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 [160화] 최고의 전리품 (2)
하스드루발은 두 무리로 나눈 이집트 원주민 포로 집단에서 그리스어를 할 줄 아는 자 수십 명을 골라 냈다.
그런 다음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포로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어린 시절부터 가정교사에게 이집트의 고대 문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라 왔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아네테의 제우스 신전보다도 웅장하다지? 이 천년도 전에 그런 대단한 건축물을 짓다니! 내가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다면 지금쯤 기자에서 모래바람을 맞으며 피라미드를 보고 감탄하고 있을 거다.”
이집트인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가장 강한 민족 중 하나였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그리스인 지배 계층은 그런 이집트인을 문명화가 덜 된 야만인 피정복민과 똑같이 취급해 왔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본론을 꺼내기 전에 그들의 조상에 대한 자긍심을 자극하려 한 것이다.
‘조상이 기원전 26세기에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를 만들었는데 국뽕에 물들지 않을 리가 없지. 그 점을 잘 자극하면 분명 내 말에 귀 기울일 거야.’
그의 예상대로 그리스어를 아는 이집트인 포로들은 젊은 페니키아인 장군이 뜻밖에도 자기 조상의 업적을 칭찬하자 자기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하스드루발은 평소 기원전 3세기를 사는 지중해 세계의 사람들에게도 ‘고대 문명’이라고 불리는 이집트 문명에 관심과 지식이 많았다.
그렇기에 그는 포로들이 좋아할 만한 말을 장황하게 이어 나갈 수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포로들이 완전히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자, 대화의 화제를 자연스럽게 바꾸었다.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이집트인이 오랜 세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게 차별과 핍박을 당해 왔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자 그의 말을 듣고만 있던 포로들이 분한 표정을 지으며 하나둘 입을 열었다.
“파라오는 이번 전투에서 이기면 세율을 낮추고 우리 이집트인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제 다 끝난 얘기지만 말입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지금 악어의 눈물을 흘리시는 겁니까? 이제 저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기만을 멈추시고 저희를 노예 상인에게 넘기시지요.”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봐라. 내가 자네들에게 명예와 자유를 누리며 살 기회를 준다면 믿고 따라올 텐가?”
그의 말에 알렉산드리아 출신 포로 중에서 리더 격인 자바리가 대답했다.
“저희에게 자유를 주신다고요? 곧 이집트 전역에 셀레우코스 제국의 칠만 대군이 들이닥칠 텐데 그게 가능합니까?”
“자네 이름은 뭔가?”
“이집트인 팔랑기타이 부대의 중대장을 맡았던 자바리라고 합니다.”
“자바리. 난 올해 여름이 끝나기 전에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할 생각이다. 일이 내 생각대로 잘 풀린다면 알렉산드리아를 카르타고의 속주로 삼고 이집트인에게 자치권을 주겠다.”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신다고요? 하스드루발 장군님. 알렉산드리아는 노예나 외국인까지 합치면 인구가 백만 명이나 되는 대도시입니다. 게다가 성벽이 높고 튼튼해서 십만 대군이 몰려와도 도시를 점령하려면 몇 년은 걸릴 겁니다.”
“우직하게 공성전을 벌인다면 자네들 말대로 되겠지. 일단 내 얘기를 들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다.”
“알겠습니다.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하스드루발은 이집트인 포로들에게 작전을 설명하기에 앞서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시켜 미리 준비해 둔 은화를 가져오게 했다.
심부름을 하러 간 병사들이 은화가 가득 담긴 나무 상자 여러 개를 가져오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선 알렉산드리아 출신이 아닌 사람은 최대한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이웃을 데리고 알렉산드리아로 떠나라. 어차피 이집트의 다른 지역은 셀레우코스 제국군에게 약탈당할 테니 자네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편이 낫겠지.”
“네? 감사한 일이긴 합니다만, 그게 전부입니까?”
“그럴 리가. 이집트 각지에서 난민이 알렉산드리아로 몰려들면 알렉산드리아의 왕궁에 남아있는 간신배들은 분명 성문을 걸어 잠그고 성벽에 더 많은 병사를 배치할 거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성벽 쪽의 경계가 더 강해지면 카르타고군이 도시를 공격하기 더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발상을 조금만 바꾸면 꼭 그렇지만 않지. 말로 설명하면 너무 길어서 다음 내용은 문서로 작성해 왔는데 혹시 그리스 문자를 읽을 줄 아나?”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하스드루발은 품에서 작은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자바리에게 건네주었다.
눈가에 주름이 잡힌 중년 남자의 시선이 두루마리 위에 적혀있는 글씨를 더듬어 내려갈 때마다 희망을 잃어 탁해졌던 그의 눈동자에 점점 생기가 돌아왔다.
자바리는 손에 든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다 읽은 후 궁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동료들에게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께서 이집트인에게 자치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 자식과 손주들도 우치처럼 평생 오만한 이방인의 지배를 견디게 할 생각인가? 우리 손으로 그리스인의 지배를 끝내고 이집트인의 긍지와 권리를 되찾자!”
그의 결연한 외침에 1만 명의 이집트인이 우렁찬 함성을 질러 댔다.
* * *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어! 내가···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이 자리까지 오느라 늘 손에 피를 묻혀 왔건만!”
기원전 215년 8월 중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재상 소시비오스는 서재에서 라이파 전투에서 이집트와 로마의 연합군이 패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셀레우코스 제국군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간신 소시비오스.
이제 옆머리에 흰 머리털이 나기 시작한 그는 젊은 시절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최측근이 되어 이집트의 권력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고 파라오에게 아부해 왔다.
그 결과 소시비오스는 젊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그의 중상모략을 믿고 친어머니와 친동생까지 죽이게 할 정도로 파라오의 신뢰를 얻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왔다.
그런데 이제 파도처럼 밀려오는 셀레우코스 제국군이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땀과 타인의 피로 공들여 쌓아 온 권력의 탑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으니 그가 초조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때, 서재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더니 소시비오스의 시중을 드는 여자 노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상님. 아가토클레스 님께서 급히 주인님을 뵙고자 저택에 찾아오셨습니다.”
“아가토클레스 님께서 오셨다고? 어서 서재로 모셔와라! 서둘러!”
소시비오스의 노예는 주인의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듣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손님을 서재로 안내했다.
노예가 서재의 문을 열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건장한 청년이 안으로 들어왔다.
청년은 소시비오스의 집까지 달려오느라 턱까지 찬 숨을 고른 후 그에게 말했다.
“소시비오스 재상님! 큰일 났습니다! 우리 프톨레마이오스 폐하의 군대가 라피아 평원에서 셀레우코스 제국군에게 대패했습니다!”
“아가토클레스 님께서도 이미 비보를 들으셨군요. 전투에서 진 것도 큰일이지만, 프톨레마이오스 폐하께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포로가 되시다니···.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네? 그게 사실입니까? 정말로 폐하께서 안티오코스 왕에게 붙잡히셨다는 말씀입니까!?”
“그 소식은 듣지 못하셨었던 모양이군요. 제가 뭐하러 아가토클레스 님께 이런 쓸데없는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는 소시비오스의 말을 듣고 체통도 잊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소리쳤다.
“이럴 수는 없어! 여동생까지 팔아가며 권력을 손에 쥐었건만! 몇 년 권세를 누려 보지도 못하고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가토클레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미인인 친여동생 아카토클레아를 첩으로 삼게 하여 젊은 나이에도 소시비오스에 버금가는 권력을 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상대방을 경계해왔지만, 이내 서로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이득임을 깨닫고 지금껏 이집트의 권력을 잠식해 나가는데 손발을 맞춰 왔다.
소시비오스는 절망하는 아가토클레스를 바라보며 다시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아가토클레스 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절망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농부의 손에 붙잡힌 닭이 목을 비틀리듯 교만한 안티오코스 왕에게 목이 잘리고 말 겁니다!”
“그럼 어찌하면 좋다는 말입니까! 알렉산드리아의 수비병력은 고작 만 명입니다! 반면 적군은 팔만이 훨씬 넘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라피아 평야에서의 전투가 끝나고 카르타고군은 배를 타고 다시 로마군과 싸우기 위해 서지중해로 떠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알렉산드리아의 성벽은 높고 튼튼하지 않습니까? 아직 희망을 잃을 때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도시의 식량이 떨어지면 셀레우코스 제국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마 길어야 일 년 정도를 버티겠지요.”
“정신 차리십시오! 우리에게는 강력한 동맹국 로마가 있지 않습니까!”
“로마는 카르타고를 상대하기도 벅차다는데 우리를 도와줄 여유가 있을까요?”
“당장은 무리겠지만,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겁니다! 아무것도 안 해 보고 지금까지 우리가 이룩해 놓은 것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재상님의 혜안에 다시 한번 탄복하게 되는군요.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폐하께서 안 계신 지금 왕의 대리인은 그 고집스러운 왕비인데 과연 우리의 말을 들어줄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부딪쳐 봐야지요. 어서 왕궁으로 갑시다! 아르시노에 왕비도 알렉산드리아가 불바다가 되는 건 원치 않을 테니 이번만큼은 우리와 손을 잡을지도 모르지요!”
두 사람은 서둘러 소시비오스의 저택 밖으로 나와 왕궁을 향해 말을 달렸다.
소시비오스는 아가토클레스와 함께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마주친 내관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르시노에 왕비님께서는 어디 계신가! 지금 당장 왕비님을 알현해야겠다!”
“지금은 이미 밤이 늦었습니.! 소시비오스 재상님. 날이 밝으면 그때 다시 오시지요.”
“상황이 급하니 잔말 말고 왕비님께 우리를 안내하지 못할까!”
내관은 야심한 밤에 찾아온 두 권신의 강요에 못 이겨 왕비에게 그들의 뜻을 전했다.
아르시노에 왕비는 평소 두 간신을 혐오해 왔지만 어쩐 일인지 그들의 청을 받아들였다.
왕비는 예복을 입을 시간이 없었기에 평상복을 입고 알현실이 아닌 자신의 왕궁의 최상층에 있는 연회장으로 두 사람을 불렀다.
소시비오스와 아가토클레스가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의 눈에 널찍한 테라스의 난간에 서서 알렉산드리아 시내를 바라보고 있는 왕비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안내해온 내관은 낭랑한 목소리로 왕비에게 두 사람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아르시노에 왕비 전하. 재상 소시비오스와 장군 아가토클레스가 왕비님을 알현하고자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왕비가 고개를 돌려 두 간신을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가 본후를 먼저 만나자고 할 날이 올 날이 올 줄은 몰랐구나.”
두 사람은 왕비의 비아냥을 듣고 배알이 뒤틀렸지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예를 표했다.
“재상 소시비오스. 아르시노에 왕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장군 아가토클레스. 아르시노에 왕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나를 찾아왔다는 건 너희들의 귀에도 우리 이집트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이 들어간 거겠지.”
그 말을 듣고 소시비오스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왕비 전하! 폐하께서 포로가 되셨다는 소식에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하지만 먼저 몰려오는 적군을 막을 대책부터 세워야 합니다! 전쟁물자를 비축하고 성문을 굳게 걸어 잠가 로마의 지원군이 지중해를 건너올 때까지 우리를 도우러 올 때까지 버텨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대체 얼마나 많은 백성이 죽게 될까?”
“그게 무슨···?”
“전세는 이미 기울었다. 내일 해가 뜨자마자 안티오코스 왕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할 것이다. 그럼 백성들이 쓸데없이 피를 흘릴 필요가 없겠지.”
왕비의 담담한 말을 듣고 아가토클레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웃기지 마라! 그깟 천민들 목숨 살리자고 알렉산드리아를 포기할 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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