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 [145화] 처절한 응징 (1)
시팍스 왕은 카르타고군이 마사에실리족의 군영을 포위한 줄도 모르고 자신의 숙소에 놓여 있는 침대 위에서 기분 좋게 잠들어 있었다.
그는 파라오의 군대와 함께 카르타고를 점령한 후 덩치 큰 백마를 타고 개선식을 치르는 꿈을 꾸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시팍스 왕은 잠자리에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꿈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카르타고군의 궁수들이 쏜 불화살이 빗발치자 마사에실리족의 군영 곳곳에서 붉은 화염이 솟아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사에실리족의 병사들은 자다 말고 황급히 일어나 불붙은 천막에서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불이야! 숙영지에 불이 났다!”
“앗 뜨거워! 내 수염에 불이 붙었어!”
병사들의 다급한 외침을 듣고 눈을 뜬 시팍스 왕은 잠옷 차림으로 숙소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무 놀라 동공이 평소보다 몇 배는 커진 그의 눈동자에 거친 파도처럼 자신의 군영을 휩쓸고 있는 불길과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치는 병사들의 모습이 비쳤다.
시팍스 왕은 끔찍한 광경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몇 발 물러나고 말았지만,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자신의 곁으로 모여든 장교들에게 말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다들 왜 불을 끄지 않고 내 주변으로 모여드는 거냐!”
“시팍스 전하! 카르타고군의 기습입니다! 어서 도망치셔야 합니다!”
“뭐라고! 이런 빌어먹을! 하스드루발 그 교활한 놈이 날 속였구나! 아직 살아 있는 기병을 최대한 많이 모아 와라! 날 지킬 호위병을 한 명이라도 더 모아서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
“알겠습니다. 전하!”
어명을 받은 장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아직 죽거나 탈영하지 않은 기병 3천 기와 말 한 마리를 시팍스 왕에게 데려왔다.
시팍스 왕은 자신을 호위하는 기병대와 함께 화염에 휩싸인 천막을 뒤로하고 곧 재가 되어 버릴 군영을 빠져나가기 위해 부리나케 말을 달렸다.
거센 불길을 잡아 보려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마사에실리족의 병사들은 왕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손에 들고 있던 물통을 내던지며 소리쳤다.
“왕이 도망친다! 이 군영은 끝났어!”
“우리 목숨 우리가 챙겨야 해! 서문 쪽에는 아직 불이 안 붙었으니까 그리로 도망치자고!”
마사에실리족 병사들은 갑옷과 무기를 불타는 천막 속에 버려 둔 채로 아직 불이 번지지 않은 군영의 서문을 향해 개미 떼처럼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그러나 막 불타는 군영을 빠져나온 마사에실리족의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먼저 도망친 시팍스 왕의 무리가 아닌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불화살과 적군이었다.
카르타고군의 리비아 궁수들이 한번 활을 쏘자 불화살 수천 개가 칠흑 같은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군영 밖으로 몰려나오는 적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피유우우우웅!
방패는커녕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무작정 도망치던 마사에실리족 병사 수백 명이 온몸에 불붙은 화살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끄아아악!”
“적군이 군영 밖에 진을 치고 있다!”
하스드루발은 마사에실리족의 패잔병이 불화살을 맞고 주춤하는 모습을 보고 보병대에 전진 명령을 내렸다.
“리비아 창병대! 전진하라!”
카르타고군의 장교들이 구두로 장군의 명령을 전군에 전하자 리비아 창병대가 방패로 상체를 가리고 긴 창을 앞으로 내밀며 겁에 질린 적군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선두에서 도망치던 마사에실리족의 패잔병들은 날카로운 창의 벽이 점점 눈앞으로 다가오자 다시 군영 속으로 도망치려다 뒤에서 불을 피해 달려오는 아군과 뒤엉키는 바람에 많은 병사가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아아아악!”
“사람 살려!”
이제 마사에실리족 군영에는 적에게 카르타고군의 창칼 앞에 쓰러지는 자보다 아군의 발에 밟혀 죽는 자가 더 많은 형국이 되어 버렸다.
간신히 군영 밖으로 빠져나온 패잔병도 대부분 횃불을 들고 쫓아오는 신성대 중기병이 휘두른 검에 등을 맞고 쓰러지거나 포로로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때 온몸이 땀에 젖은 마실리족의 기병 한 명이 말을 타고 하스드루발의 곁으로 다가와 경례한 후 그에게 보고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께 보고드립니다! 현재 마실리족의 마시니사 왕자님의 기병대가 도망치던 반역자 시팍스의 기병대와 서쪽 강변에서 교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왕자님께서 분투하고 계시지만, 적군의 수가 더 많아 그리 오래 버티시진 못할 듯합니다!”
“뭐? 역시 마실리족에게 주변 경계를 맡기길 잘했구나! 알았다! 마시니사 왕자님께 돌아가서 내가 곧 도우러 간다고 전해라!”
하스드루발은 말을 마치자마자 패잔병을 추격하던 신성대 중기병 2천 기를 불러들인 후 그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는 대열의 선두에서 서서 바그라다스강을 따라 애마 페라리의 옆구리를 뒤꿈치로 걷어차며 전속력으로 말을 달렸다.
그렇게 10분 정도 말을 달리자 하스드루발의 눈에 드디어 도망치려는 시팍스 왕의 군대와 원수를 갚으려는 마시니사의 기병대가 전투를 벌이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성대의 기병 장교 한 명이 비슷한 모양의 튜닉을 입은 누미디아 기병 두 무리가 적의 배후를 잡기 위해 빙글빙글 돌며 서로에게 투창을 던져 대는 모습을 보고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적군과 마실리족의 차림새가 비슷해 어느 쪽이 아군인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고민할 게 뭐가 있냐! 횃불을 더 많이 들고 있는 쪽이 아군이지! 갑자기 자다가 일어나서 도망쳐야 할 상황에 횃불 같은 걸 챙길 정신이 있을 리 없잖아!”
하스드루발은 장교에게 자기 위치로 돌아가게 한 후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 휘하의 기병 2천 기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모두 적의 배후로 돌격하라!”
그의 곁에 있던 병사 한 명이 뿔피리를 불어 장군의 명령을 전 기병대에 알렸다.
―뿌우우우우우.
어둠 속에 중후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자 철갑을 두른 중기병 2천 기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팍스 왕의 배후로 맹렬하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의 뿔피리 소리를 들은 마시니사 왕자는 손에 들고 있던 투창을 버리면서 휘하의 기병들에게 외쳤다.
“카르타고군의 기병대가 전장에 도착했다! 모두 재블린을 버리고 검을 들어라! 가증스러운 마사에실리족 놈들이 한 놈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포위해야 한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마실리족 기병들은 젊은 왕자의 호기로운 모습을 보고 사기가 올라 함성을 질렀다.
“반역자 시팍스를 죽이자!”
“죽어 간 전우들의 원수를 갚자!”
다시 기세가 오른 마실리족 기병대 2천 기는 투창 대신 손에 검을 들고 적 기병대를 향해 번개처럼 돌진했다.
곧 마시니사 왕자의 추격을 뿌리치고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마사에실리족 기병들은 갑자기 앞뒤에서 적 기병대가 몰려오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뒤에서 적 중기병대가 몰려온다!”
시팍스 왕은 카르타고군의 특기인 포위 섬멸 전술에 당하지 않기 위해 직접 전방에서 기병들을 지휘하며 안간힘을 썼다.
“절대로 포위당하지 마라! 적에게 둘러싸이기 전에 어서 여기서 도망치자!”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사에실리족 기병대는 양면에서 몰려오는 적 기병대와 전장의 북쪽을 막고 있는 바그라다스강 때문에 움직임이 단조로워져 하스드루발에게 동선을 읽히고 말았다.
“반역자 시팍스가 전장 남쪽으로 도망친다! 내 주변의 기병들은 나를 따르라!”
그의 외침을 듣고 장군의 곁에서 말을 달리던 신성대 기병 50기가 말머리를 돌려 하스드루발의 뒤를 쫓았다.
하스드루발은 기어이 포위망을 뚫고 나온 마사에실리족 기병 중에서 갑옷 대신 화려한 잠옷을 입고 있는 한 장수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저놈이 시팍스구나!”
그는 전속력으로 애마 페라리를 몰아 시팍스 왕을 향해 번개처럼 질주했다.
―두두두두두두두.
시팍스 왕은 거대한 흑마가 지축을 울리며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불길 속을 탈출하느라 이미 지친 말이 히스파니아 최고 명마의 추격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하스드루발은 애마 페라리를 시팍스가 탄 말 좌측에 바짝 댄 후 손에 든 검을 검집에 넣고 독수리가 사냥감을 발톱으로 움켜쥐듯 오른손을 뻗어 그를 낚아챘다.
그러자 시팍스 왕은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배를 아래로 한 채로 말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캬아아악!”
하스드루발은 말을 멈추고 다시 오른손에 검을 든 후 그에게 다가갔다.
시팍스 왕은 낙마하면서 두 손으로 땅을 짚어 죽지는 않았지만, 양팔과 손목의 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고 애벌레처럼 버둥거렸다.
하스드루발은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목에 검을 댄 다음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반역자 시팍스는 이미 사로잡혔다! 마사에실리족의 패잔병들은 쓸데없이 저항하지 말고 항복해라!”
* * *
그렇게 하스드루발은 단 한 번의 야습으로 마사에실리족의 반란군 6만 명을 하룻밤 만에 궤멸시켰다.
그는 전투가 끝난 후 곧바로 전령을 통해 카르타고 백인회에 승전보를 보냈다.
카르타고의 수페트 이테르바알은 하스드루발이 보낸 서신을 읽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 의원들 앞에 서서 소리쳤다.
“하스드루발 장군이 반역자 시팍스를 상대로 엄청난 대승을 거뒀습니다! 아군 사상자는 백 명도 안 되는데 적군은 사만 명이 전사하고 반역자 시팍스를 포함한 적군 만 칠천 명이 포로로 잡혔다는군요!”
이테르바알이 말을 마치자마자 카르타고의 백인회 의원들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 댔다.
“오오 위대하신 바알 함몬이시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역시 하스드루발 장군님입니다! 바르카 가문이 자랑하는 사자의 혈통이 정말 대단하군요!”
그때 하스드루발의 큰 매형 보밀카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 의원들에게 말했다.
“하스드루발 장군은 다시 한번 엘리사 여왕의 도시에 역사에 남을 큰 승리를 안겨 줬습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제 처남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한 번 더 개선장군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외국에서 손님을 초대하고 성대한 개선식을 치러서 전 지중해에 카르타고를 위협한 적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도록 합시다!”
그 자리에 모인 백인회 의원 104명은 만장일치로 보밀카르의 의견에 찬성했다.
하스드루발은 한 번 더 개선식을 치르라는 원로원의 제안을 두 번 거절하고 세 번째 제안을 받고 나서야 승낙했다.
역사상 유례없는 영광을 당연하다는 듯이 덥석 받아들이는 대신 겸손한 모습을 보이면 카르타고 시민들이 바르카 가문을 더욱 지지하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한번 4두 마차에 올라 비르사 언덕을 오르면서 기쁜 얼굴로 색색가지 꽃잎을 뿌려 대며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몇 주 전 칸나이 전투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개최된 개선식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지난번과는 다른 점도 보였다.
이번 개선식에는 개선장군이 탄 4두 마차 뒤에 전리품 수레 대신 쇠사슬에 팔과 다리를 묶인 마사에실리족의 포로 1만 5천 명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시팍스 왕은 포로 행렬의 선두에서 잠옷을 입은 채 비르사 언덕 위로 끌려가면서 분한 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내 패도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날 수는 없단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