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 [146화] 처절한 응징 (2)
하스드루발이 탄 4두전차가 비르사 언덕을 두른 성벽으로 들어서자 올해 두 번째로 카르타고에서 치러진 개선식이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개선식을 구경하기 위해 지중해 각지에서 모여든 왕족과 귀족들은 개선장군의 당당한 모습과 지중해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의 모습을 가슴에 새기고 비르사 언덕을 내려왔다.
하스드루발은 행사를 마친 후 어린 시절을 보낸 바르카 가문의 옛 저택에서 쉬고 싶었지만, 아직 도저히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업무가 남아있었다.
곧 카르타고 백인회가 의회 건물에서 마사에실리족 반역자의 수괴 시팍스 왕을 비롯한 반역자 50명에 대한 재판이 시작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백인회 의원이 아닌 하스드루발에게는 판결권이 없지만, 카르타고의 정치인들은 그에게 참고인 자격으로 재판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다.
‘뭐, 유죄는 당연한 거니까 사실 어떤 벌을 내리는지 정하는 자리에 가깝겠지. 시팍스 그놈이 좌절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마침 잘됐다.’
반역자에 대한 재판은 개선식이 끝나자마자 열렸다.
그는 갑옷을 벗을 틈도 없이 백인회 의원들과 함께 의회 건물로 들어갔다.
하스드루발과 모든 의원이 자기 자리에 앉자 죄인의 압송을 맡은 병사들이 시팍스 왕과 그의 최측근, 그리고 가이아 왕을 배신하고 시팍스의 편에 붙었던 마실리족의 부족장 등 반역자 50명을 끌고 왔다.
시팍스 왕은 팔과 다리에 사슬이 묶인 상태에서도 거칠게 몸부림치며 자신을 끌고 가는 병사에게 반항했다.
“무엄한 놈! 이거 놓지 못할까!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거냐! 난 누미디아 왕국의 지배자 시팍스 왕이다!”
“입 닥치고 어서 들어가기나 해라 이 반역자 놈아!”
병사는 반항하는 시팍스 왕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면서 간신히 그를 개선장군과 백인회 의원들의 앞에 무릎 꿇렸다.
재판의 진행을 맡은 하스드루발의 큰매형 보밀카르가 시팍스 왕 앞으로 걸어 나와 동료 의원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반역을 저지른 마사에실리족의 왕 시팍스와 그를 도운 자들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보밀카르는 고개를 숙여 시팍스 왕을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 보면서 말했다.
“마사에실리족의 왕 시팍스. 그대는 카르타고의 적국인 로마, 그리고 이집트와 손을 잡고 카르타고의 소중한 동맹인 마실리족을 공격하여 누미디아 속주를 황폐화했다. 이 모든 행위는 위대한 엘리사 여왕의 나라에 대한 반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웃기는군! 엘리사가 위대하다고? 엘리사는 오갈 데 없는 자신을 받아준 우리 누미디아의 선조께 사기를 쳐서 이곳 비르사 언덕을 강탈했다! 게다가 로마의 시조 아이네이아스와 눈이 맞았다가 버림받자 자살해버린 년이지! 그딴 년이 뭐가 위대하다는 거냐!”
시팍스 왕이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외치자 백인회 의원들은 하나같이 눈에 핏대를 세웠다.
로마인들은 수백 년 전부터 조국 로마의 시조인 트로이의 왕족 아이네이아스 때문에 카르타고의 시조 엘리사 여왕이 자살했다고 주장해왔다.
트로이 멸망 후 카르타고로 도망친 아이네이아스가 엘리사 여왕과 사랑을 나누다 그녀를 버리고 이탈리아로 떠나는 바람에 이를 비관한 엘리사 여왕이 스스로 타오르는 불길 속에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로마보다 적어도 60년 이상 먼저 건국되었기 때문에 이 신화는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로마의 건국신화가 사실이라면 젊은 청년인 아이네이아스는 적어도 70세가 넘는 엘리사 여왕과 연인관계였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로마의 건국신화를 듣는 카르타고인의 심정은 단군 할아버지께서 일본 여왕에게 실연당한 후 자살하셨다는 말을 듣는 한국인의 그것과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망언을 카르타고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인 비르사 언덕 위에서 들은 백인회 의원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성을 질러댔다.
“저런 발칙한 놈을 봤나! 감히 카르타고의 시조이신 엘리사 여왕을 욕보이다니!”
“어딜 감히 로마인들이 퍼뜨린 망언을 신성한 비르사 언덕 위에서 입에 담는 거냐!”
“저 발칙한 놈을 당장 십자가에 매달아라!”
그러나 시팍스 왕의 망언은 거기서 그치질 않았다.
그는 이번엔 고개를 들어 하스드루발을 노려보며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하스드루발! 네 마누라를 못 뺏어서 정말 아쉽구나! 몇 년전 카르타고에 사절로 왔을 때 우연히 봤던 그 탐스러운 몸매와 흑단 같은 검은 머릿결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죽기 전에 한 번 안아보게 해줄 수 없겠나?”
“이런 개자식! 네가 내 손에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그래! 어디 한번 죽여봐라! 네가 그럴 배짱이 있는 놈이라면 그 검을 한번 휘둘러 보라고!”
그 말을 듣고, 하스드루발은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는 검집에서 손을 뗐다.
시팍스가 노골적으로 자신을 도발하는 의도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십자가형을 당하기 싫으니까 날 도발해서 칼을 맞고 고통 없이 죽으려는 가구나. 지금 검을 휘두르면 저놈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나 마찬가지다.’
십자가형에 매달리면 며칠 동안이나 갈증과 고통에 시달리며 서서히 죽어가게 된다.
그렇기에 십자가형은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카르타고에서 가장 중한 형벌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그런 십자가형조차도 자신의 부인을 모욕한 시팍스에게는 관대한 처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어떻게 처벌해야 시팍스 왕이 괴로워할까를 궁리하다 뭔가를 떠올린 후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하스드루발은 공적인 자리임을 의식해 큰매형 보밀카르를 직함으로 부르며 말했다.
“존경하는 보밀카르 의원님. 허락하신다면 백인회 의원님들 앞에서 이 반역자들에게 내릴 형벌에 대한 제 의견을 말하고 싶습니다.”
“존경하는 하스드루발 장군님. 장군님의 요청을 승인합니다. 어서 앞으로 나오시지요.”
보밀카르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하스드루발은 자리에서 일어나 분노한 백인회 의원들의 앞에 섰다.
“존경하는 카르타고의 백인회 의원 여러분. 이 자리에 끌려온 죄인들은 모두 조국 카르타고의 안전을 위협한 대역죄인들입니다. 국법에 따르면 이자들을 모두 십자가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반역자의 수괴 시팍스만큼은 감히 엘리사 여왕을 모독한 죄를 저질렀으니 더 중한 형벌을 받게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을 들은 의원들은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아는 한 십자가형보다 더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형벌은 없었기 때문이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한 의원이 그에게 물었다.
“존경하는 하스두르발 장군님. 제 좁은 식견으로는 십자가형보다 더 중한 형이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군요. 대체 어떤 형벌을 염두에 두시고 계십니까?”
“저는 존경하는 백인회 의원 여러분께 반역자 시팍스에게 태형(笞刑) 팔만 대를 선고할 것을 권고 드립니다.”
“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십자가형 낫지 않겠습니까? 팔만대라고 하면 듣기에는 거창하지요. 하지만 태형에 쓰는 몽둥이로 볼기짝을 맞으면 아무리 건장한 장정이라도 오십 대를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겁니다.”
“한꺼번에 팔만대를 때리자는 게 아닙니다. 먼저 곤장을 열 대 정도 때린 후 한 달 동안 상처에 약을 발라 치료한 다음 또 곤장을 때리는 겁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시팍스 왕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하스드루발에게 질문했던 백인회 의원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허어... 매질을 당한 죄수를 치료한 후 다시 때리다니... 용케 그런 기발하고 끔찍한 생각을 해내셨군요.”
“제가 생각해낸 건 아니고, 시리아보다도 동쪽에 있는 한 도시국가의 형벌을 의원님께 소개한 것뿐입니다.”
다른 의원들도 그의 제안을 듣고 기겁하며 웅성거렸지만, 곧 반역자 시팍스에게는 그 정도 형벌은 내려야 마땅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하스드루발은 백인회 의원들을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뭐, 그 도시국가는 거의 이천 년 뒤에 건국되긴 하지만, 이런 말을 해줄 수는 없지.’
그가 말한 동방의 도시국가는 바로 현대의 싱가포르였다.
현대에도 동남아에는 아직 태형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가 몇 곳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높은 것은 바로 싱가포르의 태형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20세기의 발전된 의학기술을 동원해 치명상을 입지 않는 한도에서 범죄자에게 가장 심한 고통과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태형제도를 만들었다.
싱가포르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태형이 선고되면 범죄자는 속옷까지 발가벗겨진 채로 허리를 숙여 몸이 ㄱ자가 된 상태로 형틀에 묶인다.
그러고 나면 무술에 조예가 깊은 집행관이 굵기가 1.5cm 정도 되는 단단한 나무 몽둥이로 도움닫기를 해가며 범죄자의 볼기를 피가 나도록 후려친다.
범죄자는 그렇게 여러 번 볼기를 맞고도 형이 남아있을 경우, 병원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다시 태형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매 맞는 고통도 대단하지만, 그 매질을 다시 당할 걸 알면서 치료를 받을 때의 공포심도 대단하겠지. 감히 내 아내를 모욕한 걸 평생 후회하면서 살아라.’
십자가형을 피하려다 그처럼 무서운 형벌에 처해진 시팍스는 체면도 잊고 백인회 의원들에게 애걸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저 악마의 말을 듣지 말아 주십시오! 차라리 십자가에 매달아 달란 말입니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백인회 의원들은 엘리사 여왕을 모독한 그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보밀카르는 다른 의원들의 의견을 모두 취합한 후 다시 시팍스의 앞에 서서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역자 시팍스는 들어라. 너는 나라를 어지럽힌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카르타고의 시조이시자 사후에 신이 되신 엘리사 여왕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죄를 저질렀다. 이에 너에게 하스드루발 장군의 제안대로 태형 팔만 대를 선고한다. 평생 매질을 견디며 네가 지은 죄를 참회하도록 하라.”
“안돼!!!”
시팍스 왕은 하스드루발의 말대로 태형이 선고되자 결국 수백 명의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보밀카르는 그런 시팍스 왕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다른 반역자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시팍스에게 동조한 마사에실리족과 마실리족의 부족장들에게는 사형을 선고한다. 다만 마사에실리족 출신 부족장은 왕령에 반대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해 명예롭게 자결할 기회를 주겠다. 가이아 왕을 배신한 마실리족의 부족장들은 내일 십자가형에 처한다.”
그 말을 들은 시팍스 왕의 부하들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날 저녁, 가축 시장 근처에 있는 감옥에서 곤장을 맞는 시팍스의 비명이 전 카르타고 시내에 울려 퍼졌다.
시팍스가 입에 담은 망언을 전해 들은 카르타고 시민들은 모두 그가 저지른 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됐다며 기뻐했지만, 하스드루발의 마음은 그저 편하지만은 않았다.
‘이번 반란은 이렇게 일단락됐지만, 이집트를 내버려 두면 제2, 제3의 시팍스가 또 나타날지도 모른다. 늦어도 내년 중에는 프톨레마이오스 그 자식도 손 좀 봐줘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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