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53화 (153/201)

[ 153 ] [152화] 명장 vs 맹장 (1)

스폴리아 오피마(Spolia Opima).

전장에서 적군의 지휘관과 일대일 전투를 벌여 승리한 로마의 군인이 적장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을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로마의 최고신 유피테르의 신전에 바치는 행사.

직역하면 ‘막대한 전리품’이라는 뜻인 스폴리아 오피마는 로마인이 군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으로 개선장군으로서 4두 마차에 오르는 것보다 더 큰 영예로 여겨졌다.

이처럼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스폴리아 오피마를 거행한 사람은 로마의 기나긴 역사 동안 겨우 세 명뿐.

그중 최초로 유피테르 신전에 적장의 전리품을 바친 자는 로마를 건국했다고 전해지는 로물루스.

두 번째는 전설적인 로마의 명장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스폴리아 오피마의 주인공은 바로 원 역사에서 한니발의 군대를 집요하게 공격해 ‘로마의 검’이라는 별칭을 남긴 로마의 맹장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이다.

* * *

기원전 215년 4월 중순.

파비우스와 함께 그해의 집정관으로 선출된 마르켈루스는 원로원 회의를 마치고 쿠리아 호스틸리아를 나서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바라보며 고함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히에로니무스 이 빌어먹을 애새끼가! 감히 우리 로마를 배신하다니!”

평소라면 다른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신성한 쿠리아 호스틸리아 앞에서 광태(狂態)를 보이는 그를 비난했겠지만, 그날은 아무도 노성을 질러 대는 마르켈루스를 말리지 않았다.

거의 모든 로마 시민이 시라쿠사의 어린 왕 히에로니무스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치를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해군은 카르타고 해군과 치열한 해전을 벌이는 도중 지원군으로 알았던 시라쿠사 함대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배했다.

그 결과 로마는 단 하루 만에 몰타섬과 전직 집정관 바로, 5단 노선 93척, 그리고 약 2만 7천 명이 넘는 해군 병사를 잃고 말았다.

반면 카르타고 해군은 5단 노선 6척이 파손되고 병사 약 1천 5백 명 정도를 잃었을 뿐이었다.

이번 해전의 패배로 로마는 시칠리아에 남은 해군 전함으로 시라쿠사를 견제하느라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 동지중해를 항해하는 카르타고의 수송 선단을 막을 수 없게 됐다.

이런 이유로 로마 원로원은 조금 전 끝난 회의에서 셀레우코스 제국과 카르타고 사이에 끼인 중요한 동맹국 이집트를 보호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로 육군을 보내기로 결의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에 막대한 양의 밀을 공급하던 시라쿠사가 등을 돌린 마당에 이집트까지 멸망해 버리면 당장 이탈리아의 군단병들이 먹을 군량 수급에 차질이 생길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마르켈루스는 한동안 분을 이기지 못해 고함을 지르다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고는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비열한 히에로니무스와 바르카 가문의 협잡꾼 놈들! 내 위대한 번개의 신 유피테르께 맹세코 반드시 내 손으로 놈들을 죽이고 말 테다!”

그는 치밀어 오른 분노에 용암처럼 얼굴이 벌게진 채로 카피톨리노 언덕 위에 있는 유피테르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똑같이 엄격한 그는 방금 자신이 혼자 내뱉은 말을 로마의 주신(主神) 앞에서 정식으로 맹세하고자 했다.

마르켈루스는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호위하는 릭토르들을 밖에서 기다리게 한 후 입구에 늘어서 있는 굵직한 대리석 기둥 사이를 지나 신전에 들어섰다.

그는 신전의 복도를 통과해 신상(神像)이 모셔져 있는 신전 안쪽의 방 켈라(cella)로 걸어 들어갔다.

마르켈루사가 지나가는 도중에 마주친 로마 시민들은 유명한 맹장의 험악한 표정을 보고 안색이 하얘져서는 슬금슬금 길을 비켰다.

로마의 일곱 언덕에서 사는 사람치고 전 이탈리아에서 그가 한번 불같이 화를 내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는 켈라에 들어서서 유피테르의 신상을 향해 다가가다 신전에 바쳐진 갑옷에 시선이 닿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본래 흉포한 가에타사이족의 왕 워리도멀스가 입고 있던 철제 미늘흉갑은 주인을 잃고 로마의 신에게 바쳐진 뒤에도 그 광택을 잃지 않고 신전 내부를 밝히는 등불의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는 그 갑옷을 바라보며 비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위대하신 유피테르시여! 7년 전 당신께 저 갑옷을 바칠 때처럼 제가 적장 한니발의 갑옷을 당신께 바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바로 그때, 마르켈루스의 등 뒤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번을 봐도 갈리아인이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는 훌륭한 갑옷입니다.”

그 말에 마르켈루스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의 갈색 눈동자에 왼쪽 눈에 안대를 두른 건장한 청년이 서 있었다.

바로 올해의 선거에서 재무관에 당선된 젊은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가주 스키피오였다.

마르켈루스는 그를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뜨며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평민 출신임에도 어지간한 귀족파 원로원 의원보다 보수적이었기에 아직 20대 초반에 불과한 스키피오가 시민의 인기를 등에 업고 로마의 고위직인 재무관에 당선된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켈루스는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나도 동감이네. 워리도멀스 왕과 싸울 때 저 갑옷을 뚫을 자신이 없어서 그의 허벅지를 창으로 찔러서 낙마시켰었지. 그나저나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가주께서 무슨 일로 나에게 말을 거는 거지? 우리가 신전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고 담소를 주고받을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닐 텐데?”

“사실 우연히 마주친 것은 아닙니다. 릭토르들과 함께 광장을 지나시는 집정관님을 보고 이곳까지 따라왔으니 말입니다.”

“뭐야? 대체 왜? 가세가 기운 코르넬리우스 가문을 부흥시키려고 이제 와서 나와 친해지고 싶기라도 한 건가? 자네 아버지가 내 정치적 경쟁자였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을 텐데?”

“조국 로마가 망하게 생겼는데 그따위 정치질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스키피오는 감히 로마의 집정관에게 냉랭한 목소리로 누가 들어도 불손한 대답을 했다.

그러나 활화산 같은 성정으로 유명한 마르켈루스는 어쩐 일인지 그런 젊은 안찰관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하나뿐인 그의 눈에서 조국 로마를 위협하는 카르타고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것을 보고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입가에 조소가 아닌 미소를 띠며 말했다.

“곱게 자란 명문 귀족 가문 출신치고는 제법 쓸 만한 눈빛을 하고 있군. 내 이번만은 특별히 네 무례를 추궁하지 않도록 하지. 그래. 말해 봐라. 왜 내 뒤를 밟은 거냐?”

“곧 증오스러운 적장 한니발을 물리치시기 위해 원정을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저를 원정군의 장교로서 참전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마르켈루스의 집정관님께서 다시 한번 스폴리아 오피마의 주인공이 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스키피오의 대답을 듣고 마르켈루스는 자신이 신성한 유피테르의 신전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조국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의 정적에게 고개를 숙이겠다는 건가! 계집애처럼 말끔하게 생겨 가지고 요즘 젊은이답지 않은 훌륭한 투지를 가슴에 품고 있었구만!”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좋다! 네 소원을 들어주지! 대신 위대하신 유피테르신 앞에서 맹세해라! 적장 한니발의 죽는 모습을 보기 전에 절대 손에서 검을 놓지 않겠다고 말이다!”

스키피오는 마르켈루스의 요구에 유피테르의 신상 앞으로 걸어 나가 무릎을 꿇음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신상을 올려다보며 비장한 목소리로 맹세했다.

“올림포스의 모든 신 중에서 가장 위대하신 번개의 신 유피테르시여! 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간악한 적장 한니발이 저승에 가는 그날까지 제 심장이 멈추지 않는 한 절대로 손에서 검을 놓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 * *

기원전 215년 5월 말.

시라쿠사가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으면서 이미 전 지중해 세계로 번져 나가고 있던 전쟁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로마는 카르타고와 시라쿠사로부터 시칠리아를 사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반도를 지키던 함대의 상당수를 시칠리아에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미 로마의 일리리아 속주를 점령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침략을 막아 내면서도 전함 건조에 열을 올렸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는 그동안은 강력한 로마 해군이 두려워 바다 건너의 이탈리아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지키는 로마 함대의 규모가 갑자기 줄어들자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왕도 7만 대군을 일으켜 불구대천의 원수 이집트를 정복하기 위해 남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필로파토르는 마케도니아를 상대하느라 바쁜 그리스 도시국가의 지원군을 기다리지 못하고 안티오코스 왕의 남진을 막기 위한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듯 지중해 거의 전역의 상황이 카르타고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듯했지만, 이탈리아 남부에 자리 잡은 한니발은 전쟁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늘 공격만 하던 그에게 남부 이탈리아라는 지켜야 할 영토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명장이라도 몸이 하나인 만큼 다른 드넓은 남부 이탈리아를 지키기 위해서는 부하 장수에게 병력을 나눠 주어 지휘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관으로서 한니발의 휘하에서 전장에 설 때는 눈부신 활약을 보이던 바르카 가문의 장교들은 사령관으로서 단독으로 군대를 지휘하게 되자 한니발이 없을 때는 전투에서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더 많아졌다.

한니발은 그때마다 수세에 몰린 아군을 지원하려 했으나 번번이 한발 늦게 전장에 도착하고 말았다.

로마의 맹장 마르켈루스가 지휘하는 군대가 사냥감의 뒤를 쫓는 하이에나처럼 집요하게 그의 뒤를 쫓아오면서 소규모 전투를 강요해 왔기 때문이다.

한니발은 대규모 회전을 벌여 그를 떨쳐 내고 싶었지만, 마르켈루스는 단단한 숙영지의 목책 뒤에 숨어 있다 한니발이 행군을 시작하면 카르타고군 행군 대열의 후미를 물어뜯었다.

언제나 난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마르켈루스의 군대는 큰 인적 손실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것은 한니발의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로마 연합의 인구는 카르타고에 비해 두 배가 넘었기 때문에 이대로 소모전이 계속되면 한니발은 언젠가 세력을 잃고 이탈리아반도 밖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막사에서 군사회의를 하던 도중 한니발은 더는 참지 못하고 휘하의 장교들에게 소리쳤다.

“저 마르켈루스라는 적장은 미친개나 마찬가지구나! 아무리 몽둥이찜질을 해서 쫓아내도 뒤돌아보면 다시 돌아와 내 다리를 물어뜯으니 말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이탈리아 남부에 얼마 안 남은 로마 식민지인 파이스툼을 공격한다! 그곳이 위험해지면 마르켈루스도 회전에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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