낸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텐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이십니까?”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말을 듣고 파비우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부분도 이미 손을 써놓았습니다. 카르타고인들은 곧 오랜 동맹에게 배신당해 발목을 잡히고 말 겁니다.”

* * *

파비우스가 카르타고의 동맹국들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갈 음모를 세우고 있을 때 하스드루발은 오랜만에 전리품을 가득 실은 함대를 이끌고 고향으로 향했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카르타고까지는 가장 빠른 뱃길은 시칠리아를 지나 곧바로 북아프리카로 향하는 항로였다.

그렇지만 그는 이탈리아 반도 서쪽에 떠 있는 섬 코르시카와 히스파니아 동부 해안지대를 따라 빙 돌아가는 항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시칠리아가 로마의 지배하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전리품을 가득 실은 느린 수송선이 로마 해군의 습격을 받을 확률을 줄이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그런 이유로 하스드루발은 9월 중순이 돼서야 오랜만에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타고 있는 기함이 항구에 점점 가까워지자 뱃머리에 서서 카르타고의 장엄한 성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와! 겨우 몇 년 만에 카르타고의 방어가 더 단단해졌구나!”

카르타고의 해외파 정치인들은 바르카 가문의 사람들이 로마와의 전쟁에 몰두하는 사이 하스드루발 덕에 더욱 풍족해진 정부 예산으로 카르타고의 성벽 위에 다양한 방어시설을 설치했다.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의 성벽 위에 아르키메데스가 설계한 투석기와 노포,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함을 낚아채서 뒤집어버릴 수 있는 기중기, 그리고 아르키메데스의 불을 뿜을 수 있는 화염방사기 등을 보면서 감탄했다.

항구의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해군 당직 장교가 카르타고의 상징인 바알 함몬의 손바닥 모양 선수상을 단 배 수십 척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병사들에게 외쳤다.

“바르카 가문의 함대가 입항한다! 어서 수문을 열어라!”

장교의 명령을 들은 해군 병사들은 즉시 수문 개폐를 담당하는 리비아 출신 노예들에게 깃발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짙은 구릿빛 근육에 질 좋은 기름을 바른 리비아 출신 노예 수백 명이 수문을 가로막은 굵은 쇠사슬을 육지로 끌어올렸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공중에서 보면 항아리 모양으로 보이는 카르타고의 항구 코톤에 갤리선을 정박시킨 후 장군이 하선할 수 있도록 배 옆에 계단을 설치했다.

하스드루발은 고향의 흙을 밟자마자 14살 때 처음 히스파니아의 불 경매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카르타고에 돌아왔을 때와 비슷한 벅찬 감정이 가슴을 가득 메우는 것을 느꼈다.

그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이 매형 보밀카르 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한니발 장군님 만세! 하스드루발 장군님 만세!”

“카르타고의 수호신 바알 함몬이시여! 위대한 승리를 거둔 바르카 가문을 영원히 축복하소서!”

그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배가 정박하기도 전에 모여든 수천 명이 시민들이 항구를 가득 메우고는 환호성을 질러댔다.

하스드루발이 본국 정부에 승전보를 전하기도 전에 이미 무역상들의 입을 통해 카르타고에 바르카 가문의 두 형제가 칸나이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진 것이다.

이번에도 그를 마중 나온 하스드루발의 큰 매형 보밀카르는 배에서 내린 처남을 얼싸안으며 기뻐했다.

“작은 하스드루발 처남!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었는데, 이제 얼굴에서 장인어른의 청년 시절 모습이 보이는구만!”

“정말 오랜만이에요 큰 매형! 여전히 건강해 보이셔서 마음이 놓이네요! 그나저나 전쟁 중인데도 시민들의 표정이 정말 밝네요?”

“전부 한니발 처남과 자네 덕분이지! 며칠 전에 두 사람이 칸나이에서 로마의 십만대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이 전해졌거든! 요즘은 시내 어디를 가든 바르카 가문을 칭송하는 얘기만 들려오고 있어. 장인어른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라니까?”

“벌써 승전보가 전해지다니... 역시 무역상들이 어지간한 첩자보다 정보가 빠르네요. 다들 이미 알고 계셔도 관습대로 백인회 의원님들께 보고를 드려야겠지요. 곧 전리품을 가지고 비르사 언덕을 올라갈게요.”

“그럴 줄 알고 미리 소가 끄는 수레와 전차를 준비해뒀어. 자! 어서 가자!”

하스드루발은 큰매형과 함께 항구 밖으로 나간 후 말 네 마리가 끄는 전차에 올랐다.

그는 전차 위에 서서 거리로 몰려나와 꽃잎을 뿌리고 환호성을 질러대는 카르타고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비르사 언덕 위에 있는 100인회의 의사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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