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65화 (165/201)

[ 165 ] [164화] 동상이몽 (2)

“카르타고와 셀레우코스 제국,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신이시여! 세 나라의 앞날에 축복을 내려 주소서!”

하스드루발은 알렉산드리아 왕궁의 연회장에서 포도주가 가득 담긴 은잔을 높이 들고 건배사를 외쳤다.

그러자 넓은 연회장을 가득 메운 천 명이 넘는 사람이 그를 따라 일제히 잔을 들고 외쳤다.

“세 나라의 앞날에 축복을 내려 주소서!”

하스드루발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안티오코스 왕은 그 모습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입을 열었다.

“하스드루발 장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연회장에 이집트 출신 바르바로이가 꽤 많이 보이는군. 저 대머리에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반사돼서 눈이 부실 지경이야.”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이집트인 신관들을 연회에 초대했습니다. 이곳 원주민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단 하룻밤 만에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이집트인은 신앙심이 대단한 민족이라 토착 신관들의 세력이 여전히 막강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나도 알고 있네. 그래서 프톨레마이오스 일가의 남자들은 머리를 완전히 밀고 백성들 앞에서 이집트인 행세를 하지 않나? 그리스인의 자긍심도 버린 거나 마찬가지지.”

“다른 그리스인에게는 분명히 그렇게 보이겠군요. 하지만 먹이를 주지 않고 사자를 길들이려다 보면 언젠가 잡아먹히게 되는 법입니다.”

“꽤나 인상적인 비유로군. 그럼 자네는 프톨레마이오스 일가의 대처가 명예롭고 정당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나?”

“제 짧은 식견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명예롭지는 못하지만 그럭저럭 제법 합리적인 방법으로 이집트를 다스려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집트를 백 년 가까이 다스려 오면서 지금껏 원주민이 반란을 일으킨 적은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것도 바로 며칠 전까지의 일이지만 말입니다.”

안티오코스 왕은 그 말을 듣고는 내심 놀라며 하스드루발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그저 뛰어난 군사지휘관으로만 여겨 왔던 젊은 카르타고인 장군이 이집트의 역사를 논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 구조를 평가하며 통치자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애써 아직 태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지금 알렉산드리아를 하스드루발에게 넘겨주면 이집트인들의 마음을 휘어잡아 카르타고에 충성하게 만들 거라는 생각에 마음을 졸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의 안색을 살피면서 술잔을 주고받으며 만찬을 즐겼다.

그러다 연회장의 분위기가 한창 달아올라 시끌벅적해져 주변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 어려워졌을 때, 마침내 안티오코스 왕이 먼저 은근히 속내를 드러냈다.

그는 이집트풍으로 요리한 하이에나 고기에 손을 뻗는 하스드루발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스드루발 장군. 그런데 로마와의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카르타고 정부가 아직 혼란스러운 알렉산드리아를 잘 통치할 수 있겠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동맹국의 내정에 간섭할 생각은 없네. 하지만 셀레우코스 제국과 카르타고는 함께 강대국 로마에 대항해 싸우고 있지 않나?”

“제가 지혜가 부족해 로마와의 전쟁과 알렉산드리아를 통치하는 일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카르타고는 사람이 귀한 나라지 않나. 짐은 양국이 국가의 존망을 걸고 전쟁을 치르는 마당에 카르타고 정부가 뛰어난 군사지휘관과 귀한 병사를 전장 대신 알렉산드리아로 보내야 하는 게 마음에 걸리네. 이만한 대도시를 통치하려면 총독과 수비대가 꼭 필요할 테니 말일세.”

하스드루발은 언뜻 듣기에는 그럴싸한 젊은 왕의 말에 가시가 박혀 있음을 눈치챘다.

‘이거 봐라? 지금 카르타고 인구가 너무 적어서 알렉산드리아 먹으면 탈 나니까 손 떼라는 소리지? 틀린 말은 아니라서 더 열 받네.’

현재 카르타고의 인구는 속주까지 합쳐서 2백만 명이 조금 넘는 데 비해 알렉산드리아는 도시 하나의 인구가 1백만 명에 가까웠다.

안티오코스 왕의 말대로 카르타고가 로마와의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이만한 대도시를 통치하기 위한 인적자원을 준비하는 게 대단히 어려운 일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그렇다고 해서 힘들게 점령한 알렉산드리아를 포기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안티오코스 왕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로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저도 폐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참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가능하다면 알렉산드리아를 셀레우코스 제국에 팔고 싶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그래! 얼마를 주면 되겠나! 내 셀레우코스 제국의 모든 금과 은을 긁어모아서라도 자네가 제시한 가격을 지불하겠네!”

“물론 가격 흥정도 해야겠지만, 그 전에 폐하께 확답을 듣고 싶은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가?”

“폐하의 신하 중에서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한 이집트 전역을 다스릴, 총독 자리에 앉힐 만큼 신뢰할 만한 인물이 있는지요?”

“그··· 그건······.”

“셀레우코스 제국의 이집트 총독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참칭한 다음 로마와 동맹을 맺기라도 하면 카르타고에도 큰 위협이 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음······.”

하스드루발이 말을 마치자마자 안티오코스 왕의 입술 사이에서 무거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카르타고에 알렉산드리아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앞서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셀레우코스 제국도 수도인 안티오케이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알렉산드리아를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가장 큰 숙적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몰락한 지금도 많은 적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현대의 터키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 반도 북서쪽에는 페르가몬 왕국이 셀레우코스 제국 영토에 끊임없이 첩자를 보내 반란을 조장하고 있었다.

또한 제국의 동부 지역에는 스키타이계 유목민 부족의 나라 파르티아와 인도 북서부 지역의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박트리아 왕국이 최근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동맹을 맺었다.

이 세 나라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을 섬기던 총독이나 부족장이 반란을 일으켜 건국한 나라라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셀레우코스 제국의 역사를 돌이켜 봤을 때 안티오코스 왕이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정벌하기 위해 지중해를 건너거나 동방으로 원정을 떠났을 때 그가 임명한 알렉산드리아의 총독이 반역을 일으킬 확률은 지극히 높았다.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동경하는 디아도코이 왕국 출신 그리스인에게 기회가 왔을 때 왕위에 오르는 일은 거의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어두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 하는 안티오코스 왕에게 다시 말했다.

“폐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카르타고와 셀레우코스 제국 중 어느 나라도 당장은 알렉산드리아를 통치할 형편이 못 되는 듯합니다.”

“자네 말대로다. 박트리아가 제국에서 떨어져 나간 지 삼십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만 잊고 있었군.”

“안티오코스 폐하.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셀레우코스 제국은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한 나일강의 서쪽 지역을 현지인들이 스스로 나라를 세워 통치하도록 내버려 두는 겁니다.”

“뭐라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물론 새로운 이집트 정부는 카르타고와 셀레우코스 제국 두 나라를 섬기면서 매년 조공을 바치게 해야겠지요. 그렇게 하면 양군은 국력을 소모하거나 반란을 두려워하지 않고도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새 이집트 정부가 배신을 하면?”

“그때는 다시 폐하와 제가 함께 배신자들을 벌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애초에 새 이집트 정부도 카르타고와 셀레우코스 제국과 양면 전쟁을 벌이고도 무사할 수는 없다는 걸 이번 전쟁으로 충분히 깨달았을 겁니다.”

“흐음··· 지금 상황에서는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으로 들리는군.”

하스드루발의 제안은 얼핏 듣기에는 셀레우코스 제국에게 유리한 조건인 것처럼 들렸다.

그의 말대로 새로운 이집트 정부가 수립돼도 나일강의 동쪽 지역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토가 되는 데다 안티오코스 왕은 예정보다 빨리 원정을 마치고 수도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진짜 속셈은 알렉산드리아에 친카르타고 성향의 위성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하스드루발은 지난 전투에서 이집트인 포로를 풀어 주고 그리스인의 권력 독식을 끝내 알렉산드리아의 이집트 원주민 사이에서 은인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게다가 간신 소시비오스의 세력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소하고 백성들에게 존경받던 아르시노에 왕비를 구출함으로써 이집트의 그리스인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스드루발은 이런 두 세력이 연합 정권을 구성하게 한 후 자연스럽게 두 명의 지도자를 뽑는 카르타고의 정부와 비슷한 구조의 정부를 구성하도록 유도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이집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랜 세월 숙적이었던 셀레우코스 제국보다는 카르타고를 종주국으로 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는 아직 위성국가라는 개념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안티오코스 왕은 하스드루발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영리한 카르타고의 장군에게 뭔가 숨은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역시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군. 그럼 여기서 미끼를 하나 던져 줘야지.’

하스드루발은 전전긍긍하고 있는 안티오코스 왕에게 다시 말했다.

“만약 이 제안을 승낙해 주신다면 제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면서 얻은 최고의 전리품을 폐하께 선물하겠습니다.”

“최고의 전리품이라? 그게 뭔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해와 묘의 부장품을 모두 폐하께 드리겠습니다.”

젊은 왕은 그 말을 듣자마자 두 눈이 접시처럼 커졌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늘 이집트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묘가 있음을 근거로 자신이 진정한 대왕의 후계자임을 주장해 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해를 제국의 수도 안티오케이아에 이장한다면 안티오코스 왕은 자신이 진정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는 임을 다시 한번 전 지중해에 공표하고 대내적으로는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그는 하스드루발이 던진 미끼를 물고 말았다.

“하···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군. 벌써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모시고 광장을 지나면서 안티오케이아 시민들의 환호성을 듣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네. 좋네. 자네 말대로 알렉산드리아는 우리의 종속국에게 맡겨 보도록 하지.”

* * *

기원전 215년 10월 중순.

하스드루발은 조국을 위협하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를 무찌르고 새로운 동맹국을 만든 후 카르타고로 돌아왔다.

카르타고 시민들은 이집트 원정군이 프톨레마이오스 왕궁의 보물창고에서 가져온 엄청난 양의 금과 은, 천년도 전에 만들어진 고대 이집트의 예술품이 배에서 내려져 수레에 실리는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스드루발의 큰 매형 보밀카르는 다른 백인회 의원들과 함께 미리 항구로 마중 나와 기함에서 내리는 처남을 반갑게 맞이했다.

“처남!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어! 하룻밤 만에 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키다니! 트로이를 지혜로 점령한 오디세우스보다 대단한 업적이라고!”

“감사합니다. 전 그저 비르사 언덕 위에 계신 신들께서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뿐이에요.”

“너무 겸손 떨 것 없어! 이미 개선식을 치를 준비를 해 놨어! 어서 전차에 오르라고!”

그러나 그는 인생에서 세 번째로 맞이하는 개선식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하스드루발이 막 전차에 오르려고 할 때 시라쿠사에서 도착한 전령이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를 헤집고 그에게 달려와서 소리쳤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하스드루발 장군님!”

“무슨 일이냐?”

“시라쿠사에 잠복 중인 첩자의 수장 히포크라테스를 대신해 장군님을 뵙습니다! 사흘 뒤에 시라쿠사의 친로마파가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도저히 시라쿠사의 친카르타고파의 세력만으로는 히에로니무스 왕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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