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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43화 (143/201)

[ 143 ] [142화] 통수가 난무하는 지중해 세계

카르타고 정부가 마사에실리족에게 선전포고했다는 소식은 첩자와 무역상의 입을 타고 전 지중해에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그 소식을 들은 각국의 지도자와 정치인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당황한 사람은 누미디아의 지배자를 자처한 시팍스 왕이었다.

하스드루발에게 오른손이 잘린 나라바스는 카르타고와 누미디아의 국경선에 마사에실리족 군대가 지은 숙영지로 돌아와 자신의 왕에게 보고했다.

시팍스 왕은 눈물을 글썽이는 신하의 보고를 듣고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가 어째!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원정을 포기하고 우리를 공격할 거라고? 게다가 지휘관이 하필이면 하스드루발 바르카야? 칸나이 평원을 로마군의 피로 물들인 괴물과 싸우게 되다니! 이런 빌어먹을!”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옥좌 옆에 엎드려서 자고 있던 애꿎은 사냥개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깨갱!

시팍스는 덩치 큰 개가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알현실 밖으로 도망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나라바스에게 말했다.

“그래서. 카르타고 시내의 분위기는 좀 어떻더냐? 어느 나라나 부족의 용병이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지 정도는 봐 뒀겠지?”

“그··· 그게··· 제가 예상치 못하게 큰 부상을 입는 바람에 경황이 없어서······.”

“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 네가 오른손이 잘린 건 하스드루발을 만나고 나서가 아니냐! 카르타고에 도착하자마자 외팔이가 되기라도 했단 말이냐? 거기 누구 없느냐! 당장 이 빌어먹을 놈을 옥에 가둬라! 왕궁으로 돌아가면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남은 손도 잘라 버릴 것이다!”

“네? 전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시팍스 전하!”

시팍스 왕의 친위대는 울부짖는 나라바스를 왕의 막사에서 끌어내 형장으로 끌고 갔다.

시팍스 왕은 나라바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다시 옥좌에 앉더니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오른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하스드루발이라··· 그 하스드루발 바르카란 말이지······.”

그는 지금까지 약 30년을 살아오면서 선왕을 오랫동안 모셔온 마사에실리족의 중신들에게 로마의 무서움에 대해 자주 들어 왔다.

1차 포에니 전쟁 때 카르타고의 편에 서서 싸웠던 선왕과 마사에실리족 장수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어린 시팍스 왕자에게 자기가 젊은 시절 시칠리아에서 로마군과 전투를 벌이던 때의 얘기를 해 주었던 것이다.

그때마다 시팍스는 하나같이 중장갑을 몸에 두른 로마 군단병이 굶주린 메뚜기떼처럼 끝없이 몰려와 평원을 가득 메우는 상상을 하며 몸서리쳤다.

그런데 이제 그 무서운 로마군 9개 군단을 반나절 만에 궤멸시킨 적장과 검을 맞대게 생겼으니 그가 하스드루발을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팍스 왕은 잠시 그 상태로 눈을 감고 고민하다 뭔가 생각이 났는지 눈을 부릅뜨더니 막사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병사에게 말했다.

“거기 누구 없느냐!”

왕의 부름에 병사 한 명이 막사 안으로 들어와 경례하자 그가 말을 이어 나갔다.

“당장 나라바스의 두 아들을 이리 데려와라!”

병사는 왕명이 떨어지자마자 빠른 발걸음으로 막사 밖으로 나가 하급장교인 나라바스의 두 아들을 데려왔다.

시팍스 왕은 자기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두 청년에게 말했다.

“너희들의 아버지에게 어떤 벌이 내려질지는 이미 들었겠지.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카르타고에게 승리하면 이번만은 특별히 나라바스를 사면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그러려면 너희들이 꼭 해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나라바스의 두 아들 중 장남이 여전히 머리를 조아린 채로 왕에게 대답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무슨 일을 시키셔도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너희 둘 중 형은 카르타고로 가서 내가 카르타고 정부와 강화조약을 맺고 항복할 것처럼 말을 하면서 시간을 끌어라. 그동안 동생은 당장 말을 타고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파라오께 지원군을 더 요청해라.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너희들의 아버지를 반드시 풀어 주는 건 물론이고 너희들에게 영지를 내릴 것을 약속하마.”

* * *

시팍스 왕의 막사를 나온 나라바스의 두 아들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나라바스의 차남은 형과 헤어진 후 호위 기병 50기와 함께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로 출발했다.

시팍스 왕의 숙영지가 있는 바르라다스강 유역과 알렉산드리아 사이의 거리는 거의 천 킬로미터나 됐다.

그렇지만 나라바스의 차남은 아버지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밤낮없이 말을 달려 겨우 11일 만에 파라오의 왕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먼 길을 달려온 사절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태도는 겉으로 보기에만 정중할 뿐 알프스의 만년설처럼 냉랭하기만 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무릎 꿇고 추가 지원군을 보내 달라고 간청하는 시팍스 왕의 사절에게 애써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소중한 동맹인 누미디아 왕국이 위기에 처했다니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군요. 하지만 사절께서도 아시다시피 이제 몇 주만 지나면 겨울이 시작됩니다. 지중해의 겨울바람은 거칠고 예측하기 어려우니 도저히 그곳까지 병력을 수송할 방법이 없군요.”

“위대하신 파라오시여!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육로로 지원군을 보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거리가 멀어 보병은 무리라도 기병만이라도 먼저 보내 주시면 시팍스 전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이런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어 마음이 아픕니다만, 간악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 안티오코스가 항상 비옥한 나일강 유역을 노리고 있어 기병 전력을 외국으로 보내기는 어렵군요. 내년 봄이 되면 지원군을 보낼 테니 시팍스 왕께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는 카르타고군과의 전투를 피하고 때를 기다리시라고 전해 주십시오.”

나라바스의 차남은 파라오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 힘없는 발걸음으로 알현실을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마사에실리족의 사절이 왕궁 밖으로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후 알현실을 나와 예복을 화려한 연회복으로 갈아입은 후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은 왕궁의 연회장으로 향했다.

속이 비치는 숄을 입고 그리스식 ㄷ자 모양 식사용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궁녀 수십 명이 파라오가 다시 술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들 중 가장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총애를 받는 궁녀 한 명이 파라오에게 팔짱을 끼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저를 버려 두시고 어디 가셨다가 이제야 오십니까?”

“아아, 말똥 냄새나는 야만인의 푸념을 들어주고 왔다. 지원군 보내 주세요! 지원군 조금만 더 보내 주세요! 파라오 노릇도 보통 힘든 게 아니군.”

“감히 야만인 주제에 태양신의 아들을 귀찮게 하다니! 죽어 마땅한 자네요!”

“그렇지만 아직 쓸모가 있는 자들이라 잘 얼러 줘야 하니 내가 답답한 거다. 내년에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과 함께 셀레우코스 제국을 치기 전까지는 그놈들이 카르타고의 발목을 꽉 잡아 줘야 하거든.”

“카르타고요? 궁 안에서만 사는 제게도 카르타고군이 로마의 대군을 크게 이겼다는 소식이 들려오던데, 그 유목민들이 카르타고군을 이길 수 있을까요?”

“못 이기겠지. 그러니까 내 피 같은 병사를 더 보낼 생각이 없는 거고. 아마 마사에실리족은 한 삼 년쯤 지나면 카르타고인의 손에 씨가 말라 버리지 않을까? 뭐 그때면 이 프톨레마이오스가 가증스러운 셀레우코스 제국을 정복하고 안티오케이아 시내에서 개선식을 벌이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말을 마치자 궁녀 수십 명이 거의 동시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 * *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궁녀들을 끼고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은 열심히 한니발을 이탈리아 밖으로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파비우스는 쿠리아 호스틸리아 한가운데에 서서 동료 의원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로마 원로원의 동료 의원 여러분. 칸나이에서 벌어진 비극이 보여 주듯 한니발이 지휘하는 군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은 용기가 아닌 만용입니다. 이제는 적의 강력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굶주린 사자를 이탈리아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전 로마인이 단결해야 합니다.”

이제는 평민파 의원들도 대부분 파비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니발을 상대로 지구전을 펼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늘 압도적인 힘으로 조국의 적을 분쇄해 온 로마인들은 머리로는 지구전이 한니발을 물리칠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이해해도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자괴감까지 억누르기는 어려웠다.

한 평민파 의원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

“어쩌다 우리 로마가 카르타고군만 보면 도망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지하에 계신 선조들께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눈물 흘리고 계시겠지요.”

“우리가 피해야 하는 건 카르타고군이 아닌 한니발의 군대입니다.”

“그게 그 얘기 아닙니까?”

“지금까지는 그랬지요. 하지만 앞으로는 좀 다를 겁니다. 칸나이의 비극 이후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의 거의 전체를 차지했습니다. 그 넓은 지역을 다 지키려면 한니발은 부대를 몇 개로 나누어 부하 장수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한니발이 직접 지휘하는 군대는 어떻게든 발목을 잡는 사이 다른 적장이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을 적극 공격하면 전황을 바꿀 수 있겠습니다!”

그때 바로가 칸나이에서 대패한 후 실질적으로 평민파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말했다.

“좋은 전략입니다. 하지만 한니발의 발목을 잡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그 말에 파비우스가 고개를 돌려 그라쿠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역할에는 존경하는 마르켈루스 의원님께서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파비우스의 말에 마르켈루스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에게 임페리움(군권)을 맡겨 주신다면 이 목숨을 다 바쳐 한니발의 발목을 물어뜯겠습니다.”

마르켈루스에게 군권을 준다는 말에 많은 원로원 의원들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마르켈루스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부하들을 거리낌 없이 사지로 내모는 거칠고 비정한 장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로마 최고의 맹장인 데다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파비우스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듯 그라쿠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이집트가 세력을 너무 키워 나가는 것도 걱정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정말 그리스 연합군과 함께 셀레우코스 제국을 물리치고 부유한 시리아까지 차지해 버리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이집트는 지중해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되어 버릴 겁니다.”

그 말을 듣고 파비우스가 희미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이집트의 파라오를 상징하는 동물은 뱀이라지요? 존경하는 그라쿠스 의원님. 만약 길이가 일 큐빗(약 30cm)도 안 되는 뱀이 기를 쓰고 코끼리를 삼키려 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그야 코끝도 삼키지 못하고 턱이 찢어져 버리겠지요.”

“제 생각도 의원님과 같습니다. 이번 대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위대한 정복자였던 선왕과는 달리 그릇이 작은 인물입니다.”

“파라오가 시리아를 다스릴 능력이 없다고 보시는 거군요.”

“맞습니다. 그는 그리스인인 자신을 미워하는 이집트 원주민이 반란을 일으킬까 봐 늘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집트가 시리아를 집어 삼킨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제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군이 알렉산드리아로 들이닥치겠지요. 과연··· 그래서 이집트와 셀레우코스 제국 사이의 싸움을 부추기신 거군요. 어느 나라가 이기든 미래에 로마의 적이 될 수도 있는 두 나라가 모두 피해가 막심할 테니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래도 기왕이면 이집트가 이기는 편이 우리에게 더 유리하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시리아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꼼짝 못 하게 된 이집트의 뱀을 잡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조국 로마는 아무도 감히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전 지중해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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