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 [166화] 시라쿠사 쟁탈전 (1)
기원전 215년 9월 말.
하스드루발이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후 성대한 연회를 열어 안티오코스 왕을 대접하고 있을 때, 쿠리아 호스틸리아에 모여 있던 로마 원로원 의원 3백 명은 하나같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르타고군이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할 때 천신만고 끝에 도망쳐 온 간신 소시비오스가 원로원 의원들 앞에 서서 울먹이며 말했다.
“존경하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 여러분. 우리 로마와 이집트의 연합군은 라피아에서 적에게 크게 패했습니다. 구만 명이 넘던 대군이 하루아침에 증발해 버렸습니다······.”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은 이마와 오른팔에 피 묻은 붕대를 감은 그의 말을 듣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최근 원로원 의원이 된 스키피오가 침착하게 그에게 물었다.
“소시비오스 재상님. 구만 명의 아군 중에서 도망친 자는 몇 명이나 됩니까? 설마 칸나이에서처럼 거의 다 죽거나 노예로 팔려 간 건 아니겠지요?”
“삼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전장에서 도망쳤다고 들었습니다. 그중 몇천 명 정도는 알렉산드리아로 도착했지요. 하지만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중에 적의 첩자가 숨어 있을 줄 말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적의 간계에 빠져 하루아침에 알렉산드리아를 잃고 멸망해 버렸습니다!”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로마 원로원 의원이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다스리는 이집트는 자타가 공인하는 지중해 세계 최강국이었다.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직접 대군을 지휘해 셀레우코스 제국군을 물리치고 순식간에 바빌로니아까지 진격하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해 외국에서 서적을 사들이고 학자를 초빙해 알렉산드리아를 지중해 세계 최고의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 알렉산드리아가 단 하루 만에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가장 귀중한 동맹국이 멸망했으니 로마인들로서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석 곳곳에서 원로원 의원들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찌하여 신들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신다는 말인가······.”
“이집트를 잃고 카르타고와 시라쿠사의 연합군이 육지와 바다에서 시칠리아의 밀을 로마로 운송하는 수송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대체 이를 어찌하면 좋다는 말입니까!”
로마는 마르켈루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탈리아 최고의 곡창지대인 남부 이탈리아 지역의 땅을 한 뼘도 되찾지 못했다.
그렇기에 시칠리아와 이집트에서 수입하는 밀로 군량을 충당하고 있었는데, 당장 두 식량 공급처 중 한 곳이 사라져 식량 보급망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이다.
스키피오는 하나뿐인 눈을 찡그리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전쟁을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집트가 멸망하다니···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왕이 그 정도로 뛰어난 전략가인 줄은 미처 몰랐군요.”
그 말에 소시비오스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스키피오에게 말했다.
“안티오코스 그 어린놈의 머리에서 나온 계략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냈단 말입니까?”
“바르카 가문의 하스드루발입니다! 저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사악한 자가 이집트 원주민 출신 바르바로이들을 부추겨서 폭동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 수비대의 시선이 폭도들에게 모인 사이 로마군으로 위장한 카르타고군이 시내에 숨어들었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하스드루발! 그 뱀처럼 교활한 자가 또!”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하스드루발이라는 이름을 듣고 얼굴을 찡그렸다.
로마인들은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 군단병과 싸울 때마다 이기는 바르카 가문의 두 형제의 용맹과 지혜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혐오하고 있었다.
이미 로마 시내에는 ‘한니발이 검을 뽑으면 죽기 전에 도망치고 하스드루발이 입을 열면 속기 전에 귀를 막아라.’라는 말이 속담처럼 떠돌고 있을 정도였다.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은 십만 명에 가까운 이탈리아반도 안의 군단병에게 먹일 식량을 안정적으로 수급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열띤 토론을 펼쳤다.
그러나 늘 뛰어난 대책을 내놓던 집정관 파비우스가 전장에 나가 있는 상황이어서 그런지 원로원 의원들은 오랜 논의에도 이렇다 할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그렇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오랜 논의에 점점 지쳐 가고 있을 때, 스키피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제게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 모두 먼 옛날 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가 남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을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처럼 음모와 계략으로 우리의 동맹을 차례로 빼앗은 카르타고에게 우리도 똑같은 방법으로 갚아 주면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에 한 원로원 의원이 대답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지요. 존경하는 스키피오 의원님. 뭔가 좋은 방법이라도 생각나셨습니까?”
“시라쿠사의 왕 히에로니무스는 감히 우리 로마를 배신하고 카르타고에 붙어 버렸지만, 시라쿠사의 귀족 중에는 이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 이들을 부추겨 철없는 어린 왕을 암살하게 하고 시라쿠사에 친로마파 정권을 세우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소시비오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존경하는 스키피오 의원님.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지금 시라쿠사의 귀족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카르타고군에게 한순간에 멸망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잔뜩 움츠려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그렇기에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그리스어에 능숙한 뛰어난 웅변가가 필요합니다. 바로 소시비오스 재상님 같은 분 말입니다.”
“네? 저 말씀입니까? 저 같은 자가 로마에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군요.”
“재상님께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이집트 원주민들을 직접 설득하셔서 파라오를 위해 전장에 서게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그리스인이라면 더 소시비오스 재상님의 말에 귀 기울일 것 같군요.”
“그렇지만 보시다시피 알렉산드리아를 탈출하는 동안 꽤 많이 몸이 상했습니다. 이런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제 말에 시라쿠사인들이 귀 기울여 줄 것 같지가 않군요.”
스키피오는 소시비오스가 이득이 없고 위험한 임무를 떠맡기 싫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동료 의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제가 여러분께 제안한 작전을 수행하려면 조국 로마를 위해 적지로 침입해 여론을 조작하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만약 소시비오스 재상님께서 기꺼이 이 일을 맡아 주신다면 로마 원로원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죽은 생선의 눈알처럼 생기가 없던 소시비오스의 눈동자가 다시 권력욕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로마 원로원의 일원이 된다면 언젠가 로마가 이집트를 속주로 삼는 날에는 그곳을 다스리는 총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원로원 의원들이 스키피오의 말에 동의하자 소시비오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시라쿠사에 반란을 조장하는 임무를 받아들였다.
“존경하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 여러분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군요. 오늘 이 시간부터 로물루스께서 세우신 나라의 번영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 * *
다시 권력을 추구할 길을 찾은 소시비오스는 즉시 오스티아에서 작은 배를 타고 신속하고 은밀하게 시라쿠사로 스며들었다.
그는 거리와 골목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경비병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히에로니무스 왕을 비방하는 연설을 해 댔다.
“키만 멀대같이 큰 여드름투성이 어린 왕이 시라쿠사를 카르타고인에게 넘겨주려고 한다! 이집트를 봐라! 그리스인이 다스리던 나라의 궁궐에 머리와 수염을 민 바르바로이들이 관복을 입고 드나들고 있다고 하지 않나! 이대로라면 조만간 카르타고인이 시라쿠사의 재상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자 많은 친로마파 귀족이 그의 말에 동조하며 불과 며칠 사이에 반히에로니무스 여론이 시라쿠사 시내에 들끓기 시작했다.
선왕인 히에론 왕은 5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친로마 외교 노선을 고수하며 선정을 베풀어 왔던 반면, 이제 16세가 된 어린 왕의 내치 능력은 아직 서투르기만 했다.
이런 풋내기 왕에 대한 불만이 시라쿠사인 사이에서 나날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달변가인 소시비오스가 던진 작은 불씨가 들불처럼 번져 버린 것이다.
한니발이 일찌감치 시라쿠사 거리 곳곳에 잠입시켜 둔 첩자들은 즉시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을 수장인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에게 보고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시라쿠사에 마련한 작은 집의 밀실에서 에피키데스와 함께 대책을 논의했다.
“에피키데스. 이렇게 직접 만나는 건 오랜만이군. 시라쿠사 거리에 떠돌고 있는 불온한 소문은 들었나?”
“나는 계속 히에로니무스 왕의 곁에 붙어 있느라 왕실 밖의 사정에는 어둡다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여기 얼마 전 내 정보원 중 한 명이 가져온 보고서가 있네. 한번 읽어 보게.”
에피키데스는 히포크라테스가 건넨 작은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받아 읽은 후 너무 놀란 나머지 두 손으로 코와 입을 감쌌다.
그 서신에는 선왕인 히에론 왕을 수십 년 동안 섬겨 온 15명의 중신 중 12명이 일주일 뒤에 일어날 반란을 주도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큰 세력을 가진 시라쿠사 귀족 대부분이 로마의 편에 붙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리고 우둔한 왕에게 미리 이 사실을 알려 줘 봤자 예정된 반란을 앞당길 뿐이었다.
에피키데스는 히포크라테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오 자비로운 타니트 여신이시여! 부디 저희를 지켜 주소서! 히포크라테스! 여기 적힌 내용이 전부 사실인가?”
“나도 믿고 싶지 않지만, 전부 사실이라네.”
“이대로는 일주일 뒤에는 시라쿠사의 광장이 카르타고에 우호적인 시민들이 흘린 피로 잠겨 버리고 말 것이네!”
“안타까운 일이지. 하지만 히에론 왕가의 혈통이 씨가 말라 버릴 수도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네. 하스드루발 장군님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히에로니무스 왕을 지키라고 하셨던 말씀은 기억하고 있겠지?”
“기억하고 있고말고.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나?”
“이미 카르타고 백인회에 속도가 빠른 2단 노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네. 하지만 본국에서 지원군이 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은 걸리겠지.”
“만약 반란이 먼저 터져 버리면 본국의 지원군이 시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시라쿠사의 항구를 봉쇄해 버릴 걸세.”
“그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항구를 사수할 준비를 해야겠군.”
“그 임무는 내가 맡겠네. 그동안 친카르타고파 시민들과 친분을 다져 놓은 데다 용병도 조금 고용해 뒀지. 자네는 반란이 일어나는 당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히에로니무스 왕을 항구로 모시고 오게.”
“그런다 한들 본국의 함대가 늦게 오면 모두 허사가 아닌가? 차라리 지금이라도 히에론 왕가의 사람들을 피신시키는 게 낫지 않겠나?”
“지금 섣불리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반역자들이 바로 움직여 버릴 수도 있네. 이미 왕실 근위대의 절반 이상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어. 항구에 히에로니무스 왕만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작은 배를 한 척 준비해 두겠네.”
“알겠네. 그럼 일주일 뒤에 무사한 모습으로 재회할 수 있길 바알 함몬께 기도하겠네.”
“자네야말로 몸조심하게. 건투를 비네.”
에피키데스는 오랜만에 만난 동료와의 밀담을 마치고 얼굴을 두건으로 가린 채 빈민가 골목 구석에 지은 집의 후문으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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