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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44화 (144/201)

[ 144 ] [143화] 눈에는 눈, 통수엔 통수 (1)

기원전 216년 10월 중순.

마사에실리족의 사절이 이집트로 출발하던 날, 하스드루발은 시팍스 왕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카르타고군 5만 명과 마실리족의 왕자 마시니사가 데리고 온 누미디아 기병 2백 기를 이끌고 카르타고의 성문을 나선 후 장교들에게 명령했다.

“마시니사 왕자의 말에 따르면 마사에실리족의 군대는 카르타고에서 서쪽으로 오십오 스타디온(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 있다고 한다.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강행군이 계속될 테니 중간에 낙오하는 병사가 생기지 않도록 잘 챙기도록 해라.”

카르타고군 병사들은 장군의 명령대로 현대의 알제리와 튀니지가 있는 지역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굽이치며 흐르는 바그라다스강을 따라 힘차게 서쪽으로 행군했다.

하스드루발과 카르타고군 병사들은 행군을 시작한 지 닷새 만에 카르타고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영토와 누미디아 속주의 경계선 부근에 지어진 마사에실리족 군영을 간신히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때 하스드루발의 곁에 있던 마시니사가 오른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약 10km 밖에 있는 적진을 바라보더니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제가 며칠 전 카르타고로 도망칠 때보다 마사에실리족의 군영 규모가 더 커졌습니다. 아무래도 반역자 시팍스가 요 며칠 사이 자기 영지에서 더 많은 병사를 데려온 모양입니다.”

“왕자님께서는 이렇게 먼 거리에서 적진이 보이신단 말입니까?”

“걸음마를 떼고 나서 곧바로 초원에서 말을 달리는 법을 배워서 그런지 눈이 좋은 편입니다. 오늘처럼 날씨가 좋은 날에는 더 먼 거리에 있는 나무의 나뭇잎 개수도 셀 수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우리 바르카 가문의 병사 중에도 마실리족 출신 기병이 사천 명이나 있지만, 마시니사 왕자님처럼 시력이 좋은 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잠깐! 경기병 약 이천 기가 북서쪽에서 우리 군 쪽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하스드루발은 마시니사의 말을 듣고 즉시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북서쪽에서 신원 미상의 기병대가 달려오고 있다! 경계 태세를 갖추되 명령이 내려지긴 전까지는 공격하지 마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하스드루발의 눈에도 북쪽에서 기병 2천 기가 일으키는 흙먼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가만히 어깨에 매어 둔 철궁을 손에 들고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바로 그때 마시니사가 갑자기 활짝 웃으며 기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바마마! 아바마마께서 살아 계셨어! 하스드루발 장군님! 아군입니다! 저 기병대는 제 아버지의 호위병들입니다!”

“가이아 왕께서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군요! 분명 왕께서 많이 지치셨을 테니 오늘은 이쯤에서 숙영지를 짓고 쉬도록 합시다.”

하스드루발은 병사들에게 바그라다스강 변에 숙영지를 짓도록 명령한 후 마시니사와 함께 병사 수십 명을 데리고 가이아 왕을 마중 나갔다.

마침내 가이아 왕 일행이 카르타고군 진영에 도착하자 마시니사는 말에서 내리는 아버지에게 달려가면서 소리쳤다.

“아바마마!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마시니사! 살아 있었구나! 만신전의 모든 신들이시여! 제 아들을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부자는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감격스러운 부자 상봉 장면을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하스드루발은 두 부자가 포옹을 마치고 떨어지자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닦아 낸 후 가이아 왕에게 다가가 말했다.

“가이아 전하.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카르타고 백인회의 명을 받고 마사에실리족의 반란을 진압하러 온 카르타고군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 하스드루발이라고 합니다.”

“내 정신 좀 보게! 진작에 먼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아들을 만난 기쁨에 취해 무례를 범하고 말았군요!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마실리족의 왕 가이아입니다.”

“그동안 반역자 시팍스의 추격을 피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어서 숙영지 안으로 드시지요. 제 병사들이 목욕물과 식사를 준비해 뒀습니다.”

가이아 왕은 하스드루발의 제안에 따라 카르타고군의 숙영지 안으로 들어가 오랜만에 더운물로 목욕을 하고 아들 마시니사와 함께 따듯한 수프와 부드러운 빵을 먹었다.

하스드루발은 가이아 왕이 기력을 되찾은 후 그와 마시니사, 그리고 자신의 부관 전원을 지휘관 막사로 불러 회의를 열었다.

하스드루발이 먼저 가이아 왕에게 물었다.

“가이아 전하,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마사에실리족이 어떻게 이렇게 짧은 기간에 세력을 넓혔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리스인 정예 보병 오천 명이 마사에실리족 군대에 합류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 정도로 마실리 부족이 이렇게까지 반역자 시팍스에게 고전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가증스러운 시팍스는 자신이 이집트의 파라오와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을 전 누미디아에 신나게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그러자 적지 않은 마실리족 부족장들이 저를 배신하고 반역자의 편으로 붙어 버렸지요. 다 제 덕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제야 하스드루발은 마실리족이 그토록 빨리 시팍스 왕의 공격에 수세에 몰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집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디아도코이 왕국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으니까 마실리족 부족장 몇몇이 겁을 먹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지.’

5년 전 사망한 이집트의 선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암군(暗君)인 아들과 달리 위대한 정복 군주였다.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공격해 일시적이나마 바빌론까지 진격하며 전 지중해를 경악하게 했고 과거 페르시아의 황제에게 빼앗겼던 이집트의 문화재를 알렉산드리아로 되찾아 와 백성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다.

아직 그 시절의 이집트를 기억하고 있는 마실리족의 부족장 일부가 시팍스의 편에 붙는 바람에 마사에실리족이 빠른 속도로 누미디아를 정복해 나간 것이었다.

하스드루발은 의기소침해 있는 가이아 왕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반역자 시팍스가 거느리고 있는 병사가 늘어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군요. 가이아 전하. 혹시 마사에실리족의 병력이 전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셨습니까?”

“아주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지금은 대략 육만 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보병은 그리스인 용병을 포함해 사만 명 정도이고 기병은 이만 기 정도입니다.”

그 대답에 막사 안에 있는 카르타고군 장교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하스드루발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도 속으로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육만이나 된다고? 백인회 의원들 앞에서 올해가 가기 전에 마사에실리족의 반란을 진압하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일 났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지금까지 항상 적군보다 양과 질이 모두 앞선 기병대로 적의 측면과 배후를 포위하는 전술을 사용해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로마군을 무찔러 왔다.

그러나 현재 하스드루발이 지휘하고 있는 카르타고군은 시칠리아 원정을 위해 해전과 공성전이 벌어질 것을 상정하여 편성되었기 때문에 기병은 전군의 10분의 1에 불과한 5천 기뿐이었다.

카르타고군과 마사에실리족의 군대는 5만 대 6만으로 전력이 비슷했지만, 기병 전력은 카르타고군의 기병이 적에 비해 4분의 1에 불과했다.

게다가 지금 그가 거느리고 있는 카르타고군 보병대는 바르카 가문의 정예병이 아닌 불과 며칠 전까지 밭을 갈던 리비아 출신 농민 징집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로마군이 한니발의 군대를 상대로 자주 사용하던 양익의 기병이 패퇴하기 전에 보병 싸움에서 이기는 전술을 쓰기도 애매한 상황인 것이다.

‘이대로 시팍스의 군대와 회전을 벌이면 이탈리아에서 한니발 형과 자주 로마군에게 쓰던 포위 섬멸 전술을 내가 당하게 될 수도 있겠다. 뭔가 좋은 수가 없을까?’

바로 그때 지휘관 막사 입구를 지키던 병사 한 명이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와 하스드루발에게 경례한 후 말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방금 스스로 마사에실리족의 왕 시팍스의 사절이라고 밝힌 자가 숙영지에 찾아와 장군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뭐? 들여보내라. 무슨 말을 하는지 일단 들어 보겠다.”

병사는 장군의 명령대로 시팍스 왕의 사절을 지휘관 막사로 안내했다.

가이아 왕과 마시니사는 마사에실리족의 사절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하스드루발의 앞이라 그를 해치려고 들지는 않았다.

사절은 그런 두 부자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고 하스드루발의 앞에 서서 공손하게 인사했다.

“명장으로 전 지중해에 명성이 자자하신 하스드루발 장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누미디아 왕국의 지배자이신 위대한 시팍스 왕의 신하 마시바라고 합니다.”

“누미디아 왕국이 아니라 마사에실리족의 왕이겠지. 용건을 말하라.”

“위대하신 시팍스 왕께서는 조상 대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카르타고와 원수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따라서 제게 일전에 카르타고 백인회에 방문한 사절이 범한 무례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장군님과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맺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속해 봐라.”

“첫째, 누미디아 왕국은 시팍스 왕의 사절이 카르타고 백인회와 하스드루발 바르카 장군에게 범한 결례에 대한 사죄하기 위해 은 천 달란트를 배상금으로 지급한다.

둘째, 누미디아 왕국은 올해 정복한 마실리족의 영토 중 삼 분의 일을 카르타고 정부에 할양한다.

셋째, 누미디아 왕국은 카르타고에 매년 은 이백 달란트를 조공으로 바친다.

넷째, 카르타고는 마실리족의 왕족 전원을 누미디아 왕국의 왕 시팍스에게 신병을 인도한다.”

사절의 말을 듣고 마시니사는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마사에실리족의 사절에게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마사에실리족 도둑놈들! 어디서 우리에게 뺏은 영토와 은으로 우리의 목숨을 사려고 드는 거냐!”

마시니사는 마사에실리족 사절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려 했지만 하스드루발의 호위병과 카르타고군 장교들이 말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하스드루발은 사절의 말을 듣고 열심히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모두가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 있는 그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을 때 하스드루발이 마침내 눈을 뜨고 사절에게 말했다.

“천오백 달란트.”

“네?”

“배상금은 천오백 달란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장군의 대답에 가이아 왕과 마시니사, 그리고 카르타고군 장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사에실리족의 사절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화색을 띠며 대답했다.

“그 정도 요구라면 시팍스 왕께서 분명히 수용하실 겁니다! 신들께서도 양국의 평화를 위해 용단을 내리신 하스드루발 장군님을 축복하실 겁니다!”

가이아 왕은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하스드루발을 저주했다.

“하스드루발 이 개자식아! 내가 왕위에 오르고 카르타고에 수십 년 동안 충성을 바친 대가가 겨우 이거냐! 저승에서 너와 바르카 가문의 비열함을 영원히 저주하실 거다!”

마시니사는 카르타고의 예상치 못한 배신에 화를 낼 기운도 없어져 버렸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두 부자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호위병들에게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가이아 왕과 마시니사 왕자를 포박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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