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70화 (170/201)

[ 170 ] [169화] 한니발의 계책 (2)

한니발은 친카르타고파 결사조직과 만난 지 사흘째 되던 날 밤 타렌툼을 함락시키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그는 겨울밤의 차가운 어둠 속에 스며들기 위해 온몸을 검은색 옷으로 두른 후 타렌툼의 시민지도자 헤스페로스의 안내를 받으며 부하들과 함께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섰다.

성인 남자 네 사람이 나란히 서면 꽉 차 버리는 빈민가의 좁은 골목길은 하수시설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고 곳곳에 오물이 널려 있어 코를 찌를 듯한 악취를 뿜어냈다.

한니발은 그 모습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 지중해의 대도시들은 번화가의 모습은 각양각색이지만 빈민가의 광경은 어딜 가나 비슷하군.”

그의 말을 듣고 헤스페로스가 물었다.

“전 태어나서 지금까지 타렌툼을 떠나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카르타고의 빈민가도 이런 모습인가 보군요.”

“적어도 제가 마지막으로 본 조국의 빈민가는 타렌툼과 크게 다를 것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군요.”

“아··· 하긴 조국 땅을 밟아 보신 지 오래됐겠군요.”

“벌써 십 년이 훨씬 넘었지요. 잡담이 너무 길어졌군요. 어서 앞장서시지요. 해가 뜨기 전에 시내에서 로마군을 몰아냅시다.”

“장군님의 말씀대로 될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두 사람은 대화를 마치고 화려한 대도시의 씁쓸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빈민가의 좁은 길로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그러자 몸놀림이 재빠른 히스파니아 출신 정예병 300명이 여러 무리로 나뉘어 발소리를 죽이며 두 사람을 따라갔다.

헤스페로스는 타렌툼의 서쪽 성문 근처에 도착하자 발걸음을 멈추며 한니발에게 속삭였다.

“여기서부터는 계획대로 제가 로마군 초병들의 시선을 끌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올림포스의 신들께서 당신을 지켜 주시길.”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헤스페로스는 으슥한 골목에서 비틀거리면서 걸어 나와 성문을 지키는 초병들에게 다가갔다.

로마군 병사들은 취객으로 보이는 허름한 튜닉을 입은 남자가 갈지자걸음으로 다가오자 검집에 손을 대며 큰 소리로 외쳤다.

“멈춰라! 성문 밖으로 나가고 싶으면 해가 뜬 다음에 다시 찾아와라!”

그러나 헤스페로스는 초병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성문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성문 앞에 서 있던 로마군 병사 중 한 명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 그에게 다가오며 다시 소리쳤다.

“다시 한번 경고한다! 당장 물러서지 않으면 군법에 따라 적군으로 간주하고 사살한다!”

바로 그때, 헤스페로스가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앞으로 넘어지며 간질병 환자처럼 발작하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살기등등하게 그를 위협하던 로마군 병사는 그 모습을 보고 검 대신 횃불을 들고 조심스럽게 헤스페로스에게 다가갔다.

“이봐!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로마군 병사는 등을 보이며 쓰러져 있는 거동수상자를 한 손으로 뒤집어 얼굴에 횃불을 비췄다.

그러자 병사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의 눈에 헤스페로스의 얼굴에 빼곡히 나 있는 붉은 반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으아악! 전염병이다! 전염병 환자가 발생했다!”

사실 그 반점은 얼굴에 붉은색 염료를 찍어 바른 것이었지만, 로마군 병사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로마의 군법에 따르면 전염병이 발생했을 경우 즉시 지휘관에게 그 사실을 보고한 후 환자를 민가와 숙영지에서 먼 곳에 격리해야 했다.

성문의 수비를 맡고 있던 로마군 당직 장교는 겁에 질린 병사의 비명을 듣고 다른 초병들에게 명령했다.

“당장 성문을 열어 환자를 끌어내라! 도시에 전염병이 퍼지게 두면 안 된다!”

로마군 병사들은 장교의 지시에 따라 즉시 성문을 열었다.

한니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부하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골목 여기저기에 숨어 있던 검은 옷을 입은 카르타고군의 정예병 열 명이 일제히 성문 쪽으로 뛰쳐나가며 초병들의 목을 단검으로 벴다.

로마군 장교와 초병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히스파니아 출신 켈트족 병사들의 날쌘 공격에 비명도 질러 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절명하고 말았다.

그사이 나머지 카르타고군 병사들은 재빨리 성벽의 계단을 올라 성문 위에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던 초병들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처치한 후 힘차게 횃불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수송대로 위장하고 타렌툼 근처를 지나고 있던 카르타고군 병사 3천 명이 발소리를 죽이며 성문을 지나 시내로 들어왔다.

한니발은 그들을 재빨리 여러 무리로 나눈 다음 타렌툼 민병대를 붙여 주며 말했다.

“어서 안내자의 뒤를 따라가서 목적지를 지키고 있는 로마군을 쓸어내라. 해가 뜨기 전에 타렌툼을 접수하는 거다.”

* * *

한니발의 병사들과 타렌툼 민병대는 달이 구름 뒤로 숨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거리로 밀물처럼 번져 나갔다.

그들은 순식간에 곤히 자고 있던 로마군 병사들이 갑옷을 입을 틈도 주지 않고 처치하며 관청과 병영, 항구 등 도시의 주요 시설을 빠른 속도로 점거해 나갔다.

그 솜씨가 어찌나 은밀하고 신속한지 타렌툼 시민들은 해가 뜨고 잠자리에서 일어난 다음에야 도시의 통치자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정도였다.

타렌툼 시민들은 이탈리아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귀족과 평민이 한마음으로 로마를 증오하고 있었다.

타렌툼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해군기지라는 이유로 로마는 수십 년 전 도시를 정복하자마자 도시의 수비대를 해산하고 타렌툼 원로원으로부터 군권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늘 그 사실에 분개하고 있던 타렌툼 시민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밤중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 듣자마자 뛸 듯이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전 도시의 시민들이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와 관청으로 행군하는 한니발 군대와 타렌툼 민병대를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이탈리아의 해방자 한니발 장군 만세!”

“위대한 괴력의 신 헤라클레스시여! 당신의 후손 한니발과 바르카 가문을 영원히 지켜 주소서!”

그러나 말을 탄 한니발의 곁에서 걸어가고 있던 헤스페로스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땅을 바라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한니발에게 말했다.

“면목 없습니다, 한니발 장군님··· 제 능력이 부족해서 타렌툼에서 가장 중요한 곳에서 가증스러운 로마인들을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한니발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타렌툼 인근 해안가의 높은 벼랑에 우뚝 서 있는 요새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로마군의 사령관과 2천 명의 군단병이 농성할 준비를 마치고 여전히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한니발은 고개를 돌려 풀이 죽어 있는 타렌툼 시민지도자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헤스페로스 님.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애초에 저곳을 점령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도심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척 보기에도 난공불락의 요새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로마군이 요새에서 수문을 닫아 버리면 이 도시의 항구는 그저 장식품이 되어 버립니다. 장군님께서는 분명 타렌툼의 군항과 전함을 사용하실 생각이었을 텐데······.”

“헤스페로스 님. 도저히 해결할 수 없어 보이는 문제도 대부분 관점만 조금 바꾸면 해법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혹시 장군님께서는 요새를 점령할 계책을 이미 세워 두셨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내년 봄이 오기 전에 타렌툼을 해군기지로 사용할 방법은 생각해 뒀지요.”

“그게 대체 뭡니까?”

“기존의 항구를 쓸 수 없으면 새 항구를 만들고 그곳으로 전함을 모두 옮기면 되는 일이지요.”

“네? 한니발 장군님.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로마군이 요새를 점거하고 있는 이상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는 한 척도 바다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 말에 한니발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바다로 나올 수 없으면 육로로 새 항구까지 배를 옮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헤스페로스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을 멈췄다.

한니발은 관청에 도착하자마자 타렌툼 시민들에게 말 대신 행동으로 자신의 계획을 보여 주었다.

“도시의 통나무를 전부 항구로 모아 와라. 올해가 가기 전에 항구에 정박 중인 전함을 모두 타렌툼만으로 옮긴다.”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과 타렌툼 민병대원들이 로마군이 건축자재로 쓰기 위해 비축해 두었던 통나무를 관청의 창고에서 꺼내 항구로 운반했다.

한니발은 그래도 부족한 통나무는 타렌툼을 드나드는 무역상들에게 좋은 값을 쳐주고 사들였다.

그렇게 카르타고군이 타렌툼을 해방한 지 일주일이 지나던 날, 항구에서 육지로 끌어 올려진 배들이 통나무를 바퀴 삼아 남쪽의 타렌툼만으로 줄을 지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타렌툼 주변의 지형은 언덕 하나 없는 평야 지대였기 때문에 전함 운송 작전은 신속하고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헤스페로스는 한니발과 함께 타렌툼의 성벽 위에 올라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마치 개미 떼가 커다란 먹이를 나르는 모습 같군요! 한니발 장군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통나무를 이용해 육로로 배를 옮길 생각을 해내셨습니까?!”

“고대 이집트인은 몇천 년 전부터 피라미드를 쌓을 석재를 나르기 위해 통나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저는 고대인의 지혜를 빌렸을 뿐이지요.”

“지혜롭고 박식하신 분이 겸손하기까지 하시군요! 지금쯤이면 로마 원로원이 발칵 뒤집혀 졌을 생각을 하니 속이 다 후련하군요! 장군님께 이탈리아 최대의 해군기지와 백 척이 넘는 오단 노선까지 빼앗겼으니 얼마나 속이 쓰리겠습니까?”

“저도 그 생각만 하면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제가 타렌툼을 떠나도 옛 항구 근처의 요새에서 버티고 있는 로마군을 잘 감시해 주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로마인 놈들이 올리브 가지를 손에 들고 요새에서 기어 나와 항복할 때까지 철저히 보급로를 차단하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타렌툼 시민들의 어깨에 이번 전쟁의 승패가 걸려 있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한니발은 헤스페로스와의 대화를 마치고 성벽 아래로 내려와 부관 한 명을 불러 서신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난 이제 다시 게루니움으로 돌아간다. 너는 여기에 남아 있다가 내년 봄이 오자마자 배를 타고 마케도니아의 왕에게 이걸 전해라.”

“서신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감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 밑에서 일한 지가 몇 년째인데 그걸 묻는단 말이냐? 내년 봄에 마케도니아군을 타렌툼에 상륙시킨다.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의 연합군이 로마로 몰려가면 로마 원로원도 세르빌리우스 성벽에 올리브나무 가지를 걸 수밖에 없을 거다.”

* * *

기원전 215년 12월 초.

한니발의 예상대로 쿠리아 호스틸리아에 모인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다시 한번 패닉에 빠져 허둥대고 있었다.

“아아··· 아무래도 올림포스의 신들께서 로마를 버리신 게 분명하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로마는 불과 반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충직한 동맹국이자 중요한 식량 공급처였던 시라쿠사와 이집트를 모두 카르타고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아직 지중해 최고의 곡창지대인 시칠리아의 4분의 3 정도는 로마가 통치하고 있었지만, 이런 기세라면 내년 봄이 오자마자 카르타고와 시라쿠사의 연합군에게 남은 영토를 빼앗기게 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게다가 이제 마케도니아군의 공격까지 대비해야 하니 로마는 그야말로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과 맞서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렇게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탄식하고 있을 때, 쿠리아 호스틸리아의 입구를 막고 있는 무거운 청동 문이 세차게 열리면서 근육질의 노장이 원로원 의원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집정관 마르켈루스가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릭토르들만 데리고 쉴 새 없이 말을 달려 로마로 돌아온 것이다.

원로원 의원들은 한니발과 대등한 대결을 벌여 온 맹장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고 조금 표정이 밝아졌다.

마르켈루스는 그런 동료 의원들이 말을 하기 전에 분노로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긴말 않겠습니다. 저는 지금 당장 휘하의 부대를 데리고 시칠리아로 떠나 시라쿠사를 공격하겠습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께서는 제가 시라쿠사를 함락시키고 이탈리아로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든 한니발의 발목을 잡아 주십시오.”

계절은 이미 한겨울.

지중해의 거친 겨울바람을 뚫고 바다를 건너는 것은 분명 도박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반도 남서쪽 끝의 항구도시 레기움은 아직 로마가 통치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시칠리아 북동부까지의 거리는 불과 5km 내외라 겨울에도 간혹 배가 그 사이를 오가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마르켈루스의 군대가 레기움에 도착하려면 카르타고군이 점령한 캄파니아를 지나가야 했지만, 한니발이 다른 지역에 가 있는 지금이라면 그 지역에 마르켈루스의 군대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었다.

로마 원로원은 그리 길지 않은 논의를 거친 끝에 마르켈루스의 요청을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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