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 [157화] 하스드루발 라이징 (3)
안티오코스 왕이 하스드루발에게 날 선 말을 내뱉자 막사 안의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러자 융단 양옆에 늘어서 있던 셀레우코스 제국의 장수들이 굳게 입을 다물고 하스드루발을 은근히 노려보기 시작했다.
디아도코이 왕국의 지배계층인 그리스인들은 다른 민족을 모두 싸잡아 바르바로이(야만인)라 부르며 업신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 그들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페니키아인이 7만 명에 가까운 셀레우코스 제국군의 지휘권을 넘겨달라고 하니 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결코 카르타고와 셀레우코스 제국 연합군의 군권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저 인간한테 군권을 맡기느니 그냥 다시 카르타고로 돌아가 버리는 게 낫지. 백 프로 질 게 뻔한데 어떻게 내 병사들을 맡기겠어.’
원 역사의 안티오코스 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방의 영토를 정복해 셀레우코스 제국 최대 판도를 이루고 자칭타칭 ‘대왕’이라는 칭호로 불린다.
그런 그가 지휘관으로서 아주 형편없는 인물이라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원 역사의 안티오코스 왕은 강력한 적국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대규모 회전을 벌일 때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언제나 형편없이 패배하며 한계를 드러낸다.
특히 기원전 190년에는 국내파의 음해로 카르타고에서 쫓겨나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망명한 한니발에게 해군을 맡기고 자신은 육군을 이끌고 현대의 터키 서부지역에서 로마군과 싸워 대패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만다.
당시 안티오코스 왕이 이끄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병력은 7만 명이 조금 넘었지만, 로마군의 숫자는 고작 3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
50대 후반의 나이에도 복수를 꿈꾸며 타지를 떠돌던 노장 한니발로서는 지기 어려운 싸움에서 대패한 고용주를 보며 복장이 터졌을 게 분명했다.
‘안티오코스 왕은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지휘관이다. 여기서는 어떻게든 잘 구슬려서 내가 지휘권을 잡아야 해.’
하스드루발은 만면에 진상 고객을 상대하는 상인의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안티오코스 폐하. 제가 감히 폐하께 군권을 맡겨 주십사 부탁드린 건 폐하께서 진정하고 유일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저는 이번 전투에서 아군이 압승을 거두려면 아군의 장수 중 누군가가 이소스와 가우가멜라에서 페르시아의 십만 대군을 물리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용맹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 역할을 폐하보다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전 지중해를 뒤져도 찾을 수 없을 테지요.”
그 말을 듣자 안티오코스 왕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기원전 4세기 중후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를 평정한 후 동방으로 원정을 떠나면서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가 이끄는 십만 대군과 두 번 큰 회전을 벌인다.
그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직접 마케도니아의 정예 기병대 헤타이로이를 이끌고 대열의 후방에 있는 다리우스 왕을 직접 공격해 도망치게 하는 전술로 두 번 다 대승을 거둔다.
하스드루발은 은근히 젊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에게 존경하는 대왕처럼 직접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이집트의 파라오를 향해 돌격하라고 부추긴 것이다.
안티오코스 왕은 영민한 인물이지만, 늘 제2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되고 싶어 했기에 그의 말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젊은 왕은 조금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하스드루발에게 대답했다.
“자네의 말에 일리가 있군. 하지만 짐이 가증스러운 프톨레마이오스를 처단하면 어차피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나지 않겠나? 그럼 자네가 굳이 지휘권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이 나약한 페르시아인이라면 전하의 말씀이 맞을 겁니다. 하지만 적군 중에는 용맹한 스파르타인이나 집요한 로마인도 있습니다. 그자들은 겁많은 파라오가 도망쳐도 끝까지 전장에 남아 아군 병사를 한 명이라도 더 죽이려 들 겁니다.”
“한마디로 내가 프톨레마이오스를 쫓을 때 제대로 뒷정리를 할 지휘관이 있어야 피로스의 승리를 거두지 않을 거란 말이군?”
“맞습니다. 제게 그 임무를 맡겨 주신다면 칸나이에서처럼 사령관을 잃은 적군을 포위해 섬멸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안티오코스 왕은 고민에 빠졌다.
그의 생각에도 하스드루발을 제외한 다른 장군에게 8만 명이 넘는 대군의 지휘를 맡기는 것은 영 불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바르바로이인 페니키아인에게 지휘권을 맡기는 것이 영 못마땅했던 것이다.
안티오코스 왕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만 빠져 있자 하스드루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나마 제게 군권을 맡기시는 것이 영 내키지 않으신다면, 대신 제가 파라오를 추격하는 임무를 맡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반드시 파라오를 붙잡아 폐하께 데려오겠습니다.”
“음··· 아닐세! 프톨레마이오스를 쫓는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네! 자네가 이번 전투의 총사령관직을 맡도록 하게. 한니발이 칸나이에서 보여 준 능력을 자네도 보여 주길 바라네.”
드디어 원하는 바를 이루자 하스드루발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폐하의 기대에 결과로 보답하겠습니다.”
* * *
간신히 8만 5천 대군의 지휘권을 손에 넣은 하스드루발은 가장 먼저 군영을 시찰하고 산더미 같은 파피루스 더미를 읽어 셀레우코스 제국군의 현황을 파악했다.
그다음 순서는 적군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군의 경보병대와 기병대를 내보내 전장의 지형과 적진을 정찰하고 이집트―로마 연합군의 정찰대와 탐색전을 벌이게 했다.
하스드루발은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얻은 후 양군의 전력을 분석한 뒤 안티오코스 왕의 막사에서 단둘이 회의하며 작전을 수립했다.
하스드루발이 먼저 젊은 왕에게 말했다.
“폐하. 지난 며칠간 적진을 살핀 결과 예상대로 보병은 적이 이만 명 가까이 더 많지만, 기병 전력은 우리가 앞섭니다.”
“역시 그렇군. 자네가 기병을 많이 데려온 덕이 크네. 그건 그렇고 적진에도 전투 코끼리가 있던가?”
“정찰병이 이집트군의 마구간에 북아프리카산 코끼리가 일흔 마리 정도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코끼리도 우리가 삼십 마리쯤 많군. 이러면 우리 군 양익의 기병과 코끼리가 눈앞의 적을 먼저 물리치는지, 아니면 적 보병대가 우리 군의 본대를 먼저 뚫어 내는지가 전투의 승패를 가리게 될 것 같은데.”
“정확히 보셨습니다.”
“그럼 적의 코끼리부대에 우리 군의 전투 코끼리를 전부 붙여 버리면 되겠군. 짐이 데리고 온 인도코끼리는 북아프리카의 코끼리보다 덩치가 훨씬 크지. 프톨레마이오스의 코끼리들은 힘도 써 보지 못하고 도망쳐 버릴 걸세.”
하스드루발은 안티오코스 왕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원 역사를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웬만하면 셀레우코스 제국의 전투 코끼리 부대는 적 보병 방진에 돌격시키고 싶은데 말이지.’
원 역사의 기원전 217년.
현재와는 달리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지 않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왕은 약 7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해 마찬가지로 아직 로마와 동맹을 맺지 않은 비슷한 규모의 이집트군과 라피아에서 대규모 회전을 벌인다.
그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왕은 이집트군 좌익의 북아프리카 숲코끼리 부대를 제국의 인도코끼리 부대가 상대하게 하여 큰 성과를 거둔다.
이집트군 우익의 기병대도 안티오코스 왕이 직접 지휘하는 기병대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패주하며 전투는 그대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압승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전장 한복판에서 벌어진 보병 간의 전투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이집트군이 셀레우코스 제국의 보병대를 압도하며 최종적으로 전투에서 승리한다.
당시 지중해 세계의 전략가 대부분이 최약체 보병이라고 평가했던 이집트 원주민 장창병 부대가 전투에서 승리하면 참정권을 주겠다는 파라오의 약속을 믿고 사력을 다해 셀레우코스 제국의 정예보병대를 압도하며 전황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이번 전투에서도 이집트 원주민 장창병 부대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원 역사의 라피아 전투 때보다도 수적으로 열세인 카르타고―셀레우코스 제국 연합군 본대가 한 번에 밀려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뭔가 떠오른 듯 안티오코스 왕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폐하. 혹시 팔팔한 돼지를 천 마리 정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돼지? 뜬금없이 왜 돼지를 찾나? 이집트의 도시와 마을에서 전리품으로 얻은 돼지가 꽤 있기는 할 걸세.”
“제가 그 돼지로 이집트의 전투 코끼리를 무력화시키겠습니다. 그럼 아군의 코끼리부대로 적 본대를 공격할 여유가 생기겠지요.”
* * *
기원전 215년 8월 초.
하스드루발은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카르타고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연합군 8만 5천 명을 이끌고 적의 군영 근처의 평원으로 몰려나왔다.
그러자 프톨레마이오스 왕도 그의 도전을 받아들여 9만 대군과 함께 적진에서 1km쯤 떨어진 곳에 진형을 짰다.
하스드루발은 아군 진영과 적 진영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야··· 인종의 용광로가 따로 없구나. 양쪽 다 카르타고군 못지않게 다국적군이야.”
카르타고―셀레우코스 제국 연합군 진영의 정중앙 본대에는 전원 그리스인으로 구성된 마케도니아식 장창병인 팔랑기타이 부대 3만 4천 명이 배치되었다.
그 앞에는 중갑을 두른 인도코끼리 102마리가 나란히 배치되어 적을 향해 돌진할 준비를 마쳤다.
본대의 왼편에는 차례로 가벼운 무장을 갖춘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경보병대와 아나톨리아 반도 출신의 리디아인 투창병을 각각 6천 명, 총 1만 8천 명이 본대의 왼쪽 측면을 지켰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경보병 1만 8천 명 앞에는 말 네 마리가 끌고 바퀴 축에 거대한 낫을 설치한 낫전차 50대가 배치되었다.
좌익의 끝에는 안티오코스 왕이 직접 지휘하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중기병 6천 기가 돌격 명령을 기다리며 적진을 노려보았다.
카르타고―셀레우코스 제국 연합군 본대 오른편에는 차례로 카르타고의 리비아 창병 9천 명, 검과 방패로 무장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은방패병단 5천 명, 그리고 바알 함몬 신전의 신성대 중장보병 3천 명이 배치되어 본대의 오른쪽 측면을 보호했다.
우익의 끝에는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신성대 중기병 1천 기와 마시니사 왕자가 지휘하는 마실리족 출신 누미디아 투창기병 4천 기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뚜껑이 덮여 있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는 말 두 마리가 끄는 커다란 마차 50대가 나란히 서서 정면에 있는 이집트의 전투 코끼리 73마리와 대치했다.
이집트―로마 연합군의 구성은 더욱 다채로워서 그리스인과 이집트 원주민으로 구성된 팔랑기타이와 로마인과 그리스인으로 구성된 중장보병이 본대를 구성했다.
그리고 본대의 좌측과 우측에는 리비아와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한 켈트족 갈라티아인, 그리고 트라키아인으로 구성된 경보병대와 파라오의 근위대가 배치되었다.
또한 이집트―로마 연합군의 좌익과 우익에는 각각 로마군 기병과 파라오가 직접 지휘하는 이집트 중기병대가 전투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군은 영역 다툼을 하는 두 마리의 수사자처럼 상대방을 노려보며 서서히 적진과의 거리를 좁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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