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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69화 (169/201)

[ 169 ] [168화] 한니발의 계책 (1)

“시라쿠사를 지켜 낸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이집트까지 정벌하다니! 이제 로마만 무너뜨리면 하스드루발의 명성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넘어서겠구나!”

한니발은 본국 카르타고에서 로마 해군의 감시를 피해 배편으로 보내온 서신을 읽자마자 드물게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시라쿠사의 왕 히에로니무스는 하스드루발과 한니발의 두 시라쿠사 출신 부하 덕에 반란군의 손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왕위를 지켰다.

그러나 현대 한국이었으면 중학교에 다녔을 어린 왕은 친척들이 살해당한 장면을 목격한 후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히에로니무스 왕은 경치 좋은 곳에서 요양하며 반란이 일어나던 날의 악몽을 떨쳐 내기 위해 자신을 구해 준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를 각각 장군과 재상으로 삼아 국정 운영을 맡겼다.

시라쿠사는 겉으로는 여전히 히에론 왕가의 나라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한니발이 통치하는 바르카 가문의 괴뢰국이 된 것이다.

또한 이집트의 두 지도자 중 한 명이 된 아르시노에 왕비는 하스드루발이 간신 소시비오스의 손아귀에서 자신을 구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해 로마로 수출하던 막대한 양의 밀을 싼값으로 카르타고 정부에 팔기로 약속했다.

불과 1년 만에 로마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 두 곳이 카르타고의 편으로 돌아선 것이다.

“동생은 이렇게 큰 활약을 하고 있는데 나는 올해 별로 한 게 없구나. 칸나이에서 승리를 거둔 후로는 마르켈루스에게 발목을 잡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으니······.”

그는 기원전 215년의 봄이 시작되자마자 자신을 집요하게 쫓아오는 마르켈루스의 로마군과 여러 번 전장에서 마주치고도 끝내 숙적을 물리치지 못했다.

로마의 맹장이 대규모 회전을 잘 피하며 한니발에게 집요하게 소규모 난전만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한니발은 별 소득 없이 반년 이상을 보내고 그해의 겨울을 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로마 원정대의 월동지인 게루니움으로 말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다시 말아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막사 밖으로 나가 남동쪽으로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았다.

아펜니노 산맥을 따라 남동쪽으로 길게 뻗은 평야 지대가 바다와 맞닿아 있는 곳에는 로마연합에서 가장 번화한 항구도시 타렌툼이 있었다.

“올해 안에는 타렌툼을 꼭 함락시키려고 했는데··· 겨울에는 역시 무리이려나.”

타렌툼은 고대 로마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이다.

이탈리아 남동부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그곳에 군항을 설치하면 동방이나 남쪽의 북아프리카에서 바다를 건너 로마를 침략하려는 적국의 해군을 감시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렌툼에는 대함대를 정박시킬 수 있는 군항이 이미 지어져 있어 100척이 넘는 로마군의 5단 노선이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 해상공격을 막기 위해 그곳에 정박해 있었다.

한니발은 적의 대함대가 도사리고 있는 남동쪽을 바라보며 하스드루발이 알렉산드리아를 차지할 때 사용했다는 전략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중얼거렸다.

“하스드루발은 이집트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알렉산드리아를 하루 만에 점령했다던데. 타렌툼에도 나와 연락을 주고받는 친카르타고파 시민이 많이 있지. 이 상황을 잘 이용하면 피를 흘리지 않고 로마군을 이탈리아 동남부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 거다.”

그는 잠시 궁리하다 갑자기 뭔가를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모든 부관을 자신의 막사로 불러 군사회의를 열었다.

모든 부관들이 자리에 앉자 한니발이 그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일 점심을 먹고 나서 기병 삼천 기로 타렌툼 인근의 마을을 공격한다. 기병대장 마하르발은 즉시 중기병대가 출격할 준비를 하도록 해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장군의 말을 듣고 천둥소리에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떴다.

로마 원정대의 월동지 게루니움에서 타렌툼까지의 거리는 약 200km.

중기병대가 하루 종일 말을 달려도 편도로 사흘이 걸리는 먼 거리였다.

또한 계절도 이미 11월 초에 들어서 추수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난 터라 로마의 마을을 약탈한다 해도 그다지 많은 군량을 얻을 수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한니발의 부관들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10년 이상 전장을 누볐음에도 아직 패배를 모르는 명장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기병대장 마하르발은 한니발과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한니발 장군님. 기병대가 먹을 군량은 얼마나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가는 길에 우리와 동맹을 맺은 도시가 제법 많긴 하겠지만, 기병 개개인이 각자 일주일 동안 먹을 식량 정도는 몸에 지니게 해라. 대신 무장을 조금 가볍게 해도 상관없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한니발은 마하르발과 함께 북아프리카 중기병 3천 기를 이끌고 타렌툼을 향해 말을 달렸다.

* * *

기원전 215년 11월 초.

한니발의 기병대는 정확히 사흘 만에 장화처럼 보이는 이탈리아반도의 뒷굽쯤에 있는 칼라브리아 지역에 들어섰다.

한니발은 타렌툼에서 도보로 하루 거리에 있는 한 로마인의 마을 근처에 도착한 후 대열을 정비한 다음 선두에 섰다.

그런 다음 그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며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기병대에게 명령하며 맹렬하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돌격하라! 풀 한 포기 남기지 말고 저 마을을 모두 태워 버려라!”

그러자 손에 횃불을 든 3천 기의 기병이 일제히 장군의 뒤를 따라 구름을 찢고 나오는 벼락처럼 마을을 향해 돌진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철제 편자를 박은 수많은 말발굽이 얼어붙은 땅을 두드려 요란한 소리를 냈다.

마을 주민들은 집 밖으로 나와 말발굽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자마자 얼굴이 눈처럼 하얗게 질려 버렸다.

“적습이다! 카르타고의 기병대가 쳐들어온다!”

겨울이 시작됐으니 한동안 전쟁이 멈출 거라고 생각했던 마을 주민들은 혼비백산하며 입고 있는 옷과 가족만 챙기고 서둘러 마을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북아프리카 중장기병대는 미리 한니발에게 지시받은 대로 도망치는 주민들을 추격하지 않고 마을의 민가와 곡식 창고에 횃불을 던졌다.

도망치던 로마인들은 적군이 포로를 잡는 데 별 관심이 없다는 소식을 알고 마을 근처에 있는 언덕에 올라 장작처럼 불타는 마을을 허망한 눈빛으로 보았다.

그들은 자주색 염료로 물들이고 금수를 놓은 화려한 갑옷을 입고 다니는 한니발을 알아보고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제기랄! 혹독한 겨울도 저 무시무시한 한니발을 막지 못하는구나!”

“오오! 제우스시여! 제발 저 잔악한 북아프리카의 야만인에게 벼락을 내려 주소서!”

바로 그때, 눈물에 젖은 로마인들의 눈에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하나가 한니발의 가슴에 명중하며 그가 거대한 흑마의 등에서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북아프리카 중기병 중 한 명이 허둥대며 말에서 내려 낙마한 장군을 부축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의 등에 태웠다.

그 모습을 보고 조금 전까지 초상집에 온 것처럼 울상을 짓고 있던 마을 주민들이 기쁨으로 가득한 함성을 터뜨렸다.

“만세! 한니발이 쓰러졌다! 괴물 같은 한니발이 쓰러졌다!”

“위대하신 제우스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번개의 신께서 적장을 벌하셨다!”

한니발의 기병대는 그런 로마인들의 환호성을 뒤로한 채 도망치듯 북쪽으로 사라져 갔다.

* * *

기원전 215년 11월 말.

한니발이 큰 부상을 입었다는 소문은 불과 3주 만에 전 이탈리아반도 구석구석까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그 날벼락과도 같은 비보를 듣고 수많은 이탈리아반도의 로마 시민권이 없는 평민들은 실의에 빠졌다.

이탈리아의 해방자를 자처한 한니발이 자신들의 참정권을 빼앗고 똑같이 전장에서 피를 흘리고도 전리품을 독식하는 로마의 횡포를 끝내 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타렌툼의 친카르타고파 시민들은 늪과 같은 절망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아직 파비우스가 독재관이던 시절 로마 원로원이 타렌툼 시민을 친카르타고파라고 의심된다는 이유로 재판도 하지 않고 사형시킨 일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니발과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타렌툼의 친카르타고파 결사조직을 이끌고 있던 헤스페로스는 벌써 한 달째 한니발의 행방이 묘연하자 동료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울분을 터뜨렸다.

“신들께서도 무심하시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한니발 장군이 사라져 버리다니!”

그의 아버지는 정치나 외교에 관심이 없는 평범한 석공이었지만, 술집에서 친구가 한니발을 찬양하는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친카르타고파로 몰려 로마로 끌려가 절벽에서 등을 떠밀려 죽고 말았다.

헤스페로스의 동료들은 실의에 빠진 대장을 위로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장. 한니발 장군께서 신들의 곁으로 떠났다고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다려 봅시다.”

“그래요. 게다가 한니발 장군의 동생인 하스드루발 장군도 대단한 명장이라고 하잖아요? 두 사람이 다시 힘을 합치면 금방 로마의 성벽을 허물어 버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의 따듯한 말을 듣고도 도저히 안심할 수 없었다.

그가 머릿속으로 혹시 한니발이 죽어 버린 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주점을 개조해서 만든 근거지의 망을 보고 있던 보초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헤스페로스 대장! 카르타고군이 보낸 사절 다섯 명이 지금 도착했습니다! 당장 대장님을 뵙고 싶다고 하네요!”

“뭐? 당장 정중히 안으로 모시고 들어와라! 다섯 명이나 온 걸 보니 이번에는 높은 사람이 왔나 보다. 뭐 하고들 있어! 대충이라도 청소 좀 해!”

대장이 말을 마치며 손수 테이블 위에서 뒹굴고 있던 빈 싸구려 포도주병을 치우기 시작하자 그 자리에 있던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급히 먼지가 뿌연 바닥을 쓸고 닦았다.

그들이 어느 정도 청소를 마쳤을 때, 허름한 옷차림에 두건을 눌러쓴 덩치 큰 남자가 보초의 안내를 받으며 부하들과 함께 친카르타고파 결사조직의 근거지 안으로 들어왔다.

헤스페로스는 자기보다 머리가 하나 정도는 더 큰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타렌툼 시민의 친구여! 저는 타렌툼의 해방을 위해 애쓰는 시민들의 대장 노릇을 하고 있는 헤스페로스라고 합니다!”

그러자 카르타고의 사절은 두건을 벗어 얼굴을 보이며 그에게 대답했다.

“그동안 서신은 여러 번 주고받았지만, 이렇게 뵙는 건 처음이군요. 반갑습니다. 카르타고의 로마 원정군을 이끌고 있는 한니발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헤스페로스의 눈이 순식간에 접시처럼 커졌다.

“네! 정말로 한니발 바르카 장군이시란 말입니까!!!”

카르타고군이 칸나이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둔 이후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타렌툼을 비롯한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에서는 살아 있는 전설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런 신화에나 나올 법한 영웅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으니 헤스페로스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니발은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타렌툼인의 눈앞에 왼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들이밀며 말했다.

“맞습니다. 이 반지의 인장이 보이십니까? 제가 보내왔던 서신에 찍었던 것과 모양이 같은 걸 알아보시겠지요?”

헤스페로스는 반지를 보고 그가 정말로 한니발이 맞다는 사실을 알고 더더욱 흥분했다.

“세상에! 정말로 한니발 장군님이셨군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큰 부상을 입으셨다고 들었었는데 다 나으신 겁니까? 어찌 귀한 분께서 이렇게 누추한 곳을 직접 찾아 주셨는지요?”

“제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문은 로마를 속이기 위해 일부러 퍼트린 겁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타렌툼을 로마의 손아귀에서 해방하려고 왔습니다.”

한니발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자 영웅을 만나 소년처럼 들떠 있던 타렌툼인들의 표정에 결연한 기색이 감돌았다.

헤스페로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한니발에게 대답했다.

“타렌툼 시민과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 찾아오신 장군님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 도시의 성벽은 로마의 세르빌리우스 성벽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합니다. 게다가 만 명이나 되는 로마 군단병이 주둔하고 있지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장군님께서 어떻게 타렌툼에서 로마군을 몰아내실 생각인지 감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제 짧은 소견으로는 지금 장군님께서 이끌고 계신 병사를 모두 데려와 타렌툼을 포위하더라도 족히 두 해 정도는 지나야 도시를 함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타렌툼에서 공성전을 치를 생각이 없습니다.”

“네? 그럼 어떻게 이 도시에서 로마군을 쫓아낸다는 말씀입니까?”

“얼마 전에 제 기병대가 로마인의 마을을 습격한 사실을 알고 계시지요?”

“알고 있습니다. 마을을 잃은 로마인이 몇천 명이나 타렌툼으로 몰려왔었지요.”

“저는 카르타고군의 정예병 삼백 명의 수염을 밀고 허름한 옷을 입혀 타렌툼으로 흘러 들어가는 로마인 난민들 틈에 잠입시켰습니다.”

“아!!!”

“부디 제게 이 도시의 지리를 상세히 알려 주십시오, 그럼 제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도시의 성문을 장악하겠습니다.”

“혹시 이쪽으로 카르타고군이 진군해 오고 있는 겁니까?”

“수송대로 위장한 삼천 명 정도가 타렌툼 부근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아마 일주일 후면 이곳에 도착할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저희 타렌툼 시민들도 민병대를 조직해 장군님과 함께 싸우겠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함께 이 도시를 로마의 압제에서 구해 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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