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62화 (162/201)

[ 162 ] [161화] 최고의 전리품 (3)

“웃기지 마라! 그깟 천민들 목숨 살리자고 알렉산드리아를 포기할 순 없어!”

질그릇이 깨지는 듯한 아가토클레스의 목소리가 창문이 닫혀 있는 연회장 안에서 메아리쳤다.

그러나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아르시노에 왕비는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치켜든 채로 무례를 범한 아가토클레스를 날카롭게 쏘아 보았다.

원 역사의 그녀는 기원전 217년 라피아에서 벌어진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안티오코스 왕의 기병대에게 쫓겨 다니는 동안 직접 보병과 기병 일부를 지휘해 이집트군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공을 세운 여장부였다.

현재의 아르시노에 왕비도 원 역사와 성향이 다르지 않아 이집트의 전통에 따라 친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왕과 결혼한 후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부정부패가 만연한 궁정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런 그녀가 여동생을 왕의 첩으로 만들어 권력을 잡은 졸렬한 간신의 고함에 겁먹을 리 없었다.

왕비가 아가토클레스의 무례를 꾸짖으려는 찰나, 소시비오스가 먼저 그에게 큰 소리로 호통쳤다.

“닥치시오! 아가토클레스 장군!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따위 망언을 해 대는 겁니까! 당장 왕비 전하께 사죄하시오!”

아가토클레스는 한배를 탄 소시비오스의 호통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흥분한 나머지 큰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셀레우코스 제국의 포로가 되고 파라오와 왕비 사이에 아직 아들이 없는 지금, 아르시노에 왕비는 이집트의 제1위 왕위 계승권자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언제 처형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신하가 그녀를 모욕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자신들의 뜻대로 로마의 도움으로 셀레우코스 제국군을 몰아내더라도 여왕이 된 왕비에게 처형당하게 될 수도 있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아가토클레스는 바로 꼬리를 내리고 왕비에게 사과했다.

“여왕 전하. 제가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상심한 나머지 그만 전하께 큰 무례를 범했습니다.”

“이번만은 특별히 용서하겠다. 지금은 안티오코스 왕을 달랠 궁리를 하는 게 우선이니 말이다.”

그때 소시비오스가 왕비에게 물었다.

“여왕 전하. 안티오코스 왕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 자입니다. 알렉산드리아 성문에 올리브나무 가지를 걸고 항복하신다고 해도 프톨레마이오스 폐하와 왕비 전하를 해칠까 두렵습니다.”

“바로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셀레우코스 제국과 협상을 하려는 것 아니겠나? 성문에 올리브나무 가지를 걸고 가증스러운 적 앞에서 무릎 꿇는 한이 있더라도 알렉산드리아와 프톨레마이오스 폐하는 지켜 내야지. 가능하면 자네가 안티오코스 왕을 설득해 줬으면 한다.”

그 말을 듣고 소시비오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그동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왕릉을 관리하는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대왕의 후계자라고 주장해 왔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안티오코스 왕이 대왕의 왕릉이 있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지 않은 채로 대왕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을 풀어 주지 않으리라는 건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소 왕비가 백성을 아끼는 편이긴 하지만, 결코 적과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할 리 없다는 건 그녀와 몇 년째 궁중에서 암투를 벌여 온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소시비오스는 바로 왕비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하다 마침내 그녀의 의도를 짐작해 냈다.

“아르시노에 왕비 전하. 설마 안티오코스 왕에게 항복하는 척 시간을 끌면서 남은 병력을 끌어모아 셀레우코스 제국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일 생각이십니까?”

그의 말을 듣고 아르시노에 왕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역시 소시비오스 재상의 눈은 속이지 못했나. 어떤가? 내 제안은 아직 유효하다. 내 말대로 안티오코스 왕에게 가서 평화 협상을 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어 줄 텐가?”

“안티오코스 왕은 나이는 어리지만 영민한 자입니다. 왕비님 말씀대로 하더라도 괜히 그의 분노를 사 제 목만 날아가게 되겠지요. 아마 왕비님께서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계실 것 같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가. 아마 네가 그렇게 대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대화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그녀는 말을 마친 후 두 손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린 후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 있던 커튼 뒤에서 리넨 천 갑옷을 입고 손에 날카로운 검을 든 왕실 근위병 네 명이 소시비오스와 아가토클레스를 노려보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은 건장한 근위병에 손에 들린 서슬 퍼런 칼날을 보고 안색이 하얘졌다.

아가토클레스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짧은 새에 자객을 숨기다니··· 안 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그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전력을 다해 연회장의 출구로 달려가 미친 듯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덜컹! 덜컹! 덜컹!

문고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뒤로 들썩였지만, 이미 두 사람을 안내해 온 내관이 밖에서 문을 걸어 잠가 두었기 때문에 끝내 열리지 않았다.

아가토클레스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사이 근위병 두 명이 바람같이 다가가 그의 등 뒤에 검을 꽂아 넣었다.

“히이이이······.”

간신 아가토클레스는 등에 찔린 칼날 두 개가 폐와 가슴을 뚫고 앞으로 튀어나오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희미한 신음만을 내뱉으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다음 왕실 근위병들은 사냥감을 몰아가는 늑대 무리처럼 소시비오스의 주변을 둘러싸 포위했다.

그러자 아르시노에 왕비는 간신배의 우두머리에게 차가운 미소를 보이며 조롱하듯 말했다.

“네가 프톨레마이오스 폐하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내가 널 살려 둘 이유가 없지 않나? 내 남편이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폐하를 속여 어머니와 친동생을 죽이게 한 너를 말이야. 천하의 소시비오스 재상이 이 정도도 예상 못 했나?”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완전히 한 방 먹었군요.”

“이제 곧 스틱스강을 건너게 될 텐데 조금도 겁먹지 않는군. 역시 음탕한 여동생을 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아가토클레스 따위와는 그릇이 다르다 이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 이집트를 통틀어 저보다 겁많은 자는 없을 겁니다.”

“그런 것 치고는 조금도 떨지 않는데?”

“그야 아직 행운의 여신께서 제게 미소짓고 계시니 여유로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의 대답을 듣고 왕비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소시비오스는 그런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쳐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왕비의 등 뒤에 서 있던 근위병 두 명이 아가토클레스를 죽인 근위병 두 명에게 번개같이 검을 내질렀다.

“크헉!”

“으아악!”

갑작스럽게 동료에게 배신당한 근위병들은 각각 목과 배를 질려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아르시노에 왕비는 벽에 걸려 있던 은촛대를 떼어 내서 휘두르며 반역자들에게 저항했지만, 완전무장한 이집트군 최정예병 두 명을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물리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배신한 두 근위병에게 양팔을 붙잡혀 소시비오스 앞에 무릎 꿇려졌다.

아르시노에 왕비는 반역자들에게 제압당한 후에도 겁먹지 않고 소시비오스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거 놔라! 더러운 반역자 놈들! 소시비오스 이 교활한 놈! 어떻게 내가 자객을 숨겨 둘 줄 미리 알았지?”

“몰랐습니다.”

“뭐?! 그럼 어떻게 근위병 중에 네 부하를 숨겨 뒀단 말이냐!”

“이미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전 이집트에서 가장 겁이 많은 자라고 말입니다. 평소에 만에 하나 이런 일이 생길까 봐 왕실 근위병들을 꼬드기느라 시간과 돈을 꽤 많이 써 왔지요. 아직 삼 분의 일 정도만 포섭했는데 운 좋게도 자객 네 명 중 두 명이 제 부하였군요.”

“헛소리! 그럼 내가 이런 일을 벌일 수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예측했다는 소리 아니냐! 그런데도 겨우 근위병 중 삼 분의 일만 포섭한 상태에서 너를 밀실로 부른 내 지시를 따랐다고?”

“그야 권력을 잡으신 왕비 전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 수가 없어 두려웠으니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것이지요. 제국과 전쟁을 벌이실지, 덜떨어진 남편을 구하려고 나라를 통째로 바치실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재산을 가지고 국외로 도망갈 수도 있었을 텐데, 겨우 그딴 이유로 위험을 무릅쓰고 날 찾아왔다고?”

“아르시노에 왕비 전하. 한번 권력에 중독된 자는 목숨을 잃는 것보다 권력을 잃는 게 더 두려워지는 법입니다.”

“그게 무슨··· 이런 더러운 자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생겼으니 통탄할 일이구나! 나를 더 욕보이지 말고 어서 죽여라!”

“그럴 수는 없지요. 프톨레마이오스 왕가가 사라지면 제 권력의 기반도 사라집니다. 안티오코스 왕이 프톨레마이오스 폐하를 죽이면 왕비 전하는 저와 결혼하시게 될 겁니다. 그럼 저는 왕실의 데릴사위로서 왕좌에 앉게 되겠지요.”

“미친 소리! 누가 너 따위와!”

간신배의 말을 듣고 아르시노에 왕비는 양팔이 붙잡힌 채로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그러자 소시비오스는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나무로 만든 작은 병을 품에서 꺼내 오른손에 들더니 왼손으로 왕비의 머리채를 붙잡아 그녀의 고개를 뒤로 젖힌 후 말했다.

“왕비 전하. 지금은 이거라도 드시고 진정하시지요.”

그는 그 말을 하면서 병 안에 든 진한 양귀비즙을 왕비의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자 극렬하게 저항하던 아르시노에 왕비의 움직임이 점점 둔해지더니 마침내 의식을 잃고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소시비오스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근위병들에게 말했다.

“후우··· 정말 성난 암사자 같은 여자군. 왕비를 창문이 없는 방에 가두고 잘 감시해라. 절대로 자결하게 만들면 안 된다.”

그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연회장의 출구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내관은 왕비가 거사를 마친 줄 알고 잠긴 문을 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간신배의 우두머리가 멀쩡히 살아서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소시비오스는 그런 내관을 내려다보면서 그에게 말했다.

“반역자 아가토클레스가 근위병의 배신자들과 함께 감히 왕비 전하를 시해하려고 했다. 다행히 나와 다른 근위병들이 반역자들을 처단했지만, 왕비 전하께서는 그 충격으로 혼절하시고 말았지.”

그 말에 소시비오스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내관이 연회장 안을 바라보자 쓰러진 왕비를 부축하는 근위병 두 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관은 궁정에서 일한 지 20년 이 넘는 자였기에 자신이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곧바로 알아챘다.

“소시비오스 재상님께서 반역자의 손아귀에서 왕비님을 구하셨군요! 당장 전 알렉산드리아 시내에 공문을 붙여 재상님의 공적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현명한 자로군. 그리고 라피아 전투에서 살아남은 우리 병사들이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올 때마다 내게 보고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재상님.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 이번 전투에 참전했던 이집트 원주민 출신 병사 약 이천 명이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걸 확인했습니다.”

내관의 말을 듣고 소시비오스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외쳤다.

“벌써 패잔병들이 돌아오고 있단 말이냐! 역시 행운의 여신께서는 내게 미소짓고 계신 게 분명하다!”

* * *

기원전 215년 8월 말.

알렉산드리아의 궁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암투에서 승리한 소시비오스가 셀레우코스 제국군의 공격에 버틸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 하스드루발은 함대를 이끌고 몰타섬에 도착했다.

마시니사 왕자는 하스드루발이 곧바로 알렉산드리아로 향하지 않는 이유를 궁금하게 여겨 그에게 물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한다고 하시더니, 이 먼 몰타섬까지 오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마시니사 왕자님. 혹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의 목마에 대해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리스의 영웅들이 적에게 거대한 목마를 선물하는 척하며 그 안에 복병을 숨겼다는 이야기 말씀입니까? 그리스인 가정교사에게 들어 본 적 있습니다.”

“저는 그 트로이의 목마와 비슷한 전략으로 알렉산드리아를 공략할 생각입니다.”

“네? 카르타고인이 보낸 선물을 알렉산드리아에 틀어박힌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인간들이 순순히 받겠습니까?”

“받을 리가 없지요. 하지만 로마인이 보낸 선물이라면 별 의심 없이 받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아! 그래서 안티오코스 왕에게 로마군의 갑옷을 전리품으로 달라고 하셨던 거군요!”

“맞습니다. 이제 곧 제가 풀어 준 이집트 원주민 포로 이천 명이 알렉산드리아 시내에서 반란을 일으킬 겁니다. 그때 마침 로마가 보낸 지원군을 태운 함대가 항구에 도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잔당들은 기뻐하면서 수문을 열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항로를 몰타섬으로 잡으신 거군요! 로마의 지원군으로 위장하려면 함대가 서쪽에서 나타나야 하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왕궁으로 쳐들어가면 원주민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혼이 빠진 알렉산드리아 수비대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카르타고의 주신 바알 함몬께서 장군님께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혜를 내리셨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입니다! 역사에 남을 전투에 다시 한번 이름을 남기게 돼서 영광입니다!”

하스드루발은 마시니사 왕자의 말을 듣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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