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 [149화] 너, 내 동료가 돼라! (2)
히에로니무스 왕과 하스드루발은 내관의 안내를 받으며 인적이 드문 복도를 지나 왕궁 깊숙한 곳에 있는 밀실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내관은 밀실의 문을 두 손으로 밀었다.
그러자 무거운 청동문이 천천히 대리석 바닥을 스치며 움직이면서 적막한 복도 안에 고막을 긁는 듯한 거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 드르르르륵.
문이 열린 후 먼저 히에로니무스 왕이 앞장서서 밀실로 들어가자 하스드루발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간 후 내관은 공손하게 왕에게 인사한 후 밀실 밖에서 문고리를 잡고 잡아당겨 청동문을 닫았다.
문이 완전히 닫힌 후 하스드루발은 고개를 돌려 밀실 안을 둘러보았다.
단 하나의 창문도 없는 넓은 방의 중앙에는 사람 여섯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백향목으로 만든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는 자신을 이런 곳으로 데려온 어린 왕의 등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보안이 철저한 건 좋지만, 이건 좀 과하지 않나? 여기 온 것 자체가 밀실야합을 하겠다고 주변에 티 내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냥 왕의 서재 같은 장소에서 얘기하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히에로니무스 왕은 테이블의 한쪽 가장자리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은 후 들뜬 목소리로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어서 짐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시지요! 오늘은 그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할 테니 찰나의 시간조차 아깝습니다!”
하스드루발은 그가 권하는 대로 왕의 맞은편에 앉았다.
히에로니무스 왕은 하스드루발이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이탈리아에 계신 한니발 장군께 사절을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르카 가문의 사람이 먼저 짐을 찾아오다니! 신들께서 짐과 명장 한니발과 하스드루발 사이를 인연의 끈으로 묶어 주시려는 게 틀림없군요!”
하스드루발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숨도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는 왕의 인상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히에로니무스 왕은 장군 출신인 할아버지 히에론 2세를 닮아 나이에 비해 키가 크고 온몸에 제법 근육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제왕의 위엄 대신 소년의 모험심과 야망으로 빛나고 있었고 아직 앳된 얼굴에는 여드름이 가득했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어린 왕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아무리 우리 형제를 존경해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한 달 밖에 안 지났는데 저렇게 들뜬 표정을 짓다니. 몸은 커다랗지만, 마음은 아직 애구나. 하긴 열다섯 살이면 현대에는 아직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야 할 나이지. 어디 한번 잘 구슬려 볼까?’
그는 왕이 말을 마치자 호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하! 저를 명장이라고 불러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우리 바르카 가문에 대대로 전해질 영광입니다!”
“지금 ‘우리’ 바르카 가문이라고 하셨습니까?”
“히에로니무스 전하. 다시 한번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제가 바로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이자 카르타고의 장군인 하스드루발입니다.”
“하스드루발 장군이시라고요! 로마인이 거리마다 넘쳐나는 이곳에 직접 찾아오시다니! 소문대로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저라고 왜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위험을 무릅써서라도 위대한 정복자이자 에페이로스의 왕이셨던 피로스의 후손을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히에로니무스 왕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평소 자신이 수십 년 전 타란토를 중심으로 남부 이탈리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며 로마를 위협한 그리스의 명장 피로스가 외할아버지인 것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히에로니무스 왕의 눈에는 자신이 우상처럼 떠받드는 외할아버지처럼 로마군을 무찌르고 남부 이탈리아를 점령한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영웅으로 보였던 것이다.
평소 존경해 온 영웅이 자신을 치켜세우자 어린 시라쿠사의 왕은 체면도 잊고 크게 기뻐했다.
그는 밀실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역시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이군요! 어서 칸나이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둘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바르카 가문의 두 형제분이 십만 명이나 되는 로마군을 반나절 만에 물리치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심장이 뛰었는지 모릅니다!”
하스드루발은 호기심과 흥분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히에로니무스 왕 앞에서 칸나이 전투의 과정을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하듯 흥미롭게 풀어 나갔다.
어린 왕은 자기도 모르게 점점 허리를 앞으로 숙이며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하스드루발이 과장을 보태 가며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야기가 끝나자 히에로니무스 왕은 감탄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화 속에나 나올 전투가 현실에서 일어났군요! 역시 바르카 가문과 손을 잡기로 마음먹길 잘했습니다! 피로스 왕의 후손이 이대로 평생 로마 원로원의 하인 노릇이나 하면 짐의 앞에서는 겸손한 표정을 짓는 신하들도 속으로는 비웃을 테니 말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카르타고와 시라쿠사가 손을 잡는다면 로마를 정복하는 것도 결코 꿈은 아닐 겁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양국 간의 동맹 체결을 위한 조약 내용에 대해 말씀을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짐이 로마와의 관계를 끊고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는 대가로 우리 시라쿠사는 전 시칠리아를 갖겠습니다.”
“히에로니무스 전하. 이미 잘 아시겠지만, 우리 카르타고는 로마로부터 지중해를 되찾기 위해 이번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시칠리아에 항구를 확보해 카르타고의 상선이 자유롭게 지중해를 누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점은 짐도 잘 알고 있습니다. 대신 카르타고 정부가 매년 짐에게 적당한 사용료를 낸다면 카르타고의 상선이 얼마든지 시라쿠사의 항구를 이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히에로니무스 왕이 내건 조건은 카르타고의 백인회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애초에 카르타고가 로마와 전쟁을 벌이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시칠리아의 영토를 되찾아 해군기지를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카르타고가 이번 전쟁에서 로마에게 승리하려면 시라쿠사의 도움은 선택이 아닌 필수임이 분명했다.
이런 이유로 원 역사의 한니발은 카르타고 백인회의 극렬한 반대를 간신히 잠재우고 전쟁이 끝난 후 시칠리아를 전부 내놓으라는 히에로니무스 왕의 제안을 전면 수용했다.
하스드루발은 정복욕에 불타는 어린 왕의 내건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이번 동맹을 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짜증 나긴 하지만, 지금 사정이 급한 건 우리 카르타고다. 여기선 일단 히에로니무스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게 정답이겠지.’
그는 짐짓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히에로니무스 왕에게 말했다.
“흠··· 좋습니다. 지금 우리 카르타고인에게 숙적 로마를 물리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으니 전하의 말씀대로 시칠리아 전역을 양보하겠습니다. 대신 전하께서도 제 조건 세 가지를 수용해 주셨으면 합니다.”
“말씀해 보시지요.”
“첫째는 카르타고의 함대가 시칠리아 주변에서 로마의 함대가 해전을 벌일 때 카르타고 정부의 요청이 있을 경우 지체 없이 지원군을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좋습니다. 진정한 동맹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지요.”
“둘째로 지금까지 시라쿠사가 로마에 팔던 밀을 이탈리아에 있는 제 형 한니발에게 팔아 주셨으면 합니다.”
“카르타고 해군이 제대로 제해권만 확보한다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셋째로는 양국이 동맹을 맺은 사실은 아직 공표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히에로니무스 왕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국정 운영 경험이 부족한 그도 시라쿠사가 카르타고 편으로 돌아섰다는 사실을 전 지중해 세계에 하루라도 빨리 알리는 편이 로마 연합의 결속력을 흔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뭡니까?”
“카르타고 정부는 몇 주 안에 로마와 몰타섬 탈환을 위해 함대를 출격시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해전이 끝난 뒤에 양국 간의 관계를 공표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짐의 함대로 로마 해군을 지원하는 척하면서 뒤통수를 치란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내 핏줄에 흐르고 있는 건 영웅의 혈통입니다! 강도나 사기꾼의 피가 아니란 말입니다!”
히에로니무스 왕은 갑자기 분노로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어린 왕을 보며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간신히 억눌렀다.
‘이 녀석이 전쟁이 무슨 일대일 결투인 줄 아나. 중2병 걸린 놈 달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을 다듬은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히에로니무스 전하. 전하께서는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가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리스인 중에서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를 업신여기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왕과 거짓으로 평화협정을 맺고 복병이 잔뜩 숨어 있는 거대한 목마를 선물했습니다. 그 덕에 몇 년 동안이나 함락되지 않았던 난공불락의 요새 트로이가 하룻밤 만에 잿더미가 되었지요.”
“그건······.”
“전하. 누구도 그저 전장에서 용맹하게 싸우고 병사를 지휘하는 것만으로는 위대한 정복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외조부이신 피로스 왕과 같은 업적을 남기고 싶으시다면 때로는 정면으로 맞설 수 없는 강한 적을 이기기 위해 지혜를 발휘하셔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흐음··· 그 말씀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군요.”
“생각해 보십시오. 겨우 열다섯 나이에 함대를 지휘해 로마의 대함대를 물리치시면 온 지중해가 전하의 용맹과 지혜를 칭송할 겁니다! 저와 함께 바다 위에서 위대한 승리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시지요!”
“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바르카 가문의 하스드루발 장군이 카르타고 최고의 지략가라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장군의 말씀대로 다음 해전 전까지는 로마와의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하스드루발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은 하스드루발이 카르타고에서 가지고 온 재물을 앞으로 시라쿠사가 한니발에게 보낼 밀의 대금으로 하기로 합의한 후 회담을 마쳤다.
모든 조약 조건을 정한 후 히에로니무스 왕은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조약 내용을 적어 내려간 후 시라쿠사 왕가의 인장을 찍어 하스드루발에게 건네주었다.
하스드루발은 왕이 준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품에 넣은 후 왕궁 밖으로 나와 왕궁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행원들을 향해 걸어갔다.
장군이 왕궁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행단의 대장이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네. 회담 결과는 성공적이었네. 다행히 내가 생각한 대로 시라쿠사와 동맹을 맺었지.”
“오오! 위대하신 바알 함몬이시여! 이제 우리의 바다를 되찾을 날이 머지않았군요!”
“앞으로도 모든 게 생각대로 된다면 그리되겠지. 그건 그렇고 내가 히에로니무스 왕을 만나는 동안 시라쿠사에 잠복해 있는 두 사람과는 접촉했나?”
“명령대로 한니발 장군님의 수하인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에게 금화 주머니를 전하고 은밀히 친카르타고파 시라쿠사 시민을 무장시킬 장비를 장만하고 친로마파의 동향을 주시하라고 전했습니다.”
“잘했네. 앞으로는 언제 시라쿠사의 친로마파가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네. 우리 편으로 돌아선 시라쿠사 왕가를 반드시 지켜 내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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