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 [156화] 하스드루발 라이징 (2)
“함대가 출항한다! 수문을 열어라!”
군항을 지키는 카르타고 해군의 당직 장교의 명령에 건장한 리비아 출신 노예 수십 명이 수문을 막은 굵은 쇠사슬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호리병 모양의 항구 코톤의 수문이 완전히 열리자 하스드루발과 이집트 원정군 1만 5천 명을 태운 함대가 수면에 잔물결을 일으키며 몰려나왔다.
수송선에 탄 바알 함몬 신전의 신성대원들은 선실에 자신의 짐을 놓은 후 모두 갑판 위로 올라와 잔물결 하나 없는 잔잔한 지중해를 바라보며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와! 바다에 나온 게 대체 얼마 만이냐!”
“맨날 낚시한 물고기를 채 가던 갈매기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신성대원들은 바알 함몬 신전에 반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후 늘 신전과 훈련장만 오가며 지내 왔지만, 오랜 육지 생활도 그들의 혈관 속에 흐르는 바다의 민족의 피를 묽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모든 승객이 드넓은 지중해를 보고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우웨에에에엑!”
마실리족의 왕자 마시니사는 그가 탄 함대의 기함이 출발한 후 10분도 지나지 않아 갑판 가장자리를 따라 늘어서 있는 난간을 붙잡고 바다 쪽으로 몸을 내밀며 뱃멀미를 했다.
반유목민 부족인 그는 스물세 살인 지금까지 한 번도 배를 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괴로운 나머지 눈가에 눈물이 맺힌 누미디아의 왕자 곁으로 다가가 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마시니사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아··· 하스드루발 장군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요. 갑판에 오르기 전에 선원들이 멀미를 할 수도 있다고 얘기해 주긴 했지만, 이 정도로 힘들 줄은 몰랐습니다.”
“바다의 신의 혈통이 아니고서야 누구나 처음 배를 타고 바다에 나오면 멀미 때문에 고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처음 배를 탄 날에는 물고기 밥을 참 많이 줬지요. 이걸 한쪽 귀에 끼시면 좀 나을 겁니다.”
하스드루발은 여전히 배의 난간을 붙잡고 있는 마시니사 왕자에게 부드러운 나무를 깎아서 만든 귀마개를 건넸다.
한쪽 귀를 막으면 청각 균형중추 신경이 둔해지기 때문에 멀미 완화에 도움이 된다.
고대인인 카르타고의 선원들에게 그런 의학 지식이 있지는 않았지만, 경험으로 귀마개가 뱃멀미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시니사 왕자는 하스드루발이 건넨 귀마개를 받아 한쪽 귀에 꽂고 잠시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난간에서 손을 떼고 바른 자세로 섰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습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따듯한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감사는 제가 드려야지요! 왕자님께서 지휘하는 마실리족의 용사들과 함께 전장에 서게 되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마시니사 왕자는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애쓰는 카르타고의 장군을 보며 힘없이 미소지었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젊은 왕자의 모습을 보고 내심 기뻐했다.
‘마시니사가 나를 상대할 때 약간 어려워하는 것 같았는데, 앞으로는 좀 나아지겠지? 라피아에 도착할 때까지 형 동생 사이가 되도록 해야겠다.’
마시니사는 아직까지는 장수로서 자신의 재능을 드러낼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원 역사에서 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일 당시에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병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원 역사의 마시니사는 본래 카르타고의 충실한 동맹으로서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군이 로마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하지만 마실리족이 곤경에 처했을 때 아직 국내파가 남아 있었던 카르타고 백인회가 자신을 배신하자 그는 스키피오에게 회유당해 로마 편에 붙고 만다.
하스드루발은 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탐낸 인재인 마시니사를 이번 이집트 원정 도중에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마시니사는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 형이 스키피오에게 질 때 로마군 쪽에서 맹활약했었다지. 하지만 지금의 마시니사는 로마의 성벽이 무너질 때까지 내 옆에서 말을 달리게 될 거다!’
* * *
기원전 215년 7월 중순.
하스드루발의 수송선단은 순풍을 등에 업고 약 20일간 항해하여 마침내 현대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에 해당하는 라피아 북서부지역의 한 작은 항구도시 근처에 도착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이집트의 영토였을 그곳은 거침없이 남진한 셀레우코스 제국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항구를 지키던 셀레우코스 제국 병사들은 낯선 함대가 다가오자 기겁하며 소리쳤다.
“동남쪽 약 십오 스타디온(약 2.7 km) 방면! 정체불명의 대함대 접근 중!”
병사들의 보고를 들은 도시의 수비대장은 급히 항구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적습이다! 전군 경계 태세를 갖춰라!”
그는 근처에 있는 망루에 올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함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얼굴에 곧 환한 미소가 번졌다.
항구로 다가오는 전함과 수송선 수십 척의 선미에 하나같이 카르타고의 상징인 바알 함몬의 손바닥 모양 선수상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수비대장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모든 올림포스의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카르타고에서 지원군이 왔다! 경계태세를 해제하고 수문을 열어라!”
하스드루발의 수송선단은 수문이 열리자 질서정연하게 항구로 들어섰다.
카르타고의 코톤과는 달리 민항과 군항의 구분이 없는 작은 항구는 큰 배 백 척이 들어오자 빈틈없이 가득 찼다.
도시의 수비대장은 도시의 모든 장교들을 항구에 집합시킨 후 기함에서 내리는 하스드루발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진실한 친구 카르타고에서 오신 귀한 손님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이 도시의 수비대장 폴리크라테스라고 합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총독이신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 하스드루발이라고 합니다. 간악한 이집트를 벌하시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신 안티오코스 폐하를 돕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아! 혹시 하룻밤 만에 마사에실리족의 반란군 육만 명을 진압하신 그 하스드루발 장군님이십니까?”
“하하··· 지중해 동쪽 끝까지 제 이름이 알려져 있다니 놀랍군요. 제가 말씀하신 그 사람이 맞습니다.”
“카르타고를 대표하는 지략가께서 제국을 돕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와 주시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도시에서 가장 좋은 저택을 비워 두겠습니다. 거기서 여독을 푸신 후 전장에 계신 안티오코스 폐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하스드루발은 수비대장이 내준 그리스식 저택에서 하룻밤 묵은 후 이집트 원정군 전원을 이끌고 안티오코스 왕이 머무르고 있는 라피아 내륙 지역의 셀레우코스 제국군 군영을 항해 행군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젊은 왕은 자신의 막사 안에서 수비대장 폴리크라테스가 전령을 통해 보낸 서신을 읽은 후 뛸 듯이 기뻐했다.
“적이 너무 많아 더 전진하지 못해 답답하던 차에 마침 카르타고의 지원군이 도착하다니! 모든 신 중에서 가장 위대하신 제우스시여! 감사합니다! 뭣들 하느냐! 당장 카르타고의 장군을 맞을 준비를 시작해라!”
젊은 왕의 어명이 떨어지자 셀레우코스 제국의 병사들은 급히 왕의 막사 안을 제국에서 가져온 사치품과 이집트의 여러 도시를 약탈해 얻은 전리품으로 치장하기 시작했다.
안티오코스 왕은 한니발이 제국 내의 반란 진압을 도와준 데에 이어 또 카르타고의 도움을 받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그로서는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동방의 제왕으로서의 위신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셀레우코스 제국군의 군영에 도착한 하스드루발은 안티오코스 왕을 알현하기 위해 지휘관 막사에 발을 들이자마자 내심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여기 지휘관 막사 맞아? 내부만 보면 왕궁 알현실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그가 티 나지 않게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둘러보자 막사의 벽에는 값비싼 자주색 천이 걸려 있었고 곳곳에 화려한 대리석 조각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또 그의 발밑에는 언뜻 봐도 고급품인 융단이 길게 깔려 있었는데, 그 양옆에는 왕의 신하들이 나란히 도열해 있었다.
그 융단이 끝나는 지점에는 왕좌에 앉아 있는 안티오코스 왕의 모습이 보였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젊은 왕의 모습을 보고 그의 속내를 알아챘다.
‘카르타고의 도움이 절실했을 텐데, 신하들 앞이라 그런 티를 내긴 싫었나 보군.’
그는 몇 년 전 한니발이 셀레우코스 제국과 협상하기 위해 안티오코스 왕을 알현할 때 그가 형을 시험하기 위해 한 짓을 잊지 않고 있었다.
‘치사량은 아니라곤 해도 감히 한니발 형에게 독을 먹여? 전쟁에서 로마에게 이기려면 어쩔 수 없다지만 이놈을 돕는 게 영 내키지 않네. 그 대신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어 가야지.’
하스드루발은 왕좌의 앞으로 걸어가 근엄한 자세로 앉아 있는 안티오코스 왕에게 애써 웃어 보이며 그리스어로 인사했다.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의 적법한 통치자이시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일한 후계자이신 안티오코스 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 하스드루발이라고 합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네. 그대의 형 한니발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그대의 얘기를 자주 들었네. 자네도 형 못지않게 뛰어난 장군이라지?”
하스드루발은 안티오코스 왕의 말을 듣자 가슴속에서 불쾌감이 끓어올랐다.
‘저게 미쳤나··· 초면에 외국 사절에게 말을 놔? 지가 내 형하고 친하지 나하고 친해?’
그는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막사 밖으로 나와 버리고 싶었지만, 간신히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눌렀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이 한창인 이때 한순간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인구 1천만의 대제국을 적으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스드루발은 왕의 칭찬을 받아 기쁜 척을 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저희 형제를 높게 평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폐하를 도와 지중해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이집트와 로마를 물리치고 카르타고와 셀레우코스 제국이 함께 번영해 나갈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참으로 기특한 말이군!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고 감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를 참칭하는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을 멸하고 나면 자네에게 큰 상을 내리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안티오코스 폐하. 그리고 외람된 말씀이지만, 허락하신다면 이집트와 로마의 연합군과 전투를 벌이기 전에 페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점이 세 가지 있습니다.”
“말해 보게.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면 기꺼이 들어주겠네.”
“첫째로 이번 전투에서 잡을 포로 중 육 분의 일을 저에게 넘겨주셨으면 합니다.”
“자네가 데려온 병사가 딱 우리 제국군의 육 분의 일 정도 되는 것 같더군. 정당한 요구이니 들어주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전투가 끝나고 제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직 셀레우코스 제국군이 점령하지 않은 이집트의 항구도시를 점령할 경우 그 도시가 카르타고의 영토임을 인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고자 하는 이유가 뭔가?”
“아시다시피 저희 카르타고인은 무역을 생업으로 삼는 민족입니다. 카르타고가 동지중해에 무역거점을 한 곳 마련한다면 양국 간의 교역도 더 원활해질 겁니다.”
“음··· 좋네. 대신 카르타고가 차지할 항구도시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곳으로 한정하겠네. 그럼 마지막 부탁은 뭔가?”
“제가 총사령관으로서 다음 전투를 지휘할 수 있도록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안티오코스 왕의 눈썹이 폭풍우가 치는 지중해의 파도처럼 거칠게 꿈틀거렸다.
왕은 조금 전과는 다른 냉랭한 목소리로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상당히 모욕적으로 들리는 말이군. 짐의 군사적 재능이 부족해 보인단 말인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설명해 봐라. 짐을 설득하지 못하면 양국 간의 관계는 이걸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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