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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42화 (142/201)

[ 142 ] [141화] 하스드루발의 분노

하스드루발은 병사가 말을 대령하자마자 즉시 안장 위에 올랐다.

상황이 급했지만, 인파가 북적이는 시내에서 전력 질주할 수는 없었기 그는 전력질주 하지 않고 구보로 말을 달렸다.

그럼에도 워낙 카르타고 시내가 번잡하다 보니 몇몇 시민들은 뒤늦게 말이 달려오는 것을 알아채고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가 시민광장을 지날 때 한 중년 여인이 뒤에서 달려오는 말을 피하다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석류가 가득 들어있는 바구니를 땅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꺄아악!”

바닥에 나뒹구는 석류 중 대여섯 개가 하스드루발이 탄 말의 발굽에 짓밟히면서 힘없이 바스러져 붉은 과즙을 내뿜었다.

여인은 곤죽이 되어버린 상품을 보고는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아이고... 저걸 다 팔아야 오늘 애들 먹일 빵을 살 수 있는데...”

하스드루발은 잠시 말을 멈춘 후 허리춤에 찬 돈주머니에서 은화 1세겔을 꺼내 건네주며 상인에게 사과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나? 미안하게 됐네. 공무가 급해 광장에서 말을 달릴 수밖에 없으니 이해해 주게.”

“아... 감사합니다 나으리! 겨우 석류 몇 개 뭉개졌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돈을 주시다니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4일 치 임금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여인을 보고 미소 지은 후 다시 말을 달려 큰매형이 기다리고 있는 의회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 입구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초병 두 명이 말에서 내리는 하스드루발을 알아보고 무거운 청동문을 열며 말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어서 들어가시지요. 이미 모든 백인회 의원님들께서 마실리 부족의 왕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하스드루발은 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급한 발걸음으로 의원 회관에 들어섰다.

그러자 그의 눈에 아직 앳되고 잘생긴 얼굴과 마른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가 눈에 띄는 젊은 청년이 약간 어색한 발음의 페니키아어로 열변을 토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바로 마실리 부족의 왕자 마시니사였다.

“존경하는 카르타고의 백인회 의원 여러분! 제발 우리 마실리 부족을 도와주십시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제 부친이신 가이아 전하께서는 평생 카르타고에 충성해 오시지 않았습니까!”

마시니사는 간곡한 목소리로 카르타고의 백인회 의원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카르타고의 유력자들은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그의 요청을 수락하지도, 거절하지도 못한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웅성거릴 뿐이었다.

카르타고 백인회는 될 수 있으면 시칠리아 원정을 위해 준비한 병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약 한 달 뒤 겨울이 시작되면 지중해의 바람이 거칠고 예측하기 어려워져 시칠리아를 공격하기 어려워진다.

무리하게 바다 건너의 적을 공격하려다 적군이 아닌 풍랑에 수만 명의 병사와 수백 척의 전함을 잃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 백인회는 겨울이 오기까지 남은 한 달을 잘 활용해 로마가 칸나이에서 입은 피해를 아직 회복하기 전에 시칠리아를 공격해 제해권 확보를 위한 거점을 마련하고 싶었다.

하스드루발은 마시니사의 발언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큰매형 보밀카르의 곁으로 다가가 인사했다.

“매형. 저 왔습니다.”

“처남 왔어?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왜 갑자기 누미디아인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한 겁니까?”

“올해 초 왕위에 오른 마사에실리족의 왕 시팍스가 마실리 부족을 기습공격 했다는군. 아무래도 우리가 로마와 전쟁을 하느라 누미디아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했나 봐.”

“하... 그 시팍새, 아니 시팍스가 벌써 왕이 됐군요.”

하스드루발은 매형의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 멍청한 놈이 벌써 깜짝쇼를 벌이는구나. 사리분별 못하고 기분대로 움직이는 놈은 어중간하게 유능한 자보다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운데... 정말 골치 아프군.’

원 역사의 마사에실리족의 왕 시팍스는 기원전 206년 히스파니아를 완전히 정복한 스키피오의 회유에 넘어가 로마와 손을 잡고 카르타고와 그 동맹인 마실리 부족을 공격한다.

그대로 마사에실리족이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면 그는 지중해 최강대국 로마의 지지를 등에 업고 카르타고의 영토 대부분과 누미디아의 영토를 아우른 거대한 통일 왕국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시팍스는 1년도 지나지 않아 로마를 배신하고 이미 패색이 짙은 카르타고의 편으로 돌아서 버린다.

카르타고 백인회를 협박해 얻은 마시니사의 약혼자이자 카르타고 최고의 미녀 소포니스바와 결혼한 후 여전히 조국을 사랑하는 아내의 설득에 넘어가고 만 것이다.

그 후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아프리카로 쳐들어온 스키피오와 전장에서 맞붙어 대패해 포로로 잡힌 후 평생 독방에 감금되어 살아가다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러나 원 역사에서 시팍스가 얼마나 무능했는지 잘 알고 있는 하스드루발이었기에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는 잠시 혼자 궁리하다 보밀카르에게 물었다,

“매형 대체 어떻게 마사에실리 부족이 마실리 부족을 이렇게 빨리 몰아붙였을까요? 두 부족의 세력이 엇비슷하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그게 마시니사 왕자의 말에 따르면 시팍스 왕의 군대에 청동 흉갑에 긴 창으로 무장한 그리스인 중장보병이 몇천 명이나 있었다고 하더라. 두 부족의 기병 전력이 비슷한 상황에서 마사에실리족의 보병대가 갑자기 강해지는 바람에 전쟁이 쉽게 끝나버린 모양이야.”

“도저히 믿기지 않네요. 가난한 유목민이 임금이 비싼 중장보병을 몇천 명이나 용병으로 고용할 여유는 없었을 텐데...”

하스드루발은 백인회 의원들과 마찬가지로 가능하면 올해 안에 시칠리아 원정을 시작하고 싶었기에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시팍스가 로마나 다른 적국과 결탁한 게 아니라면, 아직 그놈을 겁줘서 마실리족과 화해시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으로서는 정보가 부족하니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네.’

바로 그때 의회 건물의 입구 쪽에서 굳게 닫혀 있던 묵직한 청동문이 열리는 요란한 소리가 백인회 의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덮어버렸다.

- 끼이이이익

하스드루발과 마시니사, 그리고 백인회 의원 몇 명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 한 명이 의회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병사는 여전히 웅성거리고 있는 의원들 앞에 서서 수페트인 이테르바알에게 말했다.

“존경하는 이테르바알 수페트님. 방금 마사에실리 부족의 사절이 의회 건물 앞으로 찾아왔습니다. 백인회 의원님들께 시팍스 왕의 뜻을 전하고 싶다고 하는데 관례대로 마시니사 왕자님과의 회담을 마치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병사가 말을 마치자마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거의 동시에 입을 닫고 병사와 이테르바알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이테르바알은 잠시 자신의 뒷자리에 앉아있는 동료 수페트 카르탈론과 목소리를 낮추어 상의한 후 병사에게 말했다.

“마실리 부족과 마사에실리 부족의 사절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건 관습에 어긋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한다. 어서 마사에실리 부족의 사절을 안으로 들여라.”

병사는 수페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즉시 시팍스가 보낸 사절을 두 수페트 앞으로 안내했다.

거만한 걸음걸이로 의회 건물 안으로 들어온 사절은 속주의 사절이 마땅히 갖춰야 할 예에 따라 수페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지 않고 고개를 뻣뻣하게 쳐든 채로 백인회 의원들에게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카르타고의 백인회 의원 여러분! 저는 여러분께 누미디아 왕국의 적법한 왕이시자 이집트의 지배자 파라오의 벗이신 위대한 시팍스 전하의 뜻을 전하러 온 나라바스라고 합니다!”

사절의 오만한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카르타고인과 마시니사가 인상이 험악해졌다.

사절이 자신을 ‘마사에실리 부족’의 왕이 아닌 ‘누미디아 왕국’의 왕이 보냈다고 자신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이는 대놓고 카르타고 정부를 상대로 반역을 일으키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행동이었다.

하스드루발은 사절의 말을 듣고 시팍스 왕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카르타고를 상대로 반역을 꾀하고 있는지를 알아챈 후 옆자리에 앉아있는 보밀카르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사에실리 부족이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서 마실리 부족을 공격했군요. 이집트가 뒷배라고 우리를 겁주려는 의도 같은데, 덕분에 시팍스 왕이 어떻게 몇천 명이나 되는 그리스인 병사를 데리고 있었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처남 말대로야. 이집트의 파라오는 스파르타같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고용한 용병을 잔뜩 데리고 있다고 들었어. 그중 일부를 떼어내서 배편으로 보내 누미디아의 내전에 개입한 모양이군. 그런데 대체 왜 파라오가 그런 짓을 한 거지?”

“분명 로마 원로원이 이집트와 마사에실리 부족 사이에서 수작을 부렸을 겁니다. 이집트는 우리가 셀레우코스 제국과 마케도니아하고 가깝게 지내는 걸 은근히 경계해 왔으니까요.”

이집트는 원 역사에서 2차 포에니전쟁 당시 적극 군사개입을 하지는 않았지만, 기원전 210년에 로마와 동맹을 맺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로마에 식량과 전쟁물자를 지원한 카르타고의 적국이다.

하스드루발은 이제 더는 카르타고와 마사에실리 부족이 평화롭게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이렇게 중요한 시국에 통수를 맞다니! 이럴까 봐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속주민에 대한 대우를 열심히 개선해 왔는데! 시칠리아가 아무리 전략적 요충지라도 적대세력을 등 뒤에 남겨두고 원을 떠날 수는 없지. 결국 시팍스 왕과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나?’

백인회 의원들은 하스드루발과 같은 역사 지식은 없지만, 카르타고의 속주에 외국의 군대를 멋대로 끌어들여 내전을 벌인 마사에실리 부족의 만행에 격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의 주군처럼 영민하지 못한 사절은 그런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점점 얼굴이 불에 달군 쇠처럼 벌게져 가는 백인회 의원들에게 계속 시팍스 왕의 뜻을 전했다.

“위대하신 누미디아의 지배자 시팍스 전하께서는 카르타고가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수용한다면 앞으로도 양국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페트 이테르바알은 이미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시 억누르고 사절에게 말했다.

“어디 한번 지껄여 봐라.”

“시팍스 전하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누미디아 왕국의 지배자 시팍스 왕과 동등한 입장에서 동맹을 맺는다!

둘째! 카르타고의 영토로 도망친 마실리 부족의 왕 가이아와 그의 자손들을 체포하여 누미디아 왕국에 신병을 인도한다!

셋째! 양국 간의 우호 관계를 다지는 의미에서 북아프리카 최고의 미녀 소포니스바를 누미디아 왕국의 지배자 시팍스 왕과 혼인시킨다!”

사절이 말을 마치자마자 모든 카르타고인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일제히 아우성쳤다.

“말젖이나 짜던 유목민놈이 실성한 모양이구나!”

“파라오의 권세만 믿고 아주 미쳐 날뛰는군! 전쟁이다! 바알 함몬의 불꽃이 너희를 불태울 것이다!”

그때 하스드루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끼눈을 뜨고 사절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자 소리를 지르던 백인회 의원들이 그 흉흉한 기세를 보고는 숨을 죽이며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하스드루발은 사절의 바로 앞에서 서서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팍스는 소포니스바가 내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딴 소리를 지껄인 거냐?”

사절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체격이 건장한 장수가 바르카 가문의 하스드루발이라는 사실을 알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시팍스 왕은 과거 1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 원로원의 압박에 힘없이 굴복한 카르타고 정부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이번 일을 꾸몄다.

마사에실리 부족의 지도층은 하나같이 뛰어난 장수인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만 카르타고에 없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대군을 맡길만한 유능한 지휘관이 없어 이집트와 동맹을 맺은 자신과 싸울 맘을 먹지 못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여긴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탈리아에 있어야 할 하스드루발이 눈 앞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으니 마사에실리족의 사절이 기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스드루발은 사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그의 오른쪽 손목을 베어버렸다.

“끄아아아아악!”

사절은 자신의 오른손이 달려있던 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고 고통과 공포에 몸부림치며 바닥에 주저앉아 비명을 질렀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이게 내 대답이다! 네 주인에게 돌아가서 전해라! 내년 봄이 오기 전에 마사에실리 부족은 지중해에서 사라질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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