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55화 (155/201)

[ 155 ] [154화] 명장 vs 맹장 (3)

“빌어먹을! 건방진 북아프리카의 야만인들이 파이스툼 주변을 아주 초토화시키려고 작정한 모양이군!”

마르켈루스는 자신의 막사 안에서 정찰병의 보고를 듣자마자 고함을 지르며 아기의 머리만큼 커다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의 주변에 있던 두 군단장이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는 집정관에게 말했다.

“마르켈루스 집정관님. 이대로 로마 시민의 소유지가 굶주린 메뚜기 떼 같은 야만인들에게 약탈당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이번에야말로 로마 시민들에게 적장 한니발이 직접 지휘하는 군대와 싸워 이기는 모습을 보여 주겠습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는 고개를 저으며 두 군단장에게 대답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적장 한니발의 부관들은 저희들의 상관에 비하면 대단치 않은 자들이지. 파비우스 집정관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잠시 내버려 두면 반드시 한 놈쯤은 빈틈을 보일 거다.”

두 군단장은 집정관 앞에서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들어도 마르켈루스가 세운 작전은 전략적인 사고를 거친 것이 아니라 그의 야성적인 직감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행운의 여신이 로마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한니발의 부관 기스코가 자신의 군대가 마음껏 로마의 영토를 휘젓고 다녀도 적군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마음이 해이해져 실책을 범한 것이다.

기스코는 파이스툼 주변을 휩쓸기 시작한 지 닷새째 되던 날, 약탈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적진 깊숙한 곳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밀 한 톨도 놓치지 마라! 가져갈 수 없는 식량과 마을은 전부 태워 버려라!”

신임 지휘관의 명령에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출신 병사들이 로마인의 집과 곡식 창고에 횃불을 던졌다.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의 본진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붉은 화염과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자 즉시 휘하의 장교를 모두 불러모은 후 입을 열었다.

“드디어 복수할 때가 됐다! 나는 병사 오천 명을 데리고 겁 없이 우리 영토 깊숙이 들어온 적군을 처단하겠다! 부사령관은 그때까지 나머지 병력으로 카르타고군 본진 근처로 접근해 내 뒤를 치지 못하게 견제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마르켈루스 집정관님.”

“기병대장 스키피오는 나와 함께 간다. 동맹도시 기병대 오백 기를 지휘하도록.”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는 짧은 군사회의를 마친 후 급히 체력이 좋고 다리가 빠른 보병 4천 명과 기병 1천 기를 이끌고 숙영지를 나와 전력으로 불타는 마을을 향해 번개 같은 속도로 진격했다.

그때 기스코는 여전히 밀이 가득 담긴 자루를 나르고 소나 당나귀 따위를 축사에서 끌어내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가 적이 엄습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은 로마군이 이미 마을 근처까지 다가온 후였다.

기스코는 새까맣게 몰려오는 로마 군단병들을 보고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적습이다! 모두 전리품을 버리고 전투태세를 갖춰라!”

지휘관의 외침을 들은 카르타고군 병사들은 급히 검과 투창을 들고 진형을 갖추려 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는 기습을 허용한 적이 정신을 차릴 틈을 줄 생각이 없었다.

“돌격하라! 우리 영토를 침입한 적을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말을 탄 집정관이 우익의 기병대 맨 앞에서 사자의 포효와도 같은 목소리로 외치자 로마군 병사들은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불타는 마을을 등진 카르타고군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와아아아아아아!”

“로마 인빅타!”

양군의 간격이 20m 정도로 좁혀지자 로마군 대열의 맨 앞에서 달려가던 경보병 벨리테스 5백 명이 미처 방패를 들지 못한 카르타고군 병사들을 향해 있는 힘껏 투창을 힘껏 던졌다.

―휘이이이익!

재블린 수백 개가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날치 떼처럼 카르타고군 진영에 빗발치자 백 명이 넘는 갈리아인과 히스파니아 출신 켈트족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끄아악!”

“크허억! 젠장! 다리에 투창을 맞았어!”

마르켈루스는 적진의 대열이 완전히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더욱 기세가 올라 카르타고군을 몰아붙였다.

“군단병 전원 돌격하라!”

집정관의 명령에 임무를 마친 벨리테스들이 로마군 본대의 후방으로 빠지고 군단병의 젊은 신병 하스타티 1천 명이 묵직한 투창 필룸을 적군의 방패를 향해 던졌다.

2m가 넘는 긴 투창이 다시 한번 카르타고군에게 빗발쳐 그들이 들고 있는 방패에 박혔다.

필룸은 한 번 박히면 잘 빠지지 않고 무겁기 때문에 카르타고군 병사 중 수백 명이 못쓰게 된 방패를 버린 후 한 손에 검만 든 채로 쇄도해 오는 군단병을 상대해야 했다.

기스코는 부하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허둥대다 문득 며칠 전 한니발이 준 신호탄이 있음을 떠올렸다.

“제기랄! 이러다가는 전멸하고 말겠다! 당장 한니발 장군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해!”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신호탄을 가지고 있던 병사를 부르다 곧 근처에서 재블린에 가슴을 맞고 전사한 부하의 시신을 발견했다.

기스코는 즉시 죽은 병사의 품을 뒤져 신호탄을 꺼내 든 후 근처 민가에 붙은 불로 심지에 불을 붙였다.

―치지지지직.

작은 불꽃이 심지를 태우며 화약이 가득 들어 있는 대나무 통에 스며들자마자 곧 요란한 폭발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피유우우우웅! 파앙!

폭발음과 함께 구름에 닿을 기세로 공중에 솟아오른 불덩어리가 산산이 부서지자 캄파니아의 푸른 가을 하늘에 노란색 불꽃이 피어났다.

* * *

기스코가 쏘아 올린 불꽃은 전장에서 약 10km 밖에 있는 농장을 약탈하고 있던 한니발의 눈에 띄었다.

그는 자주색 불꽃과 함께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는 장소를 바라보며 탄식했다.

“기스코 이 녀석! 너무 적진 깊숙한 곳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누누이 얘기했건만! 저 위치라면 이미 로마군에게 포위당했다고 봐야겠군.”

그는 눈대중으로 카르타고군 본진과 전장까지의 대략적인 거리를 측정한 후 그를 보좌하고 있던 하급장교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먼저 여기 있는 기병대만 이끌고 아군을 지원하러 가겠다! 넌 최대한 빨리 병사들을 데리고 저기 연기가 나고 있는 곳으로 와라!”

한니발은 장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북아프리카 출신 중기병 1천 기를 이끌고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겨우 몇십 분 만에 전장 부근에 도착했다.

그는 잠시 진격을 멈추어 애마 부케팔로스에게 숨돌릴 틈을 준 후 기스코의 부대를 거의 포위한 로마군의 등을 바라보며 우레같은 목소리로 휘하의 기병대에게 소리쳤다.

“돌격하라!”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북아프리카 중기병 1천 기가 급하게 달려오느라 가져오지 못한 랜스 대신 가벼운 재래식 마상창을 들고 맹렬하게 돌격했다.

―두두두두두두두.

로마군 병사들은 등 뒤에서 지축을 울리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자 뒤를 돌아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소리쳤다.

“등 뒤를 조심해! 적 중기병대가 공격해 온다!”

반면 수세에 몰리던 기스코의 병사들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아군 기병대의 맨 앞에 있는 덩치 큰 검은 흑마를 보고 기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한니발 장군님께서 우릴 구하러 오셨다!”

“이젠 살았어! 모두 다시 무기를 들고 싸워라! 한니발 장군님께서 오신다!”

그러자 전의를 잃고 도망칠 궁리만 하던 갈리아인 병사들이 전선의 맨 앞으로 나서 낫처럼 생긴 거대한 검 팔크스의 자루를 두 손으로 잡고 앞을 가로막는 로마 군단병을 방패 채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크어어억!”

“말도 안 돼! 사람 팔을 방패 채로 두 동강 내다니!”

로마군 병사들이 방패를 말 그대로 반으로 갈라 버리는 갈리아인 병사들의 기세에 잠시 주춤하는 사이 기스코는 간신히 지휘 체계를 회복한 후 부하들에게 외쳤다.

“물러서지 마라! 한니발 장군님께서 오실 때까지 버텨라!”

그가 전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독려한 끝에 로마군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전장 곳곳에서 난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르켈루스는 그 모습을 보며 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적의 지원군이 벌써 나타나다니! 이대로는 오히려 우리가 포위당하고 만다! 전 기병대! 후방에서 몰려오는 적 기병대를 향해 돌격하라!”

집정관의 외침을 들은 나팔수가 뿔나팔을 불어 전 기병대에 돌격 명령을 전했다.

―뿌우우우우우우우.

그러자 로마군 본대의 좌익과 우익에 있던 로마군의 기병 1천 기가 즉시 전선을 이탈해 함성을 지르며 한니발의 기병대를 향해 맞돌격했다.

“와아아아아아아!”

곧 양군의 기병대가 정면으로 충돌하자 대열의 맨 앞에 있던 무수한 기병들이 상대방이 들고 있던 창에 찔려 비명을 지르면서 말에서 떨어졌다.

“크어억!”

그 후 살아남은 양군의 기병들이 부러진 창을 버리고 검을 뽑아 들고 한데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로마 기병은 마상 전투 기술이 뛰어난 카르타고군 기병의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의 기병대는 전장까지 전속력으로 달려오느라 말이 지쳐 버린 탓에 본래의 실력을 전부 발휘할 수 없었기에 기병끼리의 전투도 난전이 되어 버렸다.

한니발은 직접 외날검을 휘두르며 적 기병을 처치하다 주변에 적이 잠시 사라진 틈을 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소모전을 계속하면 결국 더 손해를 보는 건 우리다. 어떻게든 이 전투를 빨리 끝내야 하는데!”

바로 그때 그의 눈에 말 위에서 자신의 키보다 훨씬 긴 창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카르타고군 기병을 물리치는 마르켈루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니발은 그런 적장을 보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가까이서 보니 더 굉장하군. 어렸을 때 곰같이 덩치 큰 켈트족 전사와 결투하시던 아버지의 심정이 이제야 이해가 되네.”

그는 애마 부케팔로스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단신으로 마르켈루스에게 달려들었다.

“이랴!”

집정관을 호위하던 말을 탄 릭토르 세 명이 무기를 들고 한니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다 할 저항도 해 보지 못하고 한니발이 번개처럼 휘두른 검에 순식간에 팔과 어깨를 베인 후 말 등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끄아아악!”

마르켈루스는 호위병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돌아보며 기합을 넣으며 한니발의 얼굴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하압!”

한니발은 몸을 뒤틀어 창을 피한 뒤 비어 있던 왼손으로 창대를 잡은 후 자신의 몸쪽으로 잡아당겨 적장을 낙마시키려 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는 적장에게 끌려가기 전에 창을 놓아 버리고 잽싸게 허리춤에서 로마의 기병검 스파타를 뽑아 들고 한니발에게 덤벼들었다.

카르타고의 명장과 로마의 맹장은 곧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마주친 바바리 사자와 카스피 호랑이처럼 치열한 격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마르켈루스가 직검인 스파타로 한니발의 목을 찌르고 들어오자 한니발은 외날검 팔카타를 옆으로 휘둘러 적장의 검을 옆으로 쳐 냈다.

한니발은 적장의 검을 쳐 내느라 공중으로 들어 올려진 팔카타를 그대로 사선으로 내리치며 마르켈루스의 왼쪽 어깨를 베어 내려갔다.

그러자 마르켈루스는 곡예를 부리듯 허리를 뒤로 젖히며 아슬아슬하게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한니발의 검을 피했다.

처음에는 아군의 장군을 도우려고 달려가던 양군의 기병들은 검무를 추는 듯한 두 사람의 몸놀림에 감탄하며 명예로운 결투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주변으로 물러섰다.

한니발과 마르켈루스는 그렇게 80합이 넘도록 검을 주고받아도 승부를 보지 못하고 결투를 이어 나갔다.

바로 그때 카르타고군과 로마군의 배후에서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우우.

두 장군은 적장과의 결투로 시간을 끄는 사이 지원군이 전장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양군의 규모가 비슷한 지원군이 거의 동시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검을 멈추고 상대방에게 떨어졌다.

마르켈루스는 허탈한 눈빛으로 구름같이 몰려오는 카르타고군의 중장보병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맥빠지는군. 이 나이에 무리해 가며 저 괴물 같은 놈을 붙잡아 뒀더니 서로의 등 뒤에 숨겨 놓은 비수도 비슷한 물건이었군.”

“그건 내가 할 말이다.”

한니발이 자신의 혼잣말에 대답하자 마르켈루스는 놀란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라틴어를 할 줄 아나?”

“동생에게 배웠지.”

“정말 무서운 형제들이군. 오늘은 이만하지 않겠나? 서로 끝을 예측할 수 없는 도박판에 발을 들이는 걸 즐기는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쯧!”

한니발은 그의 말을 듣고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마르켈루스는 그가 14년간 전장을 누비면서 만난 적 중 가장 까다로운 적장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가능하면 이 자리에서 그를 처치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자신도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로마는 마르켈루스가 없어도 전쟁을 계속할 수 있지만, 한니발이 없는 카르타고가 로마를 정복하기는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한니발은 마르켈루스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전투가 끝난 후 한니발은 카푸아로 철군한 후 즉시 연락선을 띄워 본국에 서신을 보냈다.

이번 전투의 결과를 알리면서 하스드루발이 이탈리아로 조속히 복귀하기를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스드루발은 형이 보낸 서신을 읽고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군 사상자 천오백 명에 로마군 사상자 이천 명이라······.”

사상자 수치만 놓고 보면 한니발이 마르켈루스에게 승리를 거둔 듯했지만, 그는 실상은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로마는 아직 병력을 충원할 여력이 충분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가 없으니······.”

얼마 전 보밀카르가 지휘하는 함대가 몰타섬을 탈환하면서 로마의 전함 70척을 침몰시키고 20척 이상을 나포했지만, 로마는 여전히 300척 이상의 전함으로 이탈리아 시칠리아 서부와 이탈리아반도 남부의 해안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게다가 보급망을 완성하더라도 한니발과 함께 알프스를 넘은 바르카 가문의 정예병은 한번 잃으면 다시 비슷한 수준의 병사를 충원하기 어려웠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이 보낸 서신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루라도 빨리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려면 어서 이집트부터 정리해야겠다. 등 뒤의 적을 두고 바다 건너의 적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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