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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45화 (145/201)

[ 145 ] [144화] 눈에는 눈, 통수엔 통수 (2)

마사에실리족의 사절은 하스드루발의 호위병들이 가이아 왕과 마시니사 왕자를 포박하자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그럼 오늘 체결된 조약에 따라 회담이 끝나는 대로 이 반역자들을 시팍스 왕께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웃기는군. 누미디아에서는 상인들이 돈도 받지 않고 손님에게 물건을 넘겨주나 보지?”

“아··· 배상금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지금 당장 천오백 달란트나 되는 은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누가 그걸 한꺼번에 달라고 했나? 한 번에 주기 어려우면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할 게 아니냐? 앞으로 닷새를 기다려 주겠다. 시팍스 왕에게 돌아가서 계약금으로 은 오백 달란트를 준비하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허락하신다면 당장 시팍스 왕께 돌아가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습니다.”

“어서 나가 봐라. 하루라도 늦으면 조약은 파기다.”

사절은 하스드루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지휘관 막사를 나와 수행원들과 함께 마사에실리족 군대의 숙영지를 향해 말을 달렸다.

그는 시팍스 왕의 막사에 도착한 후 옥좌에 앉아 있는 왕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회담 결과를 보고했다.

“위대하신 시팍스 전하께 보고드립니다. 카르타고군의 총사령관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전하께서 던지신 미끼를 물었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혹시 그 교활한 놈이 나를 속이려 드는 건 아니겠지?”

“하스드루발은 제가 보는 앞에서 호위병에게 가이아 왕과 마시니사 왕자를 포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 걸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정말 잘됐구나! 하스드루발이 내가 제시한 조약 내용에 토를 달지는 않더냐?”

“배상금을 은 천오백 달란트로 올리고 마실리족 왕족들의 신병을 우리에게 인도하기 전에 계약금으로 사흘 안에 은 오백 달란트를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걸 제외하면 다른 요구는 없었습니다.”

“카르타고인답게 어지간히 돈을 밝히는 녀석이군! 놈의 요구대로 해 줘라. 어차피 이집트에서 지원군을 보내오면 카르타고를 공격해 그 몇 배나 되는 전리품을 얻게 될 테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시팍스 전하.”

“네 역할을 잘 해냈으니 곧 네 아비 나라바스를 풀어 주겠다. 어서 왕궁으로 돌아가 보물창고에서 은 오백 달란트를 가지고 이곳으로 돌아와라. 혹시 중간에 은을 가지고 도망치면 네 아비는 죽은 목숨임을 명심해라!”

“제가 어찌 감히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전하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시팍스 왕은 대화를 마친 후 자신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작성해 나르바스의 장남 마시바에게 건네주었다.

마시바는 시팍스 왕에게 명령서를 받아 든 후 머리를 조아리며 왕에게 인사한 다음 막사를 나왔다.

그는 왕의 명령서를 조심스럽게 품에 넣고 말 등에 올라 본래 마실리족의 수도였지만, 지금은 시팍스 왕이 누미디아 왕국의 수도로 선포한 시르타를 행해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시팍스 왕은 마시바가 마사에실리족의 숙영지를 떠난 후 휘하의 장수를 모두 자신의 막사로 부른 다음 외쳤다.

“오늘부로 올해의 전쟁은 끝났다! 지금부터 며칠 동안 잔치를 벌여 마실리족을 정벌하느라 지친 너희들의 노고를 치하하겠다! 모두 누미디아 왕국의 번영을 빌며 축배를 들자!”

* * *

시팍스 왕이 부하 장수들과 막 술판을 벌이기 시작할 때 하스드루발은 가이아 왕과 마시니사 왕자를 가둬 둔 임시 감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나무를 깎아 만든 임시 감옥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 가이아 왕이 밧줄에 묶여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치켜들어 하스드루발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왕은 상처 입은 야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우리 부자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구경하러 왔나? 우리는 네가 기르는 새장 속의 새가 아니다. 더는 수치를 주지 말고 그만 죽여라.”

하스드루발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각오를 다진 가이아 왕의 등 뒤로 돌아가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검집에서 뽑혀 나온 외날검의 서늘한 울음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자 가이아 왕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고개를 숙였다.

하스드루발이 머리 위로 치켜든 검의 도신에 반사된 푸른 달빛이 늙은 왕의 등을 향해 구름을 뚫고 나온 번개처럼 매섭게 번뜩였다.

―휘익!

그러자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던 마시니사의 두 눈이 바그라다스강의 수면을 비추고 있는 보름달처럼 커졌다.

아버지의 등에 붉은 피 대신 그를 묶고 있던 밧줄이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하스드루발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시니사의 등 뒤로 다가가 다시 검을 휘둘러 그의 몸을 묶은 밧줄을 끊었다.

마시니사는 몸에 묻어 있는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심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하스드루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러는 거냐?”

그 말에 하스드루발이 두 부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가이아 전하, 그리고 마시니사 왕자님. 정말 죄송합니다. 마사에실리족의 사절을 속이기 위해서라고는 하나 왕족이신 두 분께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제야 그의 의도를 알게 된 가이아 왕과 마시니사는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마실리족의 노왕은 아직 멍한 표정으로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이 모든 게 연기였다고? 무엇 때문에 이런 번거로운 짓을······.”

“어제 예고 없이 마사에실리족의 사절이 제 막사에 찾아왔을 때 순간적으로 그자를 이용해 반역자 시팍스를 방심시킬 계책이 떠올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반역자들의 군세가 생각보다 강성해서 적의 군영을 기습할 방법을 궁리하던 중 제 발로 찾아온 행운을 도저히 차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정말 감쪽같이 속아 버렸습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께서는 아테네에서 연극배우로 태어나셨어도 전 지중해에 이름을 떨치셨겠습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원래는 반역자 시팍스가 보낸 사절이 돌아가자마자 두 분을 풀어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우리 군의 숙영지 주변에 마사에실리족의 정찰병 몇 명이 기웃거리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마시니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환하게 웃으며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제 형님을 죽인 시팍스에게 복수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영토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하룻밤 정도 밤이슬을 맞고 자는 게 대수로운 일이겠습니까? 벌써부터 장군님께서 어떤 계획을 세우셨는지 궁금하군요!”

“일단 밤바람이 쌀쌀하니 함께 제 막사로 들어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자세한 내용은 거기서 들려드리겠습니다.”

가이아 왕과 마시니사 왕자는 그의 말대로 감옥을 나와 지휘관 막사로 자리를 옮겼다.

하스드루발은 막사 안에서 두 사람에게 따듯하게 데운 우유를 대접한 후 말을 이어 나갔다.

“내일 밤 마사에실리족의 군영을 기습할 예정입니다. 정찰병의 보고에 의하면 반역자 시팍스가 매일 밤 장교들과 술판을 벌이고 있다고 하니 분명 야습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에 가이아 왕이 대답했다.

“시팍스는 멍청하지만, 의심이 많은 자입니다. 비록 자기는 술을 마셔도 경계와 정찰 임무를 맡은 장교들만은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게 할 게 분명합니다. 분명 내일도 카르타고군 숙영지 근처에 적의 정찰병이 기웃거리겠지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부터 일부러 제 병사들에게 일부러 적의 정찰병이 보는 앞에서 카르타고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는 시늉을 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오늘 밤부터는 적의 정찰병이 우리 군의 숙영지 근처로 오지 않더군요. 지금쯤은 시팍스도 마음 놓고 술을 퍼마시고 있을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시니사가 감탄을 금치 못하며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장군님께서는 마사에실리족의 사절이 막사에 발을 들이는 그 짧은 순간에 이미 적을 속일 작전을 다 생각해 두신 거군요! 소문대로 정말 대단한 전략가이십니다!”

젊은 마실리족 왕자의 말을 듣고 하스드루발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것도 완전히 내 오리지널 작전은 아닌데. 좀 쑥스럽네.’

그가 생각해 낸 작전은 사실 원 역사의 스키피오가 미녀 소포니스바를 얻은 후 로마를 배신한 시팍스 왕의 군대를 물리칠 때 사용했던 계략을 참고해 생각해 낸 것이었다.

기원전 204년 봄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군대를 이탈리아에서 끌어내기 위해 카르타고의 영토를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2만 6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아프리카에 상륙한다.

이에 카르타고 정부는 마사에실리족과 함께 약 9만 2천 명의 병력을 모아 연합군을 구성한 후 시팍스 왕과 소포니스바의 아버지 하스드루발 기스코에게 군사지휘권을 맡겨 스키피오의 군대를 막게 했다.

그러나 시팍스 왕과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로마군의 세 배가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히스파니아를 정복한 명장 스키피오가 두려워 선제공격을 꺼리며 머뭇거린다.

그러자 천재 전략가 스키피오는 그런 적장의 심중을 간파한 후 카르타고와 마사에실리족의 연합군과 전투를 벌이는 대신 카르타고의 동맹도시인 우티카를 공격하는 것처럼 병력을 이동시켜 두 적장을 기만하기로 마음먹었다.

스키피오의 계략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시팍스 왕과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우티카의 방어가 튼튼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 놓아 버리고 경계를 게을리하다 로마군에게 야습을 당해 단 하룻밤 만에 9만 명이 넘는 대군을 잃고 만다.

하스드루발은 고개를 돌려 마시니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지은 후 그의 말에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지휘관이라면 늘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적을 물리칠 생각을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괜찮으시다면 두 분께서도 마실리족의 기병대와 함께 이번 작전에 참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뭐든 맡겨만 주십시오! 전쟁통에 시팍스에게 죽은 형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 * *

하스드루발은 가이아 왕과 마시니사 왕자, 그리고 자신의 부관들에게 다음 날 야습작전의 세부내용을 설명한 후 병사들에게 무기를 손질하도록 명령했다.

다음 날 밤이 되자 드디어 카르타고군과 마실리족의 연합군 5만 2천 명이 몸을 바짝 낮추고 먹잇감을 향해 기어가는 흑표범처럼 적진을 향해 다가갔다.

달빛을 반사하지 않기 위해 갑옷에 재를 바른 신성대 병사를 비롯한 카르타고군 보병들이 횃불이 밝혀져 있는 마사에실리족의 군영을 완전히 포위했다.

모든 병사가 자기 자리에 도착하자 리비아인 궁수 5천 명이 미리 명령받은 대로 아르키메데스의 불꽃을 잔뜩 묻힌 천을 화살촉에 두른 불화살을 활시위에 걸었다.

하스드루발은 일반적인 불화살은 발사되자마자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불이 꺼져 버리는 것을 알기에 물에 빠져도 계속 불탈 특제 불화살을 미리 만들어 둔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모든 궁수가 시위에 건 화살에 불을 붙인 걸 확인하고 발사 명령을 내렸다.

“불화살 발사!”

장군의 우레같은 외침이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자 5천 개의 불화살이 일제히 활시위를 떠나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피유우우웅!

밤하늘을 가득 메운 불의 비가 곤히 잠든 반역자들의 머리 위로 빗발치자 마사에실리족의 군영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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