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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48화 (148/201)

[ 148 ] [147화] 로마의 도박

기원전 216년 11월 초 어느 날.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바짝 마른 말이 초라한 행색의 기수를 태우고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의 거리를 달렸다.

찢어진 튜닉을 몸에 걸친 기수는 바로 지난달 말 카르타고군의 야습을 받아 전멸한 마사에실리족 군대의 기병대장 마스탄발이었다.

그는 지난 전투에서 시팍스 왕이 하스드루발에게 붙잡히는 모습을 보자마자 파라오에게 마사에실리족을 구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동쪽으로 말머리를 돌린 후 갖은 고생을 겪은 끝에 열흘 만에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기병대장 마스탄발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한시라도 빨리 파라오를 만나기 위해 인파가 북적이는 한낮의 거리를 말을 탄 채로 질주하다 이집트의 경비병들에게 제지당했다.

경비병들은 그를 말에서 끌어내리면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정신 나간 녀석! 거리에서는 구보로 말을 달려야 하는 걸 모르는 거냐?”

“행색을 보니 주인에게서 도망친 노예같은데?”

그러자 기병대장 마스탄발은 품속에서 일전에 시팍스 왕이 그에게 하사한 마사에실리족 왕가의 인장이 찍힌 단검을 꺼내 보이며 경비병들에게 소리쳤다.

“이거 놓으시오! 난 노예가 아니오! 위대하신 파라오께서 동맹으로 인정하신 마사에실리족의 사절입니다!”

그 말을 들은 경비병들은 잠시 마스탄발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다 그를 알렉산드리아의 수비대장에게 데려갔다.

수비대장은 단검에 새겨진 마사에실리족 왕가의 인장을 알아보고 마스탄발에게 깨끗한 튜닉을 내주어 옷을 갈아입게 한 후 파라오의 왕궁으로 안내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내관은 마스탄발이 시팍스 왕의 사절임을 확인하고 파라오에게 찾아가 그 사실을 알렸다.

“태양신의 아들이시자 이집트의 지배자이신 위대한 파라오시여. 마사에실리족의 왕 시팍스가 보낸 사절이 폐하를 알현하고자 왕궁에 찾아왔나이다.”

“저번에 온 마사에실리족의 사절이 다녀간 지 겨우 열흘 지났는데, 그 말똥 냄새 나는 야만인들이 또 왔단 말이냐?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나 잠시 기다리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폐하.”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간신 소시비오스와 아가토클레스, 그리고 다양한 인종의 용병대장들이 참석한 군사회의를 마치고 곧바로 알현실로 향했다.

그는 옥좌에 앉자마자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절이 인사를 할 틈도 주지 않고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분명히 저번에 온 사절에게 겨울에는 바다가 거칠어서 지원군을 보낼 수 없다고 이야기 했을텐데? 가서 시팍스 왕께 전하시오. 사정이 급한 건 알겠지만, 겨울에 수송선을 띄우면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 애꿎은 병사를 잃게 된다고 말이오.”

“위대하신 파라오시여! 폐하의 말씀대로 시팍스 왕께 그 말씀을 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팍스 왕께서는 이미 카르타고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시고 적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파라오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지...지금 뭐라고 했는가? 마사에실리족이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인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지났다고 벌써 왕이 포로가 돼!”

“교활한 적장 하스드루발이 시팍스 왕과 평화협정을 맺기로 한 후 한밤중에 마사에실리족의 군영을 기습공격 했습니다! 위대하신 파라오시여! 부디 간악한 카르타고인들에게 태양신의 분노를 보여주십시오!”

“하아... 그대의 뜻은 잘 알았소. 내 카르타고를 벌할 방법을 궁리해 볼 터이니 물러가서 쉬도록 하시오. 내관은 마사에실리족의 사절을 데려가 식사를 대접해라!”

파라오의 명이 떨어지자 그의 곁에 있던 내관이 즉시 마스탄발을 왕국의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마사에실리족의 사절이 알현실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하고 깊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러다가 북쪽과 서쪽에서 몰려온 도적 떼가 알렉산드리아를 약탈하게 생겼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카르타고가 이미 1차 포에니전쟁 이전의 수준의 해군력을 거의 회복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거의 전 병력을 이끌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대와 싸우는 사이에 카르타고의 함대가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해 자신의 왕궁을 불태우는 상상을 하면서 몸서리쳤다.

“이미 내 힘만으로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가 어렵겠구나! 이러다 북아프리카의 진주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 카르타고의 전함이 들이닥치겠어!”

* * *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로마에 마사에실리족의 군대가 카르타고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 즉시 속도가 빠른 연락선 열 척을 띄웠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출항한 파라오의 사절단은 로마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인 오스티아로 향했다.

날씨가 좋을 때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오스티아는 뱃길로 2주가 채 안 걸릴 거리이다.

하지만 파라오의 사절단은 예측할 수 없는 겨울철 지중해의 거친 바람을 견디며 항해하느라 12월 초가 돼서야 간신히 로마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인 오스티아에 정박할 수 있었다.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은 쿠리아 호스틸리아에서 이집트의 사절단에게 마사에실리족의 파멸을 전해 들은 후 파라오와 마찬가지로 깊이 탄식했다.

마르켈루스는 평소 늘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던 그답지 않게 침울한 표정으로 동료 의원들에게 말했다.

“정말이지 올림포스의 신들께서 우리 로마에 끝없는 시련을 내리시는군요! 이집트는 카르타고 해군에 후방을 노려지게 되면 결국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전투에 전념하지 못하고 전쟁에서 패해 멸망하게 될 겁니다!”

칸나이에서 살아 돌아온 집정관 바로도 마르켈루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존경하는 마르켈루스 의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현 상황에서 이집트가 망하는 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곡창지대인 캄파니아와 아풀리아 지역을 빼앗긴 상황에서 이집트에서 밀을 수입하지 못하게 되면 군량 수급에 심각한 차질이 생깁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이집트가 망하면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연합군이 금방 그리스에 있는 우리의 동맹 도시국가들을 정벌할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한니발을 돕기 위해 이탈리아로 쳐들어오겠지요!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모든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이 두 사람의 말처럼 이집트의 위기를 심각한 문제로 여기고 있었지만, 누구도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로마는 아직 칸나이 전투의 패배에서 입은 손실을 복구하지 못해 당장 이집트에 군단병을 지원할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말없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던 파비우스가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우리 로마의 육군은 궤멸적인 손해를 입었지만, 해군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이번 위기는 카르타고보다 한발 앞서서 해군을 움직여 막는 수밖에 없겠군요.”

파비우스의 말에 마르켈루스가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존경하는 파비우스 의원님. 벌써 올해도 12월에 들어섰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바다의 신 넵튠께서는 겨울이 되면 바다를 지나는 인간들에게 쉽게 화를 내시지요.”

“그래서 더욱 카르타고가 우리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을 겁니다. 그 뱃놈들은 겨울에 항해하는 걸 사자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 마냥 두려워하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12월에 함대를 알렉산드리아로 출항시키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이집트의 사절단이 타고 온 배도 열 척 중 네 척이 폭풍우를 만나 침몰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알렉산드리아에 함대를 보내자는 게 아닙니다. 시칠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에게 몰타섬을 공격해 전초기지로 삼게하면 카르타고 해군이 섣불리 이집트를 공격할 수 없을 겁니다.”

“아...! 과연! 몰타섬이라면 시칠리아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어쩌면 겨울철에도 별 피해 없이 우리 함대가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몰타섬은 시칠리아의 남동쪽에 있는 로마의 동맹국 시라쿠사에서 남동쪽으로 100km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섬으로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점을 잘 알고 있는 원 역사의 로마가 2차 포에니전쟁 초기 카르타고 해군의 무모한 공격을 어렵지 않게 막아낸 후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바로 몰타섬 점령이었다.

몰타섬에 해군을 주둔시킨 후 자주 정찰선을 띄우면 카르타고 동쪽의 북아프리카 중부 해안지대를 지나는 적국 함대의 움직임을 일찌감치 발견하고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비우스는 겨울철에는 해전을 벌이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지중해 세계의 상식을 깨고 카르타고와 하스드루발의 허를 찌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로마의 원로원 의원 중 상당수가 그의 주장에 쉽게 찬성할 수 없었다.

1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해군이 무모한 항해를 감행하다 폭풍우를 만나 200척이 넘는 전함과 5만 명이 넘는 병사가 바다에 수장된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원로원 의원들을 대표해 집정관 바로가 파비우스에게 말했다.

“존경하는 파비우스 의원님. 의원님의 대담한 작전이 성공한다면 카르타고의 해적 떼가 동맹국의 해안지대를 공격하는 것을 막는데 큰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그만큼 행운이 따라줘야 하는 작전이기도 합니다. 지난 전쟁에서 카르타고인에게 죽은 병사보다 바다에 빠져 죽은 병사들이 훨씬 많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물론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존경하는 바로 집정관님. 카르타고와의 지난 전쟁 이후 우리 로마도 수십 년 동안 항해기술을 발전시켜왔습니다. 시라쿠사에서 몰타까지는 바람이 좋을 때는 뱃길로 하루 거리니 넵튠께서 도와주신다면 카르타고의 허를 찌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좋은 방도가 있으십니까? 카르타고의 전함은 우리 로마의 전함보다 빠릅니다. 때를 놓치면 우리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이집트는 내년을 넘기지 못하고 멸망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파비우스의 말에 모든 원로원들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반대하지 못했다.

성공만 한다면 그의 전략은 로마가 큰 무리 없이 이집트를 공격하려는 카르타고 해군을 견제할 방법임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파비우스의 말을 들은 후 잠시 고심하던 집정관 바로는 결연한 목소리로 동료 의원들에게 말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아무리 생각해도 존경하는 파비우스 의원님의 제안보다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질 않습니다. 여러분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직접 해군을 이끌고 이번 몰타섬으로 떠나겠습니다. 반드시 이번 겨울이 가기 전에 몰타섬을 점령해 칸나이에서의 실패를 조금이나마 만회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 * *

집정관 바로는 원로원 회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항구도시 오스티아로 출발해 배를 타고 시라쿠사로 향했다.

그는 12월 중순에 목적지에 도착한 후 시칠리아에 주둔 중이던 로마군 전함 250척 중 100척을 시라쿠사로 소집했다.

그 후 2주도 지나지 않아 시라쿠사로 오던 중 폭풍우를 만나 침몰한 5척을 제외한 95척가 집정관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기원전 216년 12월 말.

집정관 바로는 로마해군의 전함 95척과 시라쿠사 해군 20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출격시켜 그해가 가기 전에 방심하고 있던 몰타섬의 수비대를 물리치고 섬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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