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 [148화] 너, 내 동료가 돼라! (1)
“가증스러운 로마 놈들. 지금쯤이면 우리에게 간신히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면서 한시름 놓고 있겠지? 생각만 해도 열 받네.”
하스드루발은 바르카 가문의 옛 저택 테라스에 서서 추위에 영글어 가는 겨울밤 하늘의 별빛을 머금은 지중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로마 해군의 대함대가 카르타고의 수비대를 몰아내고 몰타섬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파비우스가 주도한 로마 해군의 몰타섬 점령 작전은 원 역사의 지식을 가진 하스드루발조차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바다의 민족인 카르타고인조차도 두려워하는 겨울 지중해의 역풍에 약한 사각 돛을 사용하는 고대의 갤리선을 내보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도박이기 때문이다.
“분하긴 하지만, 이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로마 해군에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타이밍이네.”
현재 대부분의 로마인은 며칠 전 집정관 바로가 성공시킨 로마 해군의 몰타섬 기습 작전이 신의 한 수였다고 여기고 있었다.
카르타고는 전략적 요충지를 잃음으로써 동지중해를 항해하기 껄끄러워진 것은 물론이고 시칠리아 동부에서 움직이는 로마와 시라쿠사 함대를 감시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르타고 해군이 몰타섬을 탈환하려 한다면 로마 해군을 돕는 시라쿠사의 함대도 상대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은 험난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만약 시라쿠사가 어느 날 갑자기 로마를 배신하고 카르타고 편으로 돌아선다면 상황은 180도 달라질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조용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혼잣말을 했다.
“지금은 아무도 시라쿠사가 로마를 배신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겠지. 나만 빼고 말이야.”
시라쿠사의 왕 히에론은 1차 포에니 전쟁 도중 로마와 강화 조약을 맺은 후 로마에 충직한 동맹이 되기로 맹세했다.
히에론 왕은 그 맹세를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칸나이에서 역사적인 대승을 거둬 남부 이탈리아 대부분이 로마에게 등을 돌린 이후에도 흔들림 없이 지켜 왔다.
칸나이에서 패한 후 이탈리아 내의 곡창지대를 대부분 잃은 로마에 시세보다 싼 가격으로 밀을 수출하고 로마의 요청이 있을 때는 해군을 동원해 카르타고의 함대와 해전을 벌여 온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든든한 동맹인 시라쿠사는 원 역사대로라면 내년인 기원전 215년에 갑자기 47년 동안 지켜 온 신의를 저버린다.
노왕 히에론이 90세에 천수를 다한 후 그의 15살 난 손자 히에로니무스가 왕위에 오른 다음 시칠리아의 로마 영토를 정복하고자 카르타고와 손을 잡은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로마와 이집트가 카르타고의 동맹이었던 마사에실리족을 꼬드겨 누미디아 속주에 내전을 일으켰듯이 시라쿠사의 배신을 잘 활용해 시칠리아와 몰타섬에 주둔한 로마 해군에 큰 타격을 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문제는 히에론 왕이 내년에 죽는다는 건 알아도 몇 월에 죽는지는 정확히 모른다는 거다. 기왕이면 최대한 빨리 신들의 곁으로 가 줬으면 좋겠는데. 일단은 지금 할 수 있는 준비나 철저히 해 둬야겠다.’
그는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지금은 사직한 아훈의 추천으로 카르타고에 있는 바르카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는 회계담당자가 된 아즈멜카르트를 저택으로 불렀다.
아즈멜카르트는 바르카 가문 저택의 서재로 찾아가 책상에 앉아 있는 하스드루발에게 인사했다.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반갑네. 아훈 의원님께 말씀 많이 들었네. 일솜씨가 훌륭하다고 칭찬이 자자하시더군.”
“하하··· 과찬이십니다. 아훈 의원님께서 바르카 가문의 회계담당자이실 때 장부 정리를 잘 해 놓으셔서 제가 할 일이 별로 없을 정도지요.”
“의원님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면 기뻐하시겠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여기에 적어 둔 물품을 늦어도 내년 2월 말까지 준비해 줄 수 있겠나?”
하스드루발은 말을 마치며 아즈멜카르트에게 손에 든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건넸다.
아즈멜카르트는 두루마리를 펼친 후 찬찬히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가면서 점점 눈동자가 커졌다.
“겨울철에는 무역선이 다니지 않아 수급이 어려운 물건도 보이는군요. 그래도 어떻게든 2월 초까지는 준비할 수 있겠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럼 서둘러 준비해 주게.”
“알겠습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저··· 이렇게 많은 사치품을 전부 어디에 쓰실 계획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의 말에 하스드루발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걸로 이번 전쟁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줄 동맹을 살 생각이네.”
* * *
아즈멜카르트와의 대화를 마친 후 하스드루발은 차근차근 시라쿠사의 왕이 될 히에로니무스를 설득할 준비를 해 나갔다.
그는 먼저 큰 매형 보밀카르에게 부탁해 카르타고 백인회의 의원회의를 개최했다.
하스드루발은 의회 건물에 모인 104명의 의원들 앞에 서서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존경하는 백인회 의원 여러분.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작년 겨울 로마가 몰타섬을 점령하는 바람에 우리 카르타고의 제해권에 구멍이 뚫려 버렸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할 가장 좋은 방법은 시라쿠사가 로마를 버리고 우리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게 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백인회 의원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수군거렸다.
친로마파로 유명한 히에론 왕이 로마를 배신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 지중해를 뒤져도 한 명도 없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수페트인 이테르바알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하스드루발에게 물었다.
“존경하는 하스드루발 장군님. 장군님의 말씀대로 시라쿠사가 우리 카르타고의 편이 되면 분명 로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그 완고한 히에론 왕이 쉽게 마음을 바꾸겠습니까?”
“그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히에론 왕이 앞으로 몇 달 안에 수명을 다할 거라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그의 아들 겔론도 작년에 갑자기 죽는 바람에 겨우 열다섯밖에 안 된 손자가 왕위를 잇게 될 거라더군요. 전 그 어린 왕이 옥좌에 앉자마자 시라쿠사와 협상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그의 말에 백인회 의원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상식적으로는 히에론 왕의 직계자손인 히에로니무스가 왕위에 오른다고 시라쿠사의 외교정책이 갑자기 바뀔 거라고 보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스드루발이었다.
모든 카르타고인이 하스드루발이 불과 열네 살에 마우리아 제국의 왕자와 담판을 지어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고 이십 대 초반에 마케도니아를 설득해 로마를 적대하게 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백인회 의원들은 오랜 토론을 거친 끝에 이번에도 하스드루발을 믿어 보기로 했다.
이테르바알은 동료 의원들을 대표해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존경하는 하스드루발 장군님. 우리 카르타고의 백인회는 이번에도 그대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지혜를 믿어 보기로 했습니다. 히에론 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즉시 시라쿠사로 떠나십시오.”
“존경하는 백인회 의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결코 여러분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겁니다!”
“바르카 가문의 수호신이신 멜카르트께서 그대를 지켜 주시길 빌겠습니다. 아무쪼록 그대의 일신에 이변이 생기면 조국 카르타고의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운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 * *
하스드루발은 모든 준비를 마친 후 한니발이 진작에 시라쿠사에 심어 둔 첩자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가 히에론 왕의 서거 소식을 전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약 한 달 반이 흘러 기원전 215년 2월의 중순이 되었을 때, 드디어 그가 그토록 원하던 소식이 카르타고에 도착했다.
하스드루발은 첩자가 보내온 서신을 손에 들고 기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내가 움직일 때가 됐구나. 바다가 잠잠해지면 바로 출발해야겠다.”
그는 지중해가 좀 더 잠잠해지고 히에론 왕의 장례식이 끝나는 3월 초까지 기다렸다가 곧바로 상선으로 위장한 배를 타고 시라쿠사를 향해 출항했다.
하스드루발이 탄 배는 순풍을 등에 업고 사흘 동안 바다 위를 달려 시라쿠사의 항구에 입항했다.
그는 로마의 눈을 속이기 위해 상인으로 위장한 후 재물이 가득 담긴 당나귀가 끄는 수레 세 대를 끌고 시라쿠사의 왕궁으로 찾아갔다.
왕궁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은 하스드루발과 그의 수행원들이 수레를 끌며 다가오자 창대로 앞길을 막으며 그들을 제지했다.
“멈춰라! 이 앞은 히에로니무스 전하께서 통행을 허락하신 자만이 지나갈 수 있다!”
그러자 하스드루발은 능청스럽게 유창한 그리스어로 앞길을 막는 경비병들에게 대답했다.
“아이고~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는 아테네에서 온 상인 에우메네스라고 합니다. 다름 아니고 이번에 제왕에게 어울릴 법한 좋은 물건을 많이 입수해서 감히 위대하신 히에로니무스 왕께 보여 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썩 꺼져라! 전하께서는 선약도 없이 상인 나부랭이를 만나 주실 분이 아니다!”
그러자 하스드루발은 경비병들 중 경비대장으로로 보이는 자에게 은근슬쩍 다가가 그의 손에 아테네에서 주조한 금화 몇 개를 쥐여 주며 속삭였다.
“그러지 마시고 한번 전하께 말씀만이라도 전해 주십시오! 이집트의 파라오라도 눈이 뒤집어질 만한 물건을 잔뜩 가져왔습니다!”
“크흠···! 그럼 어디 그 물건이나 한번 보자!”
경비대장이 반쯤 넘어오자 하스드루발은 수행원들에게 손짓해 수레 세 대를 덮은 천을 치우게 했다.
그러자 시라쿠사의 경비병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이 튀어나올 기세로 수레 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수레 안에는 북아프리카 코끼리의 상아를 깎아 만든 그리스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조각상과 최고급 유리 공예품, 정교한 세공이 들어간 금은 장신구와 설탕 등의 사치품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경비대장에게 다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만약 히에로니무스 전하께 물건을 좀 팔 수 있게 되면 왕궁을 나오면서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에서 좀 더 성의를 보이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경비대장은 즉시 히에로니무스 왕에게 부하를 보내 하스드루발의 뜻을 알렸다.
꼭 사지는 않더라도 값진 재물을 구경하고 싶었던 어린 왕은 그를 왕궁의 알현실로 들게 했다.
하스드루발은 히에로니무스 왕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며 말했다.
“위대하신 시라쿠사의 지배자 히에로니무스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미천한 아테네의 상인 에우메네스라고 합니다.”
“반갑다. 그대가 가져온 재물이 그리 대단하다고 하는데 한번 구경해 보고 싶군.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사는 것도 고려해 보지. 어서 저 상인이 가져온 물건을 들여와라!”
어명의 떨어지자 왕궁의 하인들이 하스드루발이 가져온 수레 세 대를 끌고 와 어린 왕에게 보여 줬다.
히에로니무스 왕은 경비병들처럼 체통 없이 놀란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놀란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과연··· 하나같이 값진 보물뿐이구나. 파라오도 놀라게 할 물건이라고 큰소리칠 만은 하군.”
“마음에 드신다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전하께서는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값진 물건을 보시지는 못했습니다.”
“그래? 어서 보여 다오!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구나!”
왕이 승낙하자 하스드루발은 자신의 손가락에서 굵직한 금반지를 뺐다.
옥좌 곁에 서 있던 내관이 그에게서 반지를 건네받은 후 왕에게 전달했다.
히에로니무스 왕은 손에 든 반지를 살펴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저 굵을 뿐인 금반지가 아닌가? 그야 값은 나가겠지만, 다른 보물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거 같은데······.”
그때 어린 왕의 갈색 눈동자에 반지에 새겨진 푸른 번개 모양의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그 번개 문양은 바로 전 지중해에서 가장 유명한 귀족 가문인 바르카 가문의 문양이었다.
히에로니무스 왕은 내관을 통해 반지를 하스드루발에게 돌려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물건이 정말 마음에 드는군. 여기서 이러지 말고 조용한 곳에서 흥정을 해 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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