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 [150화] 몰타섬을 탈환하라! (1)
하스드루발은 시라쿠사에서의 외교 임무를 모두 마친 후 곧바로 카르타고에서 타고 온 상선의 갑판 위에 올랐다.
그는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튜닉 자락을 손으로 잡으며 선장에게 말했다.
“어서 출발하자! 카르타고에서 해야 할 일이 잔뜩 생겼다!”
선장은 장군의 명령에 따라 최대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러 닻을 올리고 거대한 사각돛을 펼쳤다.
아직 초봄이라 바닷바람이 변덕스러울 시기였지만, 다행히 카르타고의 사절단이 탄 배의 돛은 순풍을 받아 앞쪽으로 볼록하게 부풀었다.
덕분에 하스드루발이 탄 배는 시라쿠사에서 출항한 지 사흘째 되던 날 한낮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항구에 정박하자마자 카르타고 정부에 외교 성과를 보고하기 위해 백의회 건물로 향했다.
하스드루발이 의회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열띤 토론을 벌이던 백인회 의원들이 하나둘 입을 닫고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104명의 의원 앞에 서서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존경하는 백인회 의원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시칠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인 시라쿠사는 이제 우리 카르타고의 동맹국입니다!”
젊은 장군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건물 안에 울려 퍼지자 카르타고의 백인회 의원들이 일제히 기쁨의 환호성을 터뜨렸다.
“자비로운 타니트 여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역시 하스드루발 장군님이십니다!”
그러나 백인회 의원들이 하스드루발이 가져온 시라쿠사 왕가의 인장이 찍힌 조약서를 돌려 읽자 불을 지핀 용광로와 같던 의회 건물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도 하스드루발을 칭찬하기 바빴던 백인회 의원 중 몇몇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고 불만을 토해 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대체 이게 뭡니까! 로마군을 몰아낸 후에 시칠리아를 통째로 시라쿠사에 넘긴다는 거나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국가의 존망이 달린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어려운 판단을 하셨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래서야 전쟁에서 이긴 후에도 로마 대신 시라쿠사의 눈치를 보며 지중해에 무역선을 띄우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스드루발은 볼멘소리를 해 대는 의원들을 바라보며 싱긋 웃은 후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백인회 의원 여러분. 제 아버지이신 하밀카르 총독님께서는 어린 시절 제게 진정한 카르타고인이 되려면 장부와 계약서를 읽은 때는 한 글자도 빼놓지 말고 자세히 읽는 습관부터 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조약서의 제14조 조항을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 봐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조약 내용에 이의를 제기한 의원들이 다시 조약서를 돌려 가며 읽었다.
그러자 의원들의 시선이 하스드루발이 말한 조항을 더듬어 나갈 때마다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그들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하··· 이런 곳에 독소 조항을 숨겨 두셨었군요! 장사에 뼈가 굵은 저도 그만 못 읽고 지나쳤습니다!”
“허허허··· 과연 우리 해외파의 수장이신 하밀카르 총독님의 아드님답습니다! 앞으로 바르카 가문과 계약을 할 때에는 계약서를 더 꼼꼼하게 읽어야겠군요!”
문제의 조약서 제14조 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14조] 카르타고 정부는 시칠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을 모두 격퇴한 후 시라쿠사의 왕 히에로니무스가 시칠리아 전체의 유일하고 적법한 통치자임을 인정한다. 단, 전 시칠리아의 도시 중 과반수 이상이 히에로니무스 왕의 통치에 반대하는 경우 본 조항은 효력을 상실한다.
지금은 수십 년 전부터 로마와 시라쿠사가 시칠리아를 양분하여 통치하고 있지만, 한때 시칠리아에는 수십 개의 독립된 도시국가가 모여 있었다.
그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도시의 시민 중 상당수는 지금까지도 로마의 통치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로마 원로원이 카르타고 정부가 시칠리아를 통치하던 시절과는 달리 자신들의 참정권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로마군이 물러간 후 왕정국가인 시라쿠사가 시칠리아 전체를 지배하려 들면 이제야 고대 아테네식 민주정을 회복할 거라고 기대하던 전 시칠리아의 시민들이 격하게 분노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하스드루발은 히에로니무스 왕과 조약 내용을 조율하면서 카르타고가 시라쿠사에게 안정적으로 항구를 빌려 쓰려면 먼저 시라쿠사가 전 시칠리아를 통치할 역량을 입증해야 한다고 설득해 이 조항을 끼워 넣었다.
물론 이 조항으로 인해 로마와의 전쟁이 끝난 후 카르타고와 시라쿠사 사이에 분란이 야기될 수도 있겠지만, 그때쯤이면 카르타고는 전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돼 있을 터였다.
어린 시라쿠사의 왕이 시칠리아에서 로마군이 물러가기만 하면 전 시칠리아가 위대한 정복자의 후손인 자신을 기꺼이 왕으로 인정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진 점을 간파하고 잘 이용한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의회 건물 안의 공기가 차분해진 것을 확인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백인회 의원 여러분. 우리는 누구에게도 조상 대대로 우리의 영토였던 시칠리아를 넘기지 않을 겁니다.”
그의 말을 마지막으로 백인회 의원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마쳤다.
* * *
시라쿠사와 동맹을 맺은 후 카르타고 정부에 더는 로마 해군과의 일전을 뒤로 미룰 이유는 없었다.
40만 카르타고인은 한마음이 되어 로마로부터 시칠리아를 되찾기 위한 해전을 벌일 함대를 꾸리기 위해 모든 국력을 쏟아부었다.
덕분에 3월이 끝나기 전에 카르타고 군항의 격납고에는 새로 건조한 전함이 빼곡히 들어찼고 군항의 인부들은 전함에 실을 무기와 보급품을 나르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던 중 어느덧 달이 바뀌어 기원전 215년 4월의 첫날이 밝았다.
드디어 카르타고의 군항에 정박한 220척의 전함은 로마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출격할 준비를 마쳤다.
하스드루발은 큰 매형 보밀카르와 함께 군항을 둘러보며 함대가 출격하기 전의 마지막 점검을 했다.
보밀카르가 신형 전함 멜카르트의 선체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이제야 시칠리아를 되찾기 위한 첫발을 내딛는구나! 바다의 지배자 멜카르트 신이시여! 부디 저희의 배에는 순풍을 보내 주시고 로마의 배에는 폭풍을 보내시어 빼앗긴 바다를 되찾게 도와주소서!”
“매형. 너무 걱정 마세요. 계획대로만 되면 별 피해 없이 몰타섬을 되찾을 수 있을 거예요.”
“좀 교만한 소리긴 하지만, 내가 지휘할 함대보다는 처남과 이름이 같은 제독에게 맡길 함대 쪽이 더 걱정이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그렇게 유능한 분은 아니시거든······.”
“뭐··· 그 점까지 고려해서 짠 작전이니 잘 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스드루발은 시라쿠사와 동맹을 맺고 카르타고로 돌아온 날 이후 거의 매일 카르타고 해군의 수장인 큰 매형 보밀카르와 회의를 하며 몰타섬 탈환 작전의 전략을 세웠다.
그 결과 함대를 둘로 나누어 카르타고 해군의 지휘관인 대머리 하스드루발이 전함 120척을 이끌고 시칠리아 서남부를 공격하는 척하며 로마 해군의 주의를 끄는 사이 보밀카르가 지휘하는 전함 100척은 몰타섬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유능한 지휘관이 부족한 카르타고군의 약점을 보완하면서 수적으로 우세한 로마 해군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이었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원 역사에서 무모하게 로마 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사르데냐를 공격하다 자신이 지휘하던 함대를 궤멸시킨 카르타고 해군의 제독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하스드루발은 큰 매형 보밀카르를 통해 대머리 하스드루발에게 로마의 함대와의 교전을 최대한 피하면서 주의만 끌라고 신신당부했다.
보밀카르는 고개를 돌려 하스드루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나머지는 신들께 맡기는 수밖에. 자! 이제 전함에 타자! 처남은 나랑 같이 기함에 타. 이번 기회에 함대를 지휘하는 법을 배워 둬.”
“알겠습니다 매형!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이 자주색 사각돛을 단 거대한 5단 노선에 오르자 건장한 리비아 출신 노예 수백 명이 바다에 반쯤 잠겨 있는 쇠사슬을 끌어당겨 수문을 열었다.
항아리 모양 항구의 입구가 완전히 열리자 거대한 갤리선 220척이 벌떼처럼 지중해로 몰려나와 잔잔한 수면을 가르며 전장으로 향했다.
* * *
“드디어 카르타고의 해적 떼와 일전을 벌일 때가 됐구나! 내 이번에는 반드시 칸나이에서의 치욕을 갚아 주리라!”
로마의 전직 집정관 바로는 카르타고의 대함대가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몰타섬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눈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는 매일 밤 한니발의 군대에게 포위당한 수만 명의 아군을 뒤로하고 살기 위해 말을 달리던 그 날의 악몽에 시달려 왔다.
바로는 그날 이후로 칸나이에서 전사한 로마 군단병보다 더 많은 카르타고인을 전장에서 무찔러 자신의 오판으로 희생된 로마 시민들의 넋을 달래야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교활한 카르타고 놈들도 국경을 맞댄 이집트가 적이 되니 마음이 급해졌군! 이번 기회를 잘 이용하면 한니발을 이탈리아에 가둬 놓고 말려 죽일 수 있게 되겠지!”
그는 즉시 연락선을 띄워 시라쿠사의 왕 히에로니무스에게 지원군을 요청한 후 휘하의 함대를 출격시킬 준비를 시작했다.
바로는 카르타고 해군이 불을 뿜는 무서운 신무기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라쿠사의 함대가 로마 해군에 합세해 압도적인 숫자로 적의 함대를 포위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는 휘하의 함대를 모두 이끌고 몰타섬의 군항으로 다가오는 카르타고의 함대를 향해 나아갔다.
마침내 카르타고와 로마의 함대가 서로의 전함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 다다르자 기함에 탄 바로가 우렁찬 목소리로 선원들에게 명령했다.
“카르타고의 함대가 보인다! 전 함대 적의 화공에 대비해라!”
그러자 기함의 선원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물이 든 통과 모래가 들어 있는 포대 자루를 갑판 곳곳에 배치했다.
커다란 깃발을 든 로마 해군 기함의 기수는 깃발을 흔들어 대며 전직 집정관의 명령을 전함에 알렸다.
그러자 로마군 함대의 진형이 일사불란하게 꿈틀대더니 진형을 바꾸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바로의 함대는 백병전을 걸기에 유리하면서도 갑작스러운 적의 화공에 대비해 전함 사이의 거리를 적당히 띄운 일자 대형을 짰다.
하스드루발은 먼발치에서 그런 로마 함대의 모습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리며 보밀카르에게 말했다.
“로마 놈들의 아르키메데스의 불꽃 대응책이 벌써 꽤나 발전했네요.”
“그렇네. 적응력과 학습능력 하나는 정말 뛰어난 놈들이야. 저 모습을 보니 이번 전쟁을 그리 오래 끌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저도 동감입니다.”
양군의 함대는 검을 움켜쥐고 서로를 노려보며 상대방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전사처럼 돛을 내리고 적진을 향해 서서히 노를 저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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