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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67화 (167/201)

[ 167 ] [166화] 시라쿠사 쟁탈전 (2)

빈민가의 골목을 빠져나온 에피키데스는 서둘러 시라쿠사의 왕궁 근처에 마련한 자신의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서재에 틀어박혀 책상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자신이 위기에 처해 있는 줄도 모르고 있는 히에로니무스 왕을 구해 낼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대부분 친로마파인 귀족과는 달리 시라쿠사의 평민들은 대체로 히에로니무스 왕을 지지하고 있었다.

어린 왕의 서툰 국정 운영이 불안한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선왕인 히에론 2세가 무려 56년이나 왕좌를 지키며 선정을 펼쳤고 최근 카르타고와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경기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만약 일시적으로 친로마파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도시를 점령하더라도 히에론 왕가의 멸족만 어떻게든 막아 내면 시민들의 도움으로 시라쿠사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궁정에 득실거리는 반역자들에게 들키지 않고 왕을 피신시킬 수 있을까?”

시라쿠사 출신 그리스인인 에피키데스는 한니발의 소개로 작년부터 히에론 왕가의 서기관에 임명되어 일하고 있었지만, 아직 반란군을 막을 정도로 많은 수의 수하를 궁정 안에 들이지는 못한 상태였다.

에피키데스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갑자기 파피루스 백지를 한 장 집어 든 후 깃털에 잉크를 묻혀 서신 두 장을 적어 내려갔다.

그는 서신을 다 적자 곧바로 서재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을 불러 지시했다.

“당장 집사장을 서재로 불러와라.”

집사장은 하인에게 고용주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서둘러 서재로 찾아가 에피키데스에게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에피키데스 서기관님.”

“왔나. 자네에게 급히 시킬 일이 있어서 불렀네. 먼저 최대한 빨리 이 서신을 당장 아드라노도루스 재상님과 조이푸스 장군님께 전해 주게.”

“아드라노도루스 님과 조이푸스 님이라면··· 히에로니무스 전하의 고모부이신 두 분 말씀이십니까?”

“맞네. 그리고 서신을 전달하고 나면 돈은 얼마든지 낼 테니 닷새 안에 미모와 춤 실력이 뛰어난 무희를 한 명 구해 주게. 아! 반드시 그리스인이 아니어야 하네.”

“의외로군요. 지금까지 서기관님께서는 여색을 멀리하시는 편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즐기려는 것이 아니네. 며칠 뒤면 왕궁에서 히에로니무스 전하의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가 열릴 걸세. 그때 연회의 참석자들을 즐겁게 해 주고 싶어서 그러네.”

“그러셨군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집사장은 에피키데스와의 대화를 마치고 그가 준 서신을 들고는 서둘러 재상 아드라노도루스의 저택으로 향했다.

* * *

기원전 215년 10월 중순.

시라쿠사의 왕 히에로니무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로마가 통치하는 시칠리아 속주의 도시를 점령한 후 개선식을 치렀다.

4두 마차에 탄 어린 왕이 광장을 지나가자 전리품이 담긴 수레와 포로 수백 명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시라쿠사의 시민들은 전투에서 승리한 왕에게 환호성을 보내는 대신 개선 행렬을 시큰둥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옆 사람과 수군거렸다.

“뭐야? 전리품이 저게 다야? 전투에서 이기고 온 게 아니라 작은 마을 한두 개 정도 약탈하고 온 거 같은데?”

“그러게 말이야. 저렇게 작은 승리를 거두고서 무슨 개선식을 치르냐? 보는 내가 다 민망하네.”

사실 며칠 전 히에로니무스 왕이 이끄는 시라쿠사 군이 점령한 곳은 도시라기보다는 성벽을 두른 마을에 가까운 곳이었다.

이 정도로 작은 승리를 거두고 개선식을 치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어린 왕은 하루라도 빨리 외조부 피로스처럼 위대한 정복 군주라는 명성을 얻고 싶어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억지를 부린 것이다.

그는 뜻밖에도 냉담한 시민들의 반응을 보고 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제기랄! 내가 아직 어리다고 무시하는 자들이 많은가 보군!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와도 이런 굴욕을 당하다니!”

히에로니무스 왕은 연신 투덜거리며 왕궁으로 돌아와서는 시라쿠사의 모든 귀족과 관리를 초청해 예정보다 더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아테네에서 초빙한 유명한 음악가가 리라를 연주하자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그리스인 무희들이 고운 선율에 몸을 맡기며 절제된 움직임으로 연회 참가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부름을 받은 시라쿠사의 신하들은 즉시 왕궁의 연회장으로 달려가 안주도 없이 포도주만 홀짝이는 어린 왕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듣기 좋은 말을 쏟아 냈다.

“히에로니무스 전하! 로마군에게 위대한 승리를 거두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과연 외조부이신 위대한 정복자 피로스 왕의 혈통을 진하게 물려받으셨군요!”

그러나 신하들이 입이 마르도록 자신을 칭찬해도 히에로니무스 왕의 표정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아직 열여섯 살인 그도 자신의 앞에서 신하들이 하는 말은 입바른 소리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왕이 속에서 끓어오르는 짜증을 애써 다스리고 있을 때, 에피키데스는 연회를 즐기는 척하면서 은밀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연회장의 손님 중 6할 이상이 이틀 후에 일어날 반란에 가담하기로 한 친로마파 귀족인 것을 확인하자 이마에서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시라쿠사의 귀족 중에서 자신이 한니발의 소개로 왕실의 서기관이 됐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섣불리 먼저 움직여 반역자 무리의 주의를 끄는 대신 미리 연락해 둔 아드라노도루스와 조이푸스에게 눈짓을 보냈다.

아드라노도루스는 에피키데스가 보낸 신호를 눈치채고 어두운 표정으로 포도주만 마시고 있는 조카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히에로니무스 전하. 이토록 기쁜 날 어찌 그리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계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 연회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며칠 전 에피기데스 서기관이 대단히 아름답고 춤솜씨가 좋은 무희를 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번 이 자리에 불러 분위기를 띄우게 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됐습니다, 큰 고모부. 어차피 무희야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아직 이집트인 무희를 보신 적은 없지 않으십니까?”

“이집트인이라고요? 흐음··· 그건 흥미가 생기네요. 그럼 에피키데스 서기관에게 한번 부탁해 주시지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대화를 마친 후 아드라노도루스는 에피키데스에게 왕의 뜻을 전했다.

그러자 에피키데스는 즉시 저택에 사람을 보내 미리 준비시켜 두었던 무희와 북 연주자 두 명을 왕궁의 연회장으로 불렀다.

연회 참석자들은 그리스인이 아닌 남녀 세 명이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깜짝 놀랐지만, 왕이 그들을 불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감히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커튼처럼 보이는 검은 천으로 온몸을 가린 무희와 흰 천으로 하반신만 가린 채 북을 든 남자 연주자 두 명이 인파를 뚫고 나와 연회장 한가운데에 섰다.

그때 이집트인 무희가 갑자기 몸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을 벗어 공중으로 던졌고 그와 동시에 그녀를 보고 있던 남자들의 동공이 보름달처럼 커졌다.

그녀가 이국적이면서도 노출이 심한 이집트 전통 무희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희가 공중에 던진 천이 연회장의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북 연주자들이 미리 준비된 의자에 앉으며 북을 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두두.

북 두 개가 연심으로 가득 찬 청년의 심장이 뛰는 소리 같은 경쾌한 소리를 뿜어내자 이집트인 무희가 온몸을 흔들며 관능적인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연회장 곳곳에서 열화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우리 그리스인 무희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생기가 넘치는구만!”

나이가 많고 보수적인 몇몇 귀족은 야만인 출신 무희와 그런 그녀의 춤을 보고 열광하는 청년들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요즘 것들은··· 그저 요염한 여자만 보면 혼이 나가 가지고는.”

“그러게 말입니다. 하여튼 절제를 몰라요, 절제를. 진정 고귀한 사랑은 남자끼리만 싹트는 법이거늘. 요즘 젊은이들은 그걸 잘 몰라요.”

그러나 아직 수염이 덥수룩하지 않은 그리스인 청년들은 그런 중년 귀족들의 불편함이 가득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집트인 무희의 등까지 내려온 검고 긴 생머리가 공중에 출렁일 때마다 목청을 높여 환호성을 질러 댔다.

히에로니무스 왕도 잠시 체통도 잊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파에 둘러싸여 춤을 추는 무희를 더 잘 보기 위해 까치발을 들며 소리쳤다.

“정말 대단하군! 내가 그동안 봐 왔던 그리스인 무희들의 몸짓은 뭍에 올라와 다 죽어 가는 물고기가 퍼덕거리는 수준이었구만!”

에피키데스는 어린 왕의 극찬에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전하께서 이토록 기뻐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에피키데스 서기관! 내 자네가 부르는 대로 은화를 줄 테니 저 무희를 나에게 팔게! 내 측실로 삼아 아껴 주겠다고 약속하지!”

“저야 별문제 없습니다만··· 전하의 체통이 손상될까 봐 두렵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시라쿠사의 왕인 내가 첩 하나둘쯤 두는 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라고?”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않으신 전하께서 혼인도 하시기 전에 궁정에 첩을 들이는 걸 시라쿠사 시민들이 그리 고운 시선으로 보지는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저 무희는 그리스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아······!”

히에로니무스 왕은 그제야 에피키데스가 하는 말의 뜻을 이해했다.

성별 불문하고 성인식을 치르면 결혼 적령기로 보는 다른 고대 지중해 세계의 민족들과 달리 그리스인들은 남자의 결혼 적령기를 30세에서 35세로 보았다.

그 정도 나이는 돼야 남자가 가정을 꾸릴 수 있을 정도로 정신과 몸이 성숙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왕의 경우는 후사를 남겨야 할 의무가 있기에 일반적인 나이보다는 더 빨리 결혼했고, 혼전에 첩을 두는 것도 그렇게 큰 흠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모두 여자 쪽이 그리스인일 경우인 경우에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정실인 왕비가 적통 후계자를 낳기도 전에 야만인의 피가 섞인 사생아가 태어나면 훗날 왕실의 그리스인의 혈통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히에로니무스 왕은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처음보다 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에피키데스는 연회장이 무희 때문에 혼란스러운 틈을 타 어린 왕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전하. 그리 실망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 무희를 만나시더라도 남의 눈에 띄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이 궁정에서 남의 눈을 피해서 여자를 만날 곳이 어디 있다고?”

“그렇다면 궁정이 아니라 다른 장소에서 만나시면 어떻겠습니까? 이를테면 제집 같은 곳 말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히에로니무스 왕이 입이 귀에 걸리도록 환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그래···! 그 방법이 있었구나! 에피키데스 서기관! 과연 한니발의 부하였던 자답게 머리가 좋군!”

“과찬이십니다. 오늘은 밤새워 연회가 벌어질 테니 다들 술에 취해 있을 때 어둠을 틈타 저희 집에 오시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직접 은밀하게 전하를 모시고 왕궁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그게 좋겠군! 정말 고맙네! 자네의 충정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야!”

“전하. 절대로 술에 취해 계시면 안 됩니다.”

“걱정 말게. 명심하겠네.”

그 말을 듣고 에피키데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친로마파 귀족들이 반역을 일으키기로 정한 시간은 왕이 술에 취해 있을 내일 새벽.

그는 왕궁에 반란군이 들끓기 전에 아드라노도루스와 함께 히에로니무스 왕을 시작으로 왕족들을 항구로 대피시킬 생각이었다.

그는 격렬한 춤을 추고 있는 무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일단은 성공이군. 부디 하스드루발 장군님께서 시간에 맞춰 도착해 주시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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