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 [153화] 명장 vs 맹장 (2)
한니발은 군사회의를 마친 후 기병대장 마하르발에게 병사 3만을 맡겨 캄파니아 지역을 지키게 한 후 자신은 병사 2만 명을 이끌고 작년 겨울을 보낸 카푸아에서 나와 남동쪽으로 행군했다.
그는 이탈리아 남서부의 루카니아 지역에서 유일하게 로마 연합을 이탈하지 않은 로마의 식민도시 파이스툼의 영토를 약탈해 마르켈루스를 전장으로 유인할 생각이었다.
부관 기스코가 말을 타고 한니발의 곁에서 행군하다 고개를 돌려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한니발 장군님. 주제넘게 제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이 정도 병력으로는 파이스툼을 함락시키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번 원정의 목표는 오직 적장 마르켈루스를 잡는 것뿐입니까?”
“기스코. 대대장으로 승진하더니 제법 눈치가 빨라졌구나. 네 말대로다.”
“과찬이십니다. 그렇지만, 장군님의 깊은 속을 헤아리려면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제 짧은 식견으로는 타란토를 점령하지 못한 상황에서 적장 한 명을 잡기 위해 시간을 보내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아직 마르켈루스가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군. 용맹하면서도 교활한 자다. 하스드루발이 미리 경고해 주지 않았으면 작년에 마르켈루스에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투에서 패할 뻔했지.”
원 역사의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기원전 216년 가을에 군대를 이끌고 캄파니아 지역에 있는 작은 도시 놀라로 진군했다.
그리스인인 놀라 시민 대부분은 애초부터 로마 연합을 탈퇴하고 이탈리아의 해방자를 자처한 한니발과 동맹을 맺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성문을 열었다.
한니발은 처음에는 환호하는 놀라 시민의 환영을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행군했지만, 곧 거리 주변 건물에 숨어 있던 로마군에게 공격당해 병사 5천 명을 속절없이 잃고 간신히 전장이 되어 버린 시내에서 도망친다.
마르켈루스가 로마와의 동맹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몇몇 놀라 귀족의 도움을 받아 한니발이 도착하기 전에 시민들 몰래 놀라 시내에 병사들을 들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는 원 역사에 한니발이 2차 포에니 전쟁 도중 로마군의 매복에 당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로 남았다.
현재의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이 미리 놀라 시내에 입성할 때 로마군의 매복에 주의하라고 귀띔해 준 덕분에 오히려 마르켈루스의 복병을 무찔렀지만, 적장을 처치하는 데는 실패했다.
마르켈루스가 카르타고군에게 예상치 못한 역공을 당한 상황에서도 귀신같은 검술로 바르카 가문의 정예병들을 차례로 베어 넘기며 기어코 활로를 뚫어 냈기 때문이다.
한니발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기스코에게 말했다.
“기스코. 혹시 전장에서 마르켈루스와 마주치면 절대로 혼자서 그자에게 덤비지 마라. 나도 그자와 일대일로 결투하면 반드시 이길 거라고 장담하지 못하겠으니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한니발 장군님.”
* * *
마르켈루스는 정찰을 나갔던 기병에게 한니발이 군대를 이끌고 카푸아를 나섰다는 보고를 받고 곧바로 로마 원로원에 전령을 보내 그 사실을 알렸다.
그는 전령이 출발하자마자 카푸아 근처에 지은 숙영지를 철거한 후 휘하의 로마군 2개 군단을 이끌고 한니발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마르켈루스가 지휘하는 부대의 병사 중 상당수가 그날의 행군을 마치고 숙영지의 천막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불안한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저번에 정찰 다녀온 친구한테 들었는데, 한니발의 군대도 병사가 이만 명 정도 된대.”
“뭐? 육만으로 십만을 이긴 괴물을 우리끼리 쫓아가 봐야 개죽음만 당하는 거 아니야?”
“내 말이! 마르켈루스 집정관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어!”
스키피오는 일과를 마치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다 우연히 천막 밖으로 새어 나온 병사들의 대화를 듣고는 걱정에 휩싸였다.
“병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군. 곧 그 한니발이 지휘하는 군대와 사투를 벌이게 생겼으니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이대로 방치하면 탈영병이 발생할 수도 있겠어.”
그는 잠시 선 채로 생각에 빠져 있다가 발걸음을 돌려 집정관에게 찾아갔다.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지도를 보며 전략을 구상하고 있던 마르켈루스는 자신에게 찾아온 스키피오를 지휘관 막사 안으로 들였다.
“스키피오 기병대장. 무슨 일인가?”
“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마르켈루스 집정관님. 급히 보고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말해 봐라.”
“현재 부대의 사기 저하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군단병 대부분이 수적으로 우세를 점하지 않고 적장 한니발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는 걸 겁내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자네가 집정관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할 텐가?”
“저라면··· 병사들과 대화를 나누며 긴장을 풀어 줄 겁니다.”
“명문 귀족 가문의 자제다운 방식이군. 앞으로 며칠 후면 적과 전투를 벌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물러터진 방법으로 그때까지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게 할 수 있겠나?”
“그럼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쯤에는 군기를 잡을 생각이니 그때까지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집정관님.”
스키피오는 집정관 마르켈루스에게 경례하고 막사에서 나와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 * *
마르켈루스와 스키피오가 대화를 나눈 다음 날.
로마군 병사들은 해가 뜨자마자 점호를 마친 후 서서 생채소와 과일, 그리고 고대 로마의 건빵인 파니스 밀리타리스 따위로 아침을 때웠다.
집정관 마르켈루스가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으면 정신력이 약해진다는 로마인의 미신에 따라 병사들에게 아침에는 간단히 요기만 하도록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로마 군단병들은 오늘 하루 무게가 거의 30kg에 가까운 완전군장을 하고 하루 20km 이상을 행군해야 했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그런 군단병 중 두 명이 부실한 아침 식사를 억지로 입에 욱여넣으며 투덜거렸다.
“이런 젠장! 이놈의 지겨운 파니스 밀리타리스! 먼지를 잔뜩 모아서 딱딱하게 굳히면 딱 이런 맛이 나겠네!”
“이딴 것만 먹고 어떻게 점심때까지 행군하라는 거야!”
“점심이라고 뭐 다를 게 있냐? 기껏해야 밀가루 죽에 조미료도 못 치게 한 생고기나 구워 먹겠지.”
“아, 도저히 안 되겠다. 야. 잠깐만 이리 가까이 와 봐. 내가 좋은 거 줄게.”
“뭔데 그래?”
“이거 받아. 오늘도 개고생할 건데 밥이라도 잘 먹어야지. 지금 몰래 먹어 버리자.”
“어? 이거 삶은 달걀 아냐? 이 귀한 걸 어디서 났어?”
“저번에 정찰 나갔다가 주변에 있는 민가에서 몰래 몇 개 훔쳤어. 들키기 전에 어서 먹자!”
두 병사는 서둘러 삶은 달걀의 껍데기를 벗기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의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내 눈앞에서 대놓고 명령을 어기다니. 정신이 나간 놈들이군.”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달걀을 땅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들이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자 도끼눈을 뜨고 있는 집정관 마르켈루스와 파스케스를 들고 있는 릭토르 열두 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르켈루스는 너무 놀란 나머지 변명도 못 하고 굳어 버린 병사들을 노려보며 릭토르들에게 말했다.
“이 발칙한 놈들을 숙영지 한가운데에 있는 공터로 끌어내라. 전군이 보는 앞에서 항명죄로 처벌한다.”
“집··· 집정관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닥쳐라! 뭣들 하느냐! 당장 이놈들을 끌어내라!”
두 병사는 건장한 릭토르들에게 양팔을 붙잡혀 숙영지의 공터로 끌려가 옷이 벗겨진 후 형틀에 묶였다.
마르켈루스는 모든 병사가 공터로 모이자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했다.
“모두 잘 들어라! 이 두 사람은 감히 집정관의 명령을 거역해 내게 군권을 부여한 조국 로마를 모독했다! 따라서 군법에 따라 항명죄로 처벌하니 너희는 이자들을 보며 교훈을 얻어 앞으로 군율을 엄격히 지키도록 해라!”
그는 연설을 마친 후 묶여 있는 병사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릭토르 두 명을 바라보며 외쳤다.
“시작해라!”
집정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릭토르들이 손에 들고 있던 가죽 채찍으로 두 병사의 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짜악!
음속보다 빠른 채찍이 등에 닿자 두 병사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으아악!”
스키피오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말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온 마르켈루스가 채찍을 맞고 있는 병사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이제 병사를 다루는 법을 좀 알 것 같나?”
“잘 모르겠습니다. 겨우 달걀 좀 먹으려 한 것치고는 지나친 벌을 받는 것 같습니다.”
“평소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이번처럼 강적을 상대해야 할 때는 꼭 필요한 일이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래서는 병사들이 집정관님을 적장 한니발보다 더 두려워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거다. 좋은 지휘관은 누구보다 솔선수범하여 군율을 지키면서 부하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병사들이 지휘관보다 적장을 두려워하게 되면 그 군대는 결코 적에게 승리할 수 없는 법이다.”
* * *
기원전 215년 5월 초.
마르켈루스의 군대가 파이스툼 인근에 도착하자 한니발은 보란 듯이 대대적인 약탈을 시작했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로마군의 숙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초여름에 수확하는 가을밀이 무르익어 가는 들판으로 뛰쳐나가 농장을 약탈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그러나 한니발의 기대와는 달리 마르켈루스는 튼튼한 숙영지의 목책 뒤에 숨어서 정찰병만을 내보낼 뿐이었다.
한니발은 약탈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나도 로마군이 미동도 보이지 않자, 더 과감한 작전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그날 저녁 자신의 막사에 모든 장교를 소집해 군사회의를 열었다.
모든 참석자가 자기 자리에 앉자 한니발이 입을 열었다.
“자네들도 잘 알다시피 우리의 도발에도 적장 마르켈루스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다혈질의 맹장인 줄 알았더니 파비우스 뺨치는 인내심도 가지고 있었군.”
장군의 말에 기병대장 아즈루바알이 대답했다.
“알면 알수록 무서운 자입니다. 파비우스는 그저 우리가 약탈하려는 마을에 먼저 도착해 불태우기만 할 뿐이었는데, 마르켈루스는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바로 치고 들어오니 더 골치 아픈 적이군요.”
“자네 말대로다. 우리가 적장 마르켈루스에게 발목이 붙잡혀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로마의 군단이 우리의 동맹인 삼니움족을 공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저 신중한 야수에게 거부할 수 없는 미끼를 던져 줄 수밖에 없겠어.”
“미끼라 하시면···?”
“자네와 기스코에게 병력을 나눠 줄 테니 인근 지역을 닥치는 대로 약탈해라. 마르켈루스는 항상 우리 측의 소규모 별동대가 빈틈을 보일 때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해 왔으니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로마군이 습격해 오면 바로 신호탄을 발사해서 장군님께 알리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아즈루바알과 기스코는 각각 병사 3천5백 명을 이끌고 파이스툼의 영토 깊숙한 곳으로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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