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63화 (163/201)

[ 163 ] [162화] 최고의 전리품 (4)

기원전 215년 9월 초.

이집트의 최고 권력자가 된 소시비오스는 직접 알렉산드리아의 성벽에 올라 사방에서 몰려드는 피난민 무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적어도 십만 명은 되겠군. 벌써 저렇게 많은 난민이 모여들다니··· 셀레우코스 제국 놈들이 내 영토를 굶주린 메뚜기 떼처럼 휩쓸고 다니고 있는 모양이구나!”

사실 끊임없이 알렉산드리아로 난민들이 몰려드는 가장 큰 원인은 하스드루발이 풀어 준 알렉산드리아 출신이 아닌 이집트 원주민 포로들이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이웃들에게 곧 셀레우코스 제국군이 공격해 올 테니 장엄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치라고 전했다.

그러나 전장에 나서지 않았던 소시비오스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리 없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수비대장도 성문 앞에 개미 떼처럼 모여든 인파를 내려다보며 소시비오스에게 말했다.

“소시비오스 재상님. 피난민 중에 가지고 온 식량이 떨어져 굶주리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저들을 시내로 들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항구가 봉쇄되지 않아 곳곳에서 물자를 들여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장기 농성을 염두에 두고 식량을 아낄 필요가 있다. 피난민 중에서 그리스인은 성벽 안으로 들이고 바르바로이는 통과시키지 마라. 만약 성문이 열릴 때 허가 없이 지나가려고 하는 자는 엄하게 처벌해라.”

“아···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재상님.”

알렉산드리아 수비대의 병사들은 왕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재상의 명령에 따라 성문을 지나려는 피난민들을 엄히 처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벽 안에 살고 있던 이집트 원주민 출신 시민들은 소시비오스가 성 밖에서 굶주리고 있는 친인척과 친구들이 방치하라고 명한 것을 알고 알렉산드리아의 빈민가의 후미진 곳마다 모여 분통을 터뜨렸다.

“이게 말이 돼?! 셀레우코스 제국의 강도 떼들이 몰려오고 있는데 성문을 열지 않겠다고?!”

“아예 안 여는 게 아니래! 그리스인은 시내에 들여보내고 있다더군!”

“소시비오스 그 개자식! 우리 이집트인은 짐승처럼 길바닥에서 굶어 죽으라는 거냐! 그나마 말이 통하는 아르시노에 왕비가 권력을 잡나 했더니,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하스드루발이 풀어 준 알렉산드리아 출신 이집트인 포로들은 그렇게 삼삼오오 모여 간신 소시비오스를 욕하는 동포들을 보면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네들 말이 맞아! 어쩌다 삼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이집트인이 그리스의 야만인들에게 노예 취급을 받게 됐단 말인가!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우리 손으로 간신 소시비오스를 끌어내리자!”

“분하지만 지금은 어쩔 방법이 없잖아? 반란을 일으켜 봐야 안티오코스 왕만 좋아하겠지! 그래 봐야 또 다른 그리스인에게 좋은 일만 시킬 뿐이야!”

“그럼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생각인가?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라면 빌어먹을 소시비오스 일당을 하나라도 더 때려죽이는 편이 낫지 않겠어?”

“맞는 말이다! 결국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더라도 우리 이집트인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 줘야 해! 그래야 앞으로 조금이나마 더 나은 취급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알렉산드리아의 빈민가를 중심으로 조용히 부풀어 오르던 반소시비오스 여론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소시비오스가 알렉산드리아의 성문을 걸어 잠그고 이집트 원주민 출신 피난민을 도시 밖에 방치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밤, 시내 곳곳에서 횃불을 든 폭도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친소시비오스파 귀족의 저택을 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간신 소시비오스를 죽여라!”

“이집트인에게 자유를!”

손에 횃불을 든 폭도들의 붉은 물결이 지표를 뚫고 나온 용암처럼 거리에 흘러 다니며 간신 무리의 저택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불쏘시개가 되어 버린 저택에서 간신히 몸만 빠져나온 소시비오스파 귀족들은 왕궁으로 몰려가 대성통곡하며 재상에게 하소연했다.

“소시비오스 재상님! 거리 곳곳에 횃불을 든 바르바로이 폭도들이 몰려다니며 그리스인의 집에 불을 지르고 있습니다!”

“재상님! 가만히 두고 보실 생각이십니까! 이러다가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고 알렉산드리아가 잿더미가 되고 말겠습니다!”

소시비오스는 울상을 짓고 있는 귀족들을 진정시키려고 일부러 분노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바르바로이들이 드디어 실성한 모양이군요! 모두 왕궁에서 쉬고 계시지요! 지금 당장 군대를 출동시켜 폭도들을 진압하고 주동자를 잡아 처형하겠습니다!”

그는 즉시 왕궁을 지키고 있던 근위대와 항구와 성벽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까지 동원해 폭도들을 진압하게 했다.

곧 동방의 진주라고 불리는 대도시 거의 전역에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전투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소시비오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군대를 출동시키면 곧 반란이 진압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폭도들은 오히려 이집트 근위대와 접전을 벌이며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라피아 전투에 참전했던 이집트 원주민 출신 장교들 덕에 수적으로 우세한 폭도들이 비교적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시비오스는 왕궁의 탑에 올라 그 모습을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러다가는 셀레우코스 제국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내전으로 나라가 망하고 말겠어. 이제 몇 달만 더 버티면 왕좌에 앉는데 어찌 이런 일이······.”

그때, 그의 등 뒤에서 한 병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시비오스 재상님께 보고드립니다! 조금 전 로마의 지원군을 태운 함대가 항구의 수문에 도착해 입항 허가를 요청해 왔다고 합니다!”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항구를 지키는 초병의 보고에 따르면 전함의 갑판 위에 있던 병사들이 모두 로마군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소시비오스가 로마에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연락선을 보낸 것은 불과 3주 전.

로마 원로원이 자신의 요청을 받자마자 지원군을 보낸 것이 아니라면 로마의 함대가 도착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기였다.

그러나 주도면밀한 그도 현재의 급박한 상황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지고 말았다.

“뭘 그런 걸 일일이 묻고 있는 거냐! 네 눈에는 왕궁으로 몰려드는 저 반역자 무리가 안 보인다는 말이냐?! 당장 수문을 열어! 로마군을 이리 데려오라고!”

* * *

한편 소시비오스가 시시각각 늘어나는 폭도들을 바라보며 초조해하고 있을 때, 하스드루발은 거대한 5단 노선의 갑판 위에서 굳게 닫힌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수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집트의 수뇌부가 잘 속아 줘야 할 텐데. 안 그러면 지금까지 안티오코스 왕에게 자원봉사해 준 거밖에 안 되는데······.”

고대 지중해 세계 대부분의 나라는 해가 떠 있는 동안에만 항구에 배를 들이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야 선박의 국적을 확인하고 적국의 군대나 해적을 통과시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스드루발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자신의 수송선단을 알렉산드리아로 몰고 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로마군 병사들의 갑옷을 입었다고 해도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는 이집트의 병사들이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카르타고군을 알아보고 수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풀어 준 이집트인 포로들에게 날짜를 정해 가며 반란을 일으키라고 미리 지시해 둔 것이었다.

초조함을 견디느라 오른손 엄지손톱을 뜯고 있던 하스드루발은 소시비오스의 명을 받은 병사가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 설치한 망루에 올라 횃불을 휘두르고 나서야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됐다! 벌써 수문을 열어 주다니, 지금 이집트의 권력을 잡은 자가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나 보네! 내가 풀어 준 이집트인들이 생각보다 잘하고 있는 모양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하스드루발의 함대 앞을 가로막고 있던 굵은 쇠사슬이 치워지자, 잠시 바알 함몬의 손바닥 모양 선수상을 떼어 둔 카르타고의 함대가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 들어섰다.

소시비오스에게 충성하는 그리스 출신 병사들은 로마 해군의 함대로 위장한 배들을 보며 뛸 듯이 기뻐했다.

“드디어 건방진 반역자 놈들을 처단할 수 있겠구만!”

“벌써 지원군이 도착하다니! 소시비오스 재상님께서는 행운의 여신께 사랑받고 계신 게 분명해!”

그러나 그들은 전함에서 로마 군단병의 갑옷 로리카 하마타를 입은 페니키아인인 신성대 병사들이 한 명씩 내릴 때마다 점점 의아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저기··· 원래 로마인 중에도 저렇게 수염을 기른 사람들이 많았나?”

“글쎄···? 그런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요즘은 로마에도 그리스 문화가 유행하는 거 아닐까?”

신성대 병사들이 모두 내린 후 피부가 까무잡잡한 리비아인 병사들이 배에서 내리고 나서야 이집트군 병사들은 상황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리비아인을 병사로 쓰는 나라는 카르타고와 이집트 외에는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저건 리비아인이잖아! 속았다! 카르타고군의 기만전술이었어!”

“어서 재상님께 알려라! 카르타고군이 쳐들어온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그들이 왕궁에 경계경보를 울릴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모두 공격하라! 항구에서 이집트군이 한 놈도 빠져나가면 안 된다!”

장군의 명령이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 울려 퍼지자 신성대 병사들이 번개 같은 몸놀림으로 적군을 처치하며 항구를 장악해 나갔다.

기습을 당한 이집트군 병사들은 그들이 휘두른 로마군의 검 글라디우스가 달빛을 반사하며 번뜩일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짚단처럼 쓰러져 갔다.

“끄아악!”

“적군이 너무 많다! 싸울 생각 말고 왕궁으로 도망쳐라!”

간신히 살아남은 이집트군 병사들은 항구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곳에는 이미 하스드루발이 라피아에서 풀어 준 이집트 원주민 포로 수백 명이 손에 무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군과 반란군 사이에 끼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집트군 병사들에게 그리스어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의 손에 들려 있던 검과 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스드루발은 알렉산드리아의 항구를 완전히 장악한 후 자신을 도운 이집트 원주민 반란군의 리더에게 말했다.

“잘했다! 너희들 덕분에 손쉽게 항구를 장악했다! 다음은 왕궁을 장악할 차례다!”

“그 말씀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그렇지 않아도 지금 동포들이 왕실 근위대와 왕궁 근처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희생을 줄이려면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겠구나! 어서 나를 전장으로 안내해라!”

하스드루발과 카르타고군 병사들은 반란군 리더의 안내를 받아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는 광장으로 신속하게 진군했다.

이집트 왕실 근위대 병사들은 배후에서 로마군의 복장을 한 병사 1만 5천 명이 몰려오는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질러 댔다.

“드디어 로마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살았다! 우리가 이겼어!”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로리카 하마타를 입은 신성대 병사들은 환하게 웃고 있는 그들의 배후를 공격하며 전투의 함성을 질렀다.

“바알 함몬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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